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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138화 (138/200)

138화 폭군 (8)

[정찰대를 추가로 파견하는 것은 무의미, 대신 전략을 수정하겠습니다. 최단거리로 경계선까지 길을 뚫을 겁니다.]

“다크 엘프들이 역시 살아있다고……. 하긴 대수림 같은 대륙의 귀퉁이도 아니고, 이 넓은 땅을 전부 차지한 이들이 완전히 몰락했을 리가 없지.”

상대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건 상대에 대한 정보가 아예 없기 때문. 예상의 범주를 넘어서 상상이 필요한 부분이기에, 그들이 루시의 정찰병을 일개 짐승으로 취급하는 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루시는 아니었다. 이미 충분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데도 그것을 활용하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인공지능에 근본을 둔 루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비효율적인 행위.

감염체들과의 싸움을 사실상 승리로 확신한 루시는 새롭게 발견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처음에 확보한 둥지 근처부터 차근차근 영역을 넓혀 가는 게 아니라, 징검다리를 놓듯 일직선으로 직진하여 경계선까지 길쭉한 영역을 형성하려는 것이었다.

그 목적은 당연히 새로운 세상에 대한 탐사 및 포식이다.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닌가? 원래 계획대로 해도 충분해 보였는데.”

[영역을 넓힌다고 곧바로 그들과 싸운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조사하려면 반드시 그 근처까지 영역을 뻗어야 합니다,]

라온이 슬쩍 의견을 제시해 봤지만 루시는 근거를 들어서 거부했다.

[그들과 충돌이 벌어지면 당신이 앞장서 싸우십시오. 먼 과거, 당신의 조상들을 패퇴시킨 이들에게 새롭게 진화한 엘프의 힘을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내가 그들과 싸우라고.”

루시의 말에 라온은 헛웃음을 흘렸다. 사실 라온은 다크엘프들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 그들 때문에 고향에서 쫓겨나 대수림에서 살게 되었다지만, 사실 라온은 자신의 고향을 태어나고 자란 대수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못할 것 없지.’

하지만 싸움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과거의 원한 관계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바로 현재와 미래. 라온은 자신이 루시에 의해 개조 받으며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고 확신했다.

그것을 증명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은 물론 동족들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니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상 시간은 약 한 달. 한 달 안에 총력을 기울여 길을 뚫을 것입니다.]

루시는 라온이 타고 있는 공중 병력의 방향을 틀었다. 목적지는 경계선으로 향하는, 서쪽에 있는 타락 세계수들. 늘 그렇듯 타락 세계수들은 자신들을 제거하기 위한 마왕군의 별동대가 다가오면 마력이 섞인 안개로 주변을 휘감고 병력들을 불러 모아 공격하게 시켰다.

‘정말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감염체들의 주특기인 감염을 통한 진화 및 번식이 루시가 오직 그들만을 상대하기 위해 특별히 만든 전용 생물 병기 슬로스 타입에 의해 봉쇄당하니, 화력과 기술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는 감염체들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제 이것도 익숙해졌군. 가자, 티타니아.”

라온은 자신을 호위하는 병력들이 달려드는 감염체들을 모조리 막아 내는 그 틈에서, 땅에 착지해 곧바로 티타니아와 함께 주문을 시전했다.

성장의 권능을 얻기 전 평범한 엘프였을 적에는 혼자서는 쓰지도 못할 힘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끝없는 전투로 계속해서 오르는 레벨과 함께 루시가 달아 준 강심들이 공명하니, 그는 채 몇 초 만에 거대한 주문을 시전하여 타락 세계수의 힘을 막아 내었다.

[아일랜드·베타. 주포 포격]

루시가 방어 능력을 상실한 타락 세계수, 정확히는 그 안에 기생하고 있는 거대한 애벌레를 향해 거대한 몸체에 맞먹는 출력을 가진 초거대 비행종들의 포격 공격을 명령했다.

던전에서 침략종들이 지구인들을 상대로 사용했던 포격과 근본적으로 같은 공격이다. 순수한 마력을 응집해서 쏘아 내는 것.

“다음.”

라온은 여기저기 구멍이 난 상태로, 울려 퍼지는 비명과 함께 쓰러져 가는 거목을 보며 몸을 돌렸다.

수십 개의 목표물 중에 이제 고작 하나를 해치웠을 뿐이다.

“어떤가. 이 속도여도 계산 결과는 그대로인가?”

[오차 범위가 조금 늘어났습니다.]

루시도 그의 활약이 충분하다 판단했다. 어쩌면 루시가 예상한 한 달보다도, 시간이 더 줄어들지도 몰랐다.

“그동안은 할게 없겠군. 지금까지 해 오던 것의 반복이니까.”

[이곳은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곳도 있습니다.]

피식 웃은 라온이 뒷일은 본대에 맡기고 다음 타락 세계수를 처리하기 위해 떠날 때, 루시는 이미 최적화가 끝난 이곳 대신 다른 곳으로 신경을 돌렸다.

* * *

“대장, 놈들이 없습니다. 이미 도주한 것 같습니다.”

“크, 이 겁쟁이 놈들!”

대륙 중부, 한때 한 왕국의 영토였지만 이제는 계속되는 분쟁으로 엉망이 되어 버린 땅.

그곳의 한 마을에, 우락부락한 덩치를 가진 보라색 피부의 오크들이 쳐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마을에 남은 흔적들만 발견할 수 있었을 뿐, 정작 그 안에 주둔하고 있어야 할 교단 병사들은 싹 사라진지 오래였다.

“제길, 이거 뭐 건질 것도 없지 않느냐.”

그들을 이끄는 대장 오크는 괜히 집기를 부수며 화풀이를 했다. 본대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굳이 이곳을 치겠다고 선언한 것은 공적과 전리품을 독차지하기 위해서였지만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만 하고, 막상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어쩝니까, 대장?”

“돌아간다. 여기 더 있을 이유가 없다.”

물론 화를 내도 전리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으니 대장 오크는 결국 부하들에게 명령해 연합군 본대로 복귀를 결정했다.

“허, 역시 신기하군. 생긴 건 침략종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그래도 사람 말을 하다니.”

그가 나타난 것이 그때였다.

돌아가려는 오크들 뒤에서 기척 없이 나타나 감탄하는 젊은 인간 남성.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던 그가 안경을 벗고 피식거렸다.

“인간 놈, 넌 뭐냐.”

대장 오크는 이를 드러내고 그를 노려보았다. 전사의 본능은 지금 앞에 나타난 이 인간 사내가 결코 약하지 않다고 알리고 있었다.

“이곳의 인간들 중 일부가 너희 같은 괴물 놈들과 손잡았다지? 괴물 놈들 때문에 개고생 하는 입장에서는 좋게 생각할 수가 없는데.”

“이런, 건방진 놈.”

검을 뽑아든 그의 말에 오크들의 분위기가 험악하게 변했다. 다른 것 다 떠나서 그가 홀로 수십에 달하는 자신들에게 덤벼들었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

“쳐 죽여라! 별것도 아닌 놈이다!”

“정말 이 괴물들을 죽여도 효과 보는 거겠지?”

[그렇다. 그러니 죽여라. 피를!]

고함친 오크 대장의 명령에 오크들이 괴성을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리암도 칼을 빗겨들고 앞으로 내달리자, 그의 머릿속에선 오크든 뭐든 죽여 버리라는 성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죽어라, 인간!”

오크들 중 가장 먼저 그에게 접근한 오크가 손에 든 전투 도끼를 거칠게 휘둘렀다. 특유의 근력에 미약한 마력까지 실린 강공이다.

그러나 리암이 들고 휘두르는 검 역시, 파직거리는 전격 같은 마력이 터져 나오며 굉음을 불러왔다.

“쿠, 쿠허억…….”

자신의 전투 도끼가 깨져 나가고, 그 푸른 검이 자신의 몸을 베어 버리자 오크는 믿을 수 없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대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오크 무리와 리암의 전면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이, 이런 놈이 있던가!”

“확실히 쉽군. 침략종 상급종 놈들에 비하면 너무 쉬워.”

기기묘묘하고 치명적인 살인기를 시도하던 상급종들과의 전투가 몸에 익은 리암은, 오크들이 휘두르는 공격이 어딘가 느리고 단조로워 보였다.

마력의 출력도 지구인 중 손에 꼽는 그가 우위였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뿜어지는 일격에 오크들이 무더기로 휘말려 쓰러지고 피를 토했다.

“이, 이놈!”

오크 대장은 당연히 이길 줄 알았던 자신의 부하들이 모조리 썰려 나가자 당황해서 반사적으로 그에게 덤볐다.

하지만 이미 오크들과의 전투가 몸에 익은 리암은, 오크 대장의 칼마저 쳐 내고 단숨에 자신의 검을 그 목에 박아 넣었다.

[피가 흘러온다. 이 모든 것이 힘이다. 피로서 만들어지는 힘. 전장의 악귀가 되어라. 적도, 아군도 두려워하는.]

동시에 가차 없이 죽여 버린 오크들의 마력이 리암의 몸에 그대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결국 살인을 하지 못했던 지구에서는 느껴볼 수 없었던 감각에, 리암은 이를 악물고 몸을 부들거렸다. 실시간으로 자신의 힘이 늘어나는 이 고양감은 굉장히 중독적이었다.

‘더!’

당연히 그는 더 싸우기를 원했다. 이곳에서라면, 마음껏 날뛰고 마음껏 강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역시 여신께서 보내신 전사. 굉장한 실력과, 특이한 힘입니다.”

“대성녀, 다음 적은 어디 있지? 난 그들을 베길 원한다.”

하늘에서 찬란한 백익을 펼친 이벨리아가 내려온 게 그 순간이었다. 리암은 그녀를 보고 다음 적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너무 급해지실 필요 없습니다, 영웅이시여. 아직 잡아먹을 상대는 많으니까.”

이벨리아는 리암을 과거 다른 영웅들을 대하듯 대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위해 싸워 주는 리암이 곧 영웅이었으니까.

“작은 곁가지들부터 차근차근 쳐 내 가면 결국 아쉬운 쪽은 적들입니다. 분명 먼저 움직일 겁니다.”

이렇게 든든한 아군이 생긴 이벨리아는 연합에 대한 공세를 이어 갔다. ‘검은 안대를 쓴 번개의 기사’에 대한 소문이, 연합군 전체에 퍼져나간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리암, 리암 앤더슨.]

“마, 마왕이시여. 혹시 번개의 기사에 대하 알고 계시는 것입니까?”

루시가 알아보는 것이 당연했다. 리암에 대한 소문을 이야기하던 와중 유리아와 나안은 리암의 정체를 말해 주는 루시의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영웅 따위도 아니고 하늘의 기사 따위도 아닙니다.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나, 특별한 힘을 품고 있기는 합니다.]

루시는 자신의 수족들에게 리암에 대해서, 지구의 각성자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당장 그들과 같은 특수종 중 하나인 김서윤이 그 각성자 출신이니 이해가 어렵지는 않았다.

“그런 존재가 왜 이곳에 있단 말입니까?”

[우리의 적이 리암이 속한 국가와 손잡았기 때문. 아니, 교단이 여신이라고 말하는 존재 역시 그 국가에 속한 일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루시는 여기서 아예 빛의 여신으로 불리는 마리사의 정체까지 공개했다. 어차피 이 사실이 다른 곳으로 유출될 일은 없으니까.

물론 다른 세상의 존재와 그 비밀을 알고 나안과 유리아가 경악하는 것도 당연했다.

[지금은 리암 하나지만, 만약 이득이라 판단하면 얼마든지 더 넘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점점 선을 넘고 있으니 이쪽도 계속 대응해야 합니다. 나안, 그리고 유리아 모두 움직이십시오. 교단의 승승장구를 저지하고 전장의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루시는 그녀들에게 행동을 명령했다. 지금처럼 간접적으로 연합군을 움직이는 선을 넘어서, 아예 직접 이 전쟁에 개입해 자신이 새로운 세상을 정복하기 전까지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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