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폭군 (9)
“엘프들이 나선단 말입니까?”
“더 이상 그들의 행패를 두고 볼 수 없다 하셨습니다.”
나안은 반색하는 연합군 수뇌부들에게 루시의 뜻을 전했다. 물론 진짜로 나서는 건 엘프들이 아니라 엘프의 탈을 쓴 마왕군이지만, 지금 사정이 급한 연합군은 어쩌면 그 정체를 알고서도 도움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도움을 주신다면 아군의 기세가 크게 살아날 것입니다.”
기뻐한 연합군 사령부는 엘프들에게 대수림 근처의 교단 세력을 공격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이런 형태로나마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게 된 루시는, 그 말대로 대수림에 주둔하고 있던 엘프 베이스의 병력을 움직여 가장 가까이 있던 교단 세력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사제님! 적들이 옵니다!”
“아니 잠, 잠깐. 저게 엘프들이라고?”
당연히 교단은 갑작스러운 엘프들의 선전포고에 당황했고 허둥거렸다. 그러나 그 허둥거림의 가장 큰 원인은 단순히 엘프들이 자신들을 공격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최전방에서 방어 지휘를 맡은 사제는, 멍한 얼굴로 저 멀리서 몰려오는 엘프들의 군대를 보고 넋을 잃었다.
엘프들이 대수림에 은둔한 이후 그들이 신비의 종족이 된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들에 대해서 아주 모르고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라온 등을 통해서 꾸준히 엘프들의 소식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몰려오는 엘프들의 군대는 그런 정보들에 완전히 어긋나는 존재들이었다.
검은 중갑으로 전신을 감싸고, 얼굴까지 투구로 가린 묵직함. 거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짐승들을 타서 몰고 있는 엘프들도 있었다. 무겁고 새까맣다. 그것만으로 가볍고 우아하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이 우락부락한 마족들의 군대라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하늘에도 있습니다!”
“이건 말도 안 돼!”
심지어 하늘에는, 전설 속 동물인 그리폰을 형상화한 것 같은 날짐승을 타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엘프들의 군대가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런 식이 아니라는 건 안다. 엘프를 연기하고 있는 루시가 전력 증가를 위해 고증을 살짝 어기고 마개조한다는 것이 살짝 과한 탓이었다.
“그래도 문제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차피 엘프들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물기 때문에.”
다만 현지인이기도 한 유리아는 이 문제를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엘프들의 군대는 먼 옛날의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것.
루시가 조금 과하게 투자해서 개조해도,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는 이는 이제 없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두고볼 필요 없습니다. 전군 돌격.]
루시는 자신이 지휘하는 엘프 군대를 이용해 교단의 거점을 공격하게 시켰다.
“자, 자리를 지켜라! 여신께서 도우실 것이다!”
당연히 교단 세력은 처절하게 싸웠다. 모두가 하나의 신앙으로 뭉친 사람들답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다.
이것이 그들의 가장 큰 힘이기도 했다. 연합군이 동상이몽으로 뭉쳐 덩치만 크지 그 실속은 다소 떨어지는 반면에, 교단 세력은 덩치는 작아도 항상 단단하게 싸워왔다.
잃을 게 많은 이들과 잃을 게 없는 사람간의 싸움이라면 잃을 게 많은 이들이 위축되고 손해를 보는 것이 당연한 사실.
문제는 지금 몰려오는, 엘프의 껍질을 쓴 마왕군에게는 전혀 통하는 이야기가 아니란 점이었다.
“쏴라!”
병력을 지휘하던 사제가, 지원받은 화기인 박격포를 쏘도록 지시했다. 위력적인 마법 수준의 화기를 가진 박격포 탄이 하늘을 가로질러 몰려드는 엘프군 사이에 떨어지지만, 엘프들은 집단으로 마법을 시전해 불러낸 방어막으로 그것을 막아 내었다.
[포격 개시.]
그리고선 자기들도 포격을 시작했다. 모든 구성원이 마력을 가지고 있다는 고증은 철저히 지킨 루시가, 병사들을 움직여 집단 마법을 뿜어내었다.
“마, 막아라!”
“너무 많…… 으아악!”
마왕군에 비해 교단 쪽은 마력으로 마력을 막아 낼 병력이 부족했다. 괜히 지원받은 화기로 화력을 보충하는 게 아니니까.
결국 그 부족함이 드러나 포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방어선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돌파 시도.]
루시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지상군을 밀어 넣었다. 그 과정에서 희생이 발생하는 것은 사실.
“죽어라, 여신을 따르지 않는 이종족!”
교단의 성기사 하나가 이판사판이라는 듯 마력으로 강화한 창을 들고 덤벼들어, 엘프군 하나의 가슴을 깊게 뚫어 버렸다.
그는 창을 찌르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 본인의 손으로 신비의 종족이었던 엘프를 죽였으니까.
“커헉.”
그러나 엘프들은 일말의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동료가 옆에서 창을 맞든, 총탄을 맞든, 터져 버리든 전혀. 다른 엘프에게 역공을 당해 쓰러진 성기사는 당황했다.
바로 앞에서 싸웠던 베테랑 성기사인 그는 죽어 가는 와중에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싸웠던 이들에게서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대체.’
사실 이 부분은 루시는 절대 연기할 수 없는 영역이었으니,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그 이질감에 소름이 돋은 그는 흐려지는 시야에도 몸을 떨었다.
* * *
[예상 승률 98%대로 예상 시간 안에 승리했습니다. 엘프식 전투는 처음이지만, 나름 목적을 달성한 것 같아 보입니다.]
“엘프식 말입니까?”
조금의 위험도 없이 부드럽게 목표로 한 거점을 점령해 버린 루시는 나름 좋게 자신의 전술을 강평했다.
정작 이 광경을 전달 받은 나안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분명 엘프들의 전투 방식을 알려준 건 한때 엘프 기사였던 본인이었지만 그것을 조금의 융통성도 없이 곧이곧대로 해석해서 ‘어떻게든’ 이루어 낸 모습은 오히려 고증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어차피 그들이 의심해도 증거는 없습니다.]
“그, 그렇긴 합니다만.”
물론 루시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설령 적들이 아군을 포로로 잡는다 해도 그 내용물은 생물적으로 완벽한 엘프니까 문제될 것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안 당신이 합류하면 계속해서 전진하겠습니다. 교단 전체의 관심이 이쪽으로 끌릴 때까지.]
루시는 거하게 선전포고를 한 이후 나안이 합류할 때까지 점령지에서 대기했다.
그 명령대로 지금 나안은 자신이 요청한대로 크리스, 유리아와 함께 엘프군에 합류하는 중이었다.
“엘프군이 어디까지 전진할 거라고 합니까? 너무 깊게 들어가면 위험합니다!”
“목적은 후방을 교란하여 연합군의 전선들에 도움을 주는 것이니, 그리 깊게 들어가진 않을 겁니다.”
사정을 모르는 크리스는 나안의 옆에서 말을 달리며 엘프군에 대해서 물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엘프군은 루시의 마왕군과는 전혀 다른 이들이었으니 광신도 집단인 교단과의 싸움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한 탓이다.
“어?”
그 생각은 이미 승전을 거두고 거점을 점령한 엘프들을 보고 쏙 들어가게 되었다.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지는 엘프군은 승리를 거두고 거점을 점령한 상태에서도 무언가 어색함이 느껴졌다.
“너무 걱정할 것 없어, 크리스. 우리보다 더 잘 싸우겠지.”
아무것도 모르고 당황스러워하는 동생의 모습에 유리아가 차마 진실은 말해 주지 못하고 쓰게 웃었다.
[교단의 주력이 이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곧바로 전투를 준비하십시오.]
하지만 어찌저찌 적응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미 정찰병을 뿌려서 주변을 확인한 루시는, 의도했던 대로 교단의 주력을 흔들어 그 일부를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그 번개의 기사입니까? 아니면 설마 대성녀?”
[그건 아닙니다. 리암과 이벨리아는 여전히 중부 전선에 있고, 지금 이곳으로 오는 이는 세간에 라이베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성기사입니다.]
“라이베르, 들어 본 적 있습니다.”
나안의 말에 대답한 루시의 답변에 익숙한 답변을 들은 유리아가 작게 탄식했다.
[그렇습니다. 대전쟁 시절부터 활약한 성기사. 영웅들 중 하나입니다]
루시가 괜히 나안과 유리아를 불러낸 것이 아니다.
상대가 강자를 파견할 것을 예상하고 그에 대항하기 위해 고출력의 특수종을 따로 배치한 것이다.
[예상 승률은 78%. 변수가 없다면 승리합니다]
다만 어차피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니고, 상대를 기만하기 위한 일종의 흔들기였을 뿐이다. 루시는 상대가 누구를 파견하든 자신이 이득이라 판단한지 오래. 설령 대성녀 이벨리아가 와서 아군이 전멸했더라도 이벨리아의 데이터를 얻었으니 이득이라 생각할 정도였다.
* * *
“엘프들의 위치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합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콤프는 방어에 유리한 곳이 아닌데.”
엘프들이 점령한 거점 근처, 한 무리의 군대가 그곳을 향해 행군하는 중이었다. 그 무리를 지휘하는 것은 새하얀 수염을 단정히 정리한 거구의 성기사.
그는 자신들이 점령한 도시에 계속 주둔하고 있는 엘프들 이야기에 피식 웃었다.
‘그와 함께 왔다면 더 좋았을 것을.’
라이베르는 이곳에 리암과 함께 오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리암에게 검을 가르친 당사자이지만 리암의 힘이 이미 자신을 뛰어넘었음을 알고 있었다.
전장의 희망이 될 새로운 영웅과 함께 싸우고 싶었지만, 지금 교단은 어느 한쪽에 과투자를 할 만큼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내가 앞장서서 뚫겠다. 모두 따르도록. 분명 엘프 중에서도 강한 자가 있을 것이다.”
곧 검을 뽑아든 그가 자신이 앞장설 것이라 말한 라이베르는 부대를 돌격시켰다.
전략은 간단했다. 자신이 몸으로 방어를 뚫고 균열을 내면 아군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난전을 벌인다는 것.
자신의 실력을 믿으니까 가능한 행동이었다. 실제로 그의 계산대로라면 이게 제일 희생을 줄일 수 있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최루탄을 쏴라!”
물론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돌진한 것도 아니었다. 교단이 일반적인 화기만큼이나 쏠쏠하게 써먹고 있는 것이 독한 최루탄으로, 그 내성이 없는 이들에게는 적은 투자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물건이었다.
[엘프들의 정령술을 사용하면 이런 건 아무 의미가 없는데, 역시 그들이 가진 정보가 매우 적다고 판단됩니다.]
루시는 병사를 조종하여 바닥에 떨어져서 연기를 뿜어내는 최루탄을 발로 뻥 걷어찼다.
마왕군의 그 누구도 최루 가스로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애초에 고통이란 것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었으니까.
“그가 옵니다.”
바람 정령을 이용해 근처 가스를 날려 버린 나안이 돌진해 오는 라이베르를 보며 긴장했다.
따지고 보면 영웅급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마왕군과 맞붙는 첫 전투였다.
[데이터를 쌓을 좋은 기회입니다.]
“이, 이분도 엘프입니까?”
루시는 미리 대기시켰던 병사를 출격시켰다. 크리스가 그 모습을 보고 살짝 당황할 모습을 가진 병사였다.
분명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다른 엘프 베이스 병사들과 비슷한 모습이지만, 안쪽에 숨긴 강심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엘프·델타 타입의 상위종 병사.
이 델타 타입을 필두로 엘프의 탈을 쓴 마왕군이, 정면으로 교단의 주력과 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