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이변 (1)
“리암을 잡으면 어쩌려고? 역시, 김서윤 씨처럼 만드는 건가?”
[지구에 있을 때는 굳이 먼저 건들 이유가 없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먼저 덤비기까지 하니 새로운 특수종을 만들 기회입니다.]
내 눈에도 화면에 나오는 리암의 모습이 보인다. 루시는 당연하다는 듯 그를 잡고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각성자이면서 마왕군의 일부가 된 김서윤처럼 만들 생각인 것이다. 처음에는 마왕군 내부에 이런 새로운 자아를 늘려 가는 것에 부정적이던 루시는, 이제는 딱히 신경 쓰지 않고 쓸모 있다 싶으면 적극적으로 늘려 가고 있었다.
특유의 성격으로 유명한 리암이 김서윤처럼 순순히 당해 줄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것도 지금의 루시에겐 딱히 장애물이 아니었다. 이미 그보다 더 단단해 보였던 엘프 영웅 라온을 굴복시킨 것도 루시였으니까.
‘어쩔 수 없지. 루시가 강해지는 게 우리가 강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리암이 가진 지위나 존재감이 이 세상에서 결코 작지 않음을 떠올렸지만, 저기까지 기어들어 가 기어코 우리의 적이 되어 버렸으니 나는 루시를 말릴 수 없었다.
극비리에 다른 세상으로 이동하여 전쟁에 참여한 지구의 영웅은 저곳에서 죽을 것이다. 루시가 그를 어떻게 이용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온전히 지구로 보낼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럴 이유도 없었다.
[나안과 리암이 충돌합니다. 그에 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계산한 예상 승률은 88%입니다.]
곧 완벽한 마왕군의 간부가 된 나안과, 검 한 자루 들고 덤벼든 리암이 거세게 충돌했다. 루시는 기존에 확보한 리암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승률을 계산했고, 그 승률은 분명 적지 않았다.
“음?”
[……예상 이상의 출력. 기존의 150% 이상으로 확인.]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서로의 검이 부딪힌 순간. 터져 나오는 엄청난 충격파는 내가 봐도 엄청나 보였다. 지구에서 보여 주던 그의 힘과 비교해도 확실히 강했다.
[나안이 밀립니다.]
“어딜 봐서 엘프란 말이냐. 죽어라, 괴물!”
리암이 고함치며 힘을 더 끌어올리자 그만큼 출력은 더 강해졌다.
나도, 루시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성장. 순간 내 머리에 리암이 왜 저곳에 갔는지에 대한 의문이 스쳤다.
과연 그가 순순히 명령에 따라 다른 세상으로 가서 싸울까?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게 있으니 가서 싸우는 게 아닐까?
[예상 승률 조정. 예상 승률 55%.]
“그래도 5할은 넘는 거야?”
[모든 면에서 전투력의 상승이 있었습니다. 교단측의 권능 중 하나인 성장의 권능이 그에게 적용된 것 같지는 않으니, 지구와는 다른 이 엄청난 성장폭은 그가 가진 본연의 능력입니다.]
루시는 당황하지 않고 유리아를 투입시켰다. 리암이 이끌고 온 교단 병력들 중에는 유리아의 마법을 막아설 만큼 강한 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 자식들, 꼭 그놈들처럼 덤비는군.”
리암이 자신을 향해 폭사되는 마법과, 그 틈을 노리고 검을 휘두르는 나안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침략종 상급종인 위자드와 맨티스가 즐겨 사용하는 전략이 바로 이런 것이었으니까.
루시의 마왕군을 침략종 따위로 오해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비슷하긴 하다.
[제압하겠습니다.]
루시는 본격적으로 리암을 몰아붙였다. 그가 가진 출력이 분명 우위긴 했지만, 멀리서 마법을 폭격하는 유리아와 근접해서 검을 휘두르는 나안은 루시의 보조를 받아 조금의 빈틈도 없는 완벽한 합격으로 그를 몰아붙였다.
‘한끗이 부족하긴 한데.’
물론 리암도 이곳에 와서 엄청나게 성장한 만큼 잘 받아쳤다. 루시는 그를 잡고자 하지만, 그가 마음만 먹으면 그대로 도주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쪽 팔정도는 내어 주겠습니다.]
“잡았다!”
그래서 루시는 그에게 고의로 빈틈을 노출했다. 그가 도망치지 않고 나안을 공격할 수 있도록. 실제로 그는 그것을 기회라고 포착하고 단숨에 나안의 가슴팍에 검을 꽃아 넣었다.
“큭!?”
그러면서 동시에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어차피 루시가 장악한 나안의 몸은 고통 따위 느끼지 않으니까.
가슴에 틀어박힌 검은 아랑곳없이 자신의 팔을 움켜쥔 나안의 손에 당황한 리암은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임을 그때서야 알아차린 것 같았다.
[신성력을 머금은 법구]
“뭐, 뭐야 저거.”
하지만 루시는 후속타를 먹여 그를 제압하지 못했다.
자신이 위기임을 직감한 그가 무언가를 터트려 황금빛 섬광을 뿜어내더니 아군의 공격을 모조리 밀어내고 몸을 빼 그대로 도주한 것이다.
[미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자신에게 위기가 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런, 놓쳐 버렸어. 하긴 그래. 그 사람이 이렇게 쉽게 당할 것 같지는 않았지.”
너무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뭔가 허탈할 정도였다. 리암의 도주와 함께, 교단 측 세력도 함께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군을 후퇴시키겠습니다.]
뭔가 조금 억울할 만한 상황이지만 루시는 냉철하게도 바로 부대를 수습하여 다시 뒤로 물렸다. 놓친 건 놓친 것이고 자신의 목적은 이 자리를 지키며 교단을 견제하는 것뿐이니까.
[아군의 정체가 드러난 게 아닌 이상, 이번 충돌은 딱히 의미 없다고 계산됩니다.]
“현지인들도 엘프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알아챌 순 없겠지. 그래도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 지구로 돌아오려나.”
화면을 끈 나는 인터넷을 확인했다. 리암 같이 유명한 각성자는 하루에 하나 정도는 기사가 나온다. 고의로 저곳에 간 것이 뻔하니, 분명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얻었을 것이다.
리암은 일단 저곳에 가서 싸우며 자신의 엄청난 성취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소문을 듣자니 특히 연합군에 소속된 마족 병사들에게는 이미 재앙으로 불린다던가.
다만 그가 자신의 독단으로 저렇게 움직이는 건 아닐 것이다. 교단과 동맹을 맺은 이들이 이 일을 주도했을 것이고, 핵폭탄을 넘겨주었던 것처럼 리암을 보내어 무언가 이득을 얻었을 게 뻔했다.
“며칠 전 등장했던 의문의 각성자들. 혹시나 했지만 역시 교단에서 파견한 사람들이었네. 벌써 사람과 사람을 교환하기 시작한 건가.”
나는 이지연과 함께 던전에 들어갔을 때, 위기를 맞이한 각성자들을 구원한 정체불명의 사람들을 기억했다.
전력의 열세였던 그 상황에서 미국 측이 데려온 그들은 수월하게 침략종들을 상대하고 각성자들을 구해 내었다. 현장에 있던 이들만이 그들을 보았기에 대체 정체가 누구냐며 떠들었지만 결국 알아내지 못한 그들의 정체는 이번 일로 확실해졌다.
“시간을 더 두면 그들의 동맹은 더 굳건해지겠지. 교류도 늘어나고. 사람이 직접 교류한다면 단순히 총이나 성수 같은 물건들만 왔다 갔다 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라.”
[그렇다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대륙 통일을 진행하겠습니다]
“……아니야. 굳이 계획을 바꿀 필요는 없어.”
루시는 필요하다면 계획을 수정해서라도 교단을 밀어 버리겠다 말했다.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당장 루시가 라비즈다에 쏟고 있는 정성을 이곳으로 돌린다면, 서로 싸우느라 힘이 빠진 세력들은 수월하게 밀려날 테니까.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침략종 사업에서 미국이 가진 지분이 커. 그리고 그 저력의 일부분은 분명 여기서 나오는 것이겠지. 루시 네가 아직 지구에 간섭할 힘이 완벽하지 않은데, 나는 그들을 몰아내는 게 맞다고 생각하지 않아. 차라리,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게 더 낫지 않나?”
문득 떠오른 것이 현재의 지구와 침략종 간의 관계였다.
우리가 강해지면 그만큼 강해져서 우리를 끝없이 채찍질하는 그놈들처럼 적당히 상대해 주는 게 가능하다면 그들은 이곳에서의 성장과 교류를 바탕으로 더 강해질 것이고, 그 강해진 힘을 침략종들과 싸우며 지구를 위해 사용할 것이다.
즉 우리 입장에서는 적을 위해 적을 이용하는 셈. 루시는 지구를 위한 관점에서는 내 의견이 맞다며 동의했다.
[하지만 다시 리암을 만나는 경우 굳이 그를 놔줄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를 잡아 제거하는 것이 그들의 전의를 불타게 하는 채찍질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단 전체에 해당하는 것이다. 리암 하나 없어진다고 망하는 것도 아니니, 루시는 자신의 허점을 찌르고 도주해 버린 리암에게 은은한 분노를 드러내었다.
[대신 정복 및 청소 작업을 진행 중인 라비즈다에 더 집중하겠습니다. 현재 35% 완료. 예상보다 5일 이상 더 빠른 수치입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방금 전 양쪽을 합해 수천 정도가 뭉쳐서 아웅다웅하던 전장은 귀여워 보일 정도의 전장이 펼쳐졌다.
천만 단위, 더 넓게 보면 억 단위에 이르는 거대한 병력들이 거대한 면적 전역에서 조금의 쉬는 시간도 없이 치열하게 싸우는 말 그대로의 지옥.
그러나 루시가 지휘하는 마왕군은 그 지옥에서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상대를 짓밟았다.
* * *
“엘프들의 힘이 그 정도란 말인가요?”
“그래. 아니, 솔직히 힘은 모르겠다. 단순한 힘 비교라면 내가 이겼을지도 몰라. 하지만 놈들이 펼친 협공은 괴물들 같았다. 내가 싸우던 괴물들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대충은 알아들었습니다.”
“난 엘프들이 그런 놈들이란 걸 듣지 못했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벨리아의 모습에 리암이 혀를 찼다. 도주해서 빠져나오긴 했지만 아직도 전투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엘프들이 어떤 존재인지는 어떻게 전쟁을 수행하는지는 저희도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대전쟁 시절에도 대수림에 처박혀 있던, 은둔자들이기 때문에.”
이벨리아는 리암이 어떤 면에서 이렇게 격하게 반응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침량종과 싸워 본 경험이 없었으니까.
[무식하게 힘만 세지, 멍청한 여자다. 굳이 설득할 이유가 없어.]
‘성녀만 보면 왜 이러는지.’
리암은 그런 모습을 보고 머리에 울리는 성좌의 목소리에 코웃음을 쳤다.
보통은 조용히 있는 편이지만 유독 이벨리아와 대화할 때면 이렇게 한 마디씩 꼬투리를 잡고 투덜거렸다.
“나보다 더 강하고 빠른 당신이 간다면 쉽게 몰아낼 수 있을 거라고 보이는데.”
“그러고 싶지만, 제가 엘프들이 있는 북부에서 모습을 보이면 중부와 남부의 전선이 단숨에 밀릴 것입니다. 제가 중부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인력이 적들에 비해 많이 부족해 보이는군.”
넌지시 그녀에게 엘프들을 공격해 보는 게 어떠냐 제안한 리암은 그녀의 대답을 듣고 탄식했다.
실제로 교단은 인력이 부족한 편이었다. 특히 영웅급에 맞설 강자들이 부족했다. 이벨리아가 중앙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상대 진영의 영웅들을 억제하기 위함이었으니까.
당장 마족들까지 연합에 참여한 상태에서 연합군의 협력이 조금만 더 긴밀했다면, 영웅들이 조금만 더 솔선수범 나선다면 교단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이다.
“내가 이야기해 볼 수 있는데.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더 파견해 달라고 말이야.”
“그게 정말이십니까?”
그때 잠시 고민하던 리암이 이벨리아에게 먼저 제안했다.
자신 같은 사람들을 이곳으로 더 데려와서 싸우게 할 수 있다고.
[재밌는 생각이군.]
정작 그 계획의 주체가 될 그의 성좌는 남 일 이야기하듯 낄낄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