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이변 (10)
던전에 들어오는 순간까지 혹시나 하는 생각은 품고 있었지만, 정말로 일이 벌어지니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재 이지연을 비롯한 각성자들은 될지 안 될지 단 한 번도 실행된 적 없는 종류의 작전을 위해 동원된 상태.
선택지는 없었다. 누군가는 나서서 실험해 봐야 했으니까. 다만 그 결과가 점점 안 좋은 쪽으로 향했다는 게 문제였다.
“노, 놈들이 너무 많습니다. 자칫하다간 아군이 고립당합니다!”
각성자들이 이제 막 착지한 것 같은데 현지 군 관계자가 벌써부터 큰일 날 소리를 늘어놓았다.
작전의 핵심은 각성자들이 적 내부에 침투하여 임무를 성공시키는 사이 군대가 디스트로이는 물론 그 주변에 있는 호위 병력의 시선을 끌어 주는 것.
그런데 지금 예상과는 달리 채 몇 분조차 버티지 못하고 밀리고 있는 것이다.
“안 돼. 무조건 버텨야 합니다. 안 그러면 모두 고립당해 죽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우리 모두의 손실입니다!”
당연히 기겁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각성자들과 관련된 관계자들 모두가 기겁해서 어떻게든 버티라고 외칠 정도였다.
하지만 전쟁이란 것이 단순히 바라고 외친다고 수행되는 것은 아니다.
미사일을 퍼붓고 대기하던 예비 병력들까지 출격하여 어떻게든 한 손 거들려고 했지만 루시의 마왕군에 필적하는 비행종을 거느린 침략종 다수의 공격은, 아군을 계속해서 밀어내었다.
이대로 가면 당연히 각성자들은 고립당할 것이고 탈출은커녕 임무조차 실패하고 그 자리에서 몰살당할 것이다.
“루시, 움직이자.”
거기까지 본 나는 남들 모르게 자리를 빠져나왔다.
혹시 몰라서 생각만 품고 있던 것을 실행에 옮겨야 할 것 같았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제 계산에, 현재 상황에선 나노·오메가를 이용한 지원 정도로는 그들을 살릴 수 없어 보입니다.]
“맞아. 나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부족하지. 단순한 괴물과 싸우는 게 아니니까.”
몸을 덮어 가는 익숙하면서도 묘한 감각. 인적 없는 곳에서 전신을 나노·오메가로 덮은 나는 사람들 모두의 시선이 전장에 쏠려 있는 사이 은신한 상태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한다면, 이대로 가서 군대나 각성자들을 비밀리에 돕거나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식으로 해 봤자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네 힘을 빌려야겠어. 괜찮지?”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는 최정예의 부대가 항상 대기 중입니다.]
대신 이번에는 지금까지 기회만 보고 있던 루시의 힘을 빌리기로 결정했다.
비록 시간 제한이 있지만 괜찮다. 그 시간 안에 쓸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루시의 계산 결과였고, 나는 그것을 믿었으니까.
[그렇지만 전장에 개입한다면 아군의 정체가 인간들에게 노출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것을 감수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우리는 전장으로 가지 않아.”
루시는 그 와중에 내게 자신의 정체를 대놓고 드러내도 되겠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루시의 정체를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었으니까.
수많은 이목이 혈투가 벌어지고 있는 허공의 전장에 집중된 지금, 나는 주목 받지 못하고 있는 곳으로 가서 루시와 마왕군을 풀어놓을 것이다.
“우리가 이 던전을 공략한다. 코어를 부수고 본거지를 박살 내서 던전을 비활성화시켜 적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거야.”
[그렇게 된다면 인간들에게 노출될 확률이 적습니다.]
루시도 내 계획을 듣고 긍정했다. 애초에 패닉 그 자체였던 베이스 분위기를 생각하면 지금 허공에 떠 있는 디스트로이어에만 관심이 있지 그 누구도 지상에 있는 던전 코어와 적들의 본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결코 적지 않은 놈들의 본대를 상대해야 해. 할 수 있지?”
[충분합니다.]
저 먼 하늘 위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장을 애써 무시하고 지나쳤다. 이지연은 당연히 살아남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더 늦기 전에 그녀를 도우려면 빠르게 놈들의 본거지를 청소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도움이었다.
끝내 도착한 곳은 던전 코어가 있는 이 던전의 중심이자 검붉은 황무지 한 가운데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요새.
바위산으로 이루어진 그 요새가 바로 이 던전 침략종들이 본거지로 삼은 곳이었다.
다수의 적들이 또다시 하늘을 가로질러 전장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은 물론 적들의 관심마저 모조리 그곳에 쏠려 있는 상황에서, 나는 조용히 은신을 풀었다.
[예상되는 적 개체 수는 약 2천 가량. 지구의 인류가 상급종으로 분류한 강한 개체는 아직까지 미지수입니다.]
동시에 루시는 적들을 분석하였다. 자신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분석하고 어느 정도의 전력이 필요할지 가늠하는 것이다.
[대기하던 예비대면 충분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직접 관측하고 계산 결과를 도출한 것은 예상과는 다른 신뢰도가 있었다.
“좋아. 그럼 시작해, 루시. 지금까지 착실하게 키워 온 네 힘을 좀 써야겠어.”
[차원문 개방.]
더 두고 볼 것도 없었던 나는 루시에게 일을 맡겼다. 동시에 내 심장에서 시작한 기묘한 힘이 내 몸을 넘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 * *
[예비대 가동. 김서윤, 현재 여유가 있는 유일한 지휘 개체인 당신이 함께 나서야겠습니다.]
“제, 제가요?”
각기 다른 세상에 산적한 다른 일들을 동시에 처리하면서도 기쁨을 느낀 루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일을 진행했다.
어차피 병력은 미리 준비해서 대기시키고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현재 마계에서 활동하던 특수종인 김서윤까지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드디어 그분께 도움이.]
이렇게 기쁨을 느끼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자신이 자아라는 것을 각성한 이후 처음부터 열망해 오던 일을 드디어 이룰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 꾸준히 도움을 주고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루시는 그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의 보살핌을 받아서 키워 낸 자신의 군단이 나서야만 했다.
[일반형 1천, 상위종 10개체, 특수종 2개체.]
마음 같아서는 압도적인 대병력을 파견하여 그에게 자신의 마음과, 힘을 제대로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럼에도 끝끝내 효율을 계산하여 가장 최적화된 조합과 숫자의 병력을 파견하는 것은, 인공지능 특유의 어쩔 수 없는 본능과 같은 것.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승리한다는 결과는 똑같으니까.
“차원문 개방.”
자신의 몸 역시 따로 준비한 루시는 마력을 움직여 자신이 습득한 불완전한 차원문을 개방시켰다.
이미 실험은 다 끝내 놓았다. 비록 다시 이곳으로 끌려오겠지만 그래도 짧은 시간이나마 자신의 힘을 저쪽 세상에 투사하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문이 열립니다.”
자신의 탄생 그 순간부터 계속해서 이어져 있던 연결이 자신의 힘으로 강제로 확장되었다.
이 실낱같은 연결 하나만을 희망으로 삼아 버텨 온 지난 나날. 그것을 지금 보상 받는 것이다.
“전 병력 전송 완료. 연결 이상 없음, 병력 이상 없음.”
마침내 루시는 공간을 이동했다. 그것도 자신의 병력들과 함께.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나타난 마왕군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그저 전방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마계와는 전혀 다른 척박한 황무지의 풍경을 눈에 담은 루시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기다리고 있었어.”
그곳에 그가 있었다. 스스로 매개체가 되어 이 다른 세상의 군단을 이곳에 불러들인, 얼굴을 덮은 나노·오메가를 해제한 창현이.
“놈들이 아군의 존재를 눈치 채고 몰려오고 있습니다. 일단은 전투가 급합니다.”
“그래야겠지.”
하지만 루시도 그도 지금은 다른 것부터 해결해야 했다. 갑작스럽게 자기들 본거지 앞에 나타난 수많은 군세를 보고 기겁한 침략종들이 모든 병력을 이끌고 뛰쳐나온 것이다.
[전군 돌격.]
루시는 적들의 무서운 돌진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돌격 명령을 내렸다.
숫자는 적들이 두 배 정도 많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침략종들의 전술과 행동이 자신과 엇비슷하다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더 쉽게 그들의 전력을 간파하고 지금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확신한 것이다.
실제로 침략종들은 마왕군의 돌진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지구인들이 D, C 등급으로 분류한 침략종들의 주력 병사들은 육중한 몸으로 돌진하는 마왕군의 돌격병들을 막아내지 못했고, 마력을 다루며 B 등급 이상을 받은 몇몇 특수한 괴물들도 결국 마왕군의 화력을 견디지 못했다.
“약해 빠진 인간들이나 상대해 왔으니 당연한 결과입니다.”
루시는 거대한 거미의 형태를 하고 있는 아군 병사가 앞다리로 적 두턱 아귀를 관통해 죽여버리고, 오크·베타가 손에 든 마력포 사격을 집중해 아군에게 마력 방어막을 씌워 주던 부유 해파리를 저격하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메이지라고 불리는 상급종이 등장해 대응하려 했지만 김서윤이 궁니르를 겨누고 그 행동을 봉인하니, 일격에 반으로 갈려 죽어 버렸다.
이지연을 비롯한 각성자들은 큰마음을 먹고 싸워야 하는 존재가 바로 저 상급종이지만 이미 그보다 강한 마계 세력들과도 지겹도록 전투 경험을 쌓아 온 마왕군은 망설이지 않았다.
루시 본인의 아바타는 나설 일도 없었다.
‘강하다.’
예상은 했지만 예상과 직접 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심지어 침략종들은 그 주력의 일부가 전장으로 빠져 있는 상태.
그는 루시가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 두 눈으로 보고 전율했다.
처음 자신의 휴대폰에서 생겼던 이변을 눈치 챈 이후 꾸준하게 힘을 길러 온 그 이변이, 드디어 자신의 힘을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드러낸 순간이다.
“아군이 첫 충돌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분쇄한 적들을 쫓아 그대로 돌진하고 있습니다.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21분 42초 후에 아군이 놈들의 본거지 중심, 그리고 코어를 점령합니다.”
“화면 속에서 다른 세력과 싸울 때는 몰랐지. 굉장히 강해졌구나. 루시.”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왕군이 거침없이 밀고 들어가는 모습을 본 그가 감탄하며 말하니, 순간 움찔한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하고 안주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그의 칭찬에 차오르는 기쁨은 무시할 수 없었다.
“지금은 고작 이 정도의 도움일 뿐이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더 크고,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와서 저 괴물들을 모두 쓸어버리겠습니다.”
“아, 알지.”
겸손하게 말하지만 그 살벌한 내용에 그가 흠칫한 사이. 마왕군은 이미 적들의 본대를 완전히 으깨고 본거지 내부로 밀고 들어가고 있었다.
선두에 선 김서윤이 종횡무진 날뛰었다.
모든 일의 원흉이 된 괴물들에게 한풀이라도 하려는 듯 날뛰는 그녀의 공격에, 나름 고등급으로 분류되는 괴물들 모두가 일격에 쓰러져 갔다.
“저 앞에, 코어가 보여요.”
[바로 파괴하십시오.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소수 병력과 함께 단숨에 돌파한 그녀가 본거지 깊숙한 곳에 자리한 코어를 발견했다.
루시는 곧바로 파괴 명령을 내렸고, 그것을 기다리고 있던 김서윤은 지체 없이 달려들어 코어를 지키던 마지막 저항마저 쓰러트리고 자신의 결전 병기인 궁니르를 코어를 향해 찔러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