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시작일 뿐 (1)
“타, 탄두는?!”
“설치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탈출이…… 큭!”
절체절명. 디스트로이어 위에서 작전을 펼치던 각성자들은 극한의 위기 상황에 빠졌다. 일단 맡은 임무대로 핵탄두를 디스트로이어의 갑각 아래에 설치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더 이상 버티는 게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을 엄호하던 현지 군 병력은 이미 대다수가 전멸한 상태고, 계속해서 몰려오는 적 병력들은 숫자가 너무 많았다.
아무리 강한 출력을 낼 수 있어도 그 총량과 지속력에는 한계가 있다.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각성자들은 어서 이곳을 탈출해야 했지만, 탈출 헬기는 미처 이곳으로 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런 무모한 작전에 동참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이 작전에 참여한 것을 후회하며 이를 갈았다.
그만큼 희망이 없어졌다는 뜻이었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지금 이 순간 모두의 뇌리에 선명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나?]
그런 와중에서 방패를 휘둘러 덤벼들던 호랑이만 한 괴물을 쳐 낸 이지연의 뇌리에 은은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는 상황과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성좌의 목소리에 탄식했지만, 일단 고개를 저었다.
“이미 결심한대로 누군가는 해야만 했던 일이니까.”
[그렇다면 너는 누가 지켜 주느냐.]
“누구든.”
그녀 입장에서는 성좌가 갑자기 왜 이런 소리를 하는지 알 턱이 없었다. 차라리 힘이나 더 빌려주지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솟았다.
“끄아악!”
마침내 사상자까지 발생하기 시작하니 버티고 있던 각성자들은 그대로 밀리기 시작했다.
하늘도, 그들이 딛고 서 있는 디스트로이어의 등판 위도. 모두 적들만 가득했다.
탈출은 이미 불가능했다. 최선은 이대로 핵폭탄이 터지며 괴물들과 함께 산화하는 것.
실제로 상부는 이대로 그들이 무너질 것 같으면 그냥 폭탄을 터트릴 것이다.
‘각오는 했는데.’
이지연의 눈이 흔들렸다. 자신은 전장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각오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눈앞에 닥치자 망설임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더, 던전이!?”
“이럴 수가. 던전이 공략당했다!”
그러나 그 순간. 저 멀리서 퍼져 오는 강력한 파동이 그들의 몸을 스치더니, 덤벼들던 적들이 일제히 스턴 상태에 빠져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쉽게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엄연히 사실이었다. 적들을 다 처치하지 않고 이 던전이라는 공간을 유지하고 있는 던전 코어를 파괴했을 때 적들이 보이는 반응과 똑같았다.
“지금 던전 중심이 초토화되고 던전 코어가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모두 후퇴를.”
행동을 정지한 것은 이 거대한 함선형 생물체 디스트로이어 역시 마찬가지. 방어막이 사라진 사이, 서둘러 달려 온 헬기가 사투를 벌이던 각성자들을 태워 지상으로 복귀했다.
‘대체 어떻게?’
이지연은 물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모두가 그런 의문을 품었다.
아군은 물론 적들까지 디스트로이어를 중심으로 벌어진 전투에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있다지만, 본거지에 남아있던 적들은 천 단위.
그것을 뚫고 코어를 부쉈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경우였다.
“원인 불명이라는데? 자기들도 모르겠다고. 모든 신경이 네 쪽에 집중되어 있었거든.”
“그게 말이 돼?”
“말도 안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게 던전이지. 죽다 살아난 거잖아. 잘 된 거라고 생각하자.”
힘겹게 복귀한 이지연에게 창현이 다가왔다. 그는 힘없이 웃으며 차라리 이게 잘 된 일이라고 말했다.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지연조차 이번에는 의심조차 못했다.
아무리 그가 가진 힘이 특별해도 ‘혼자서’ 대형으로 분류되는 던전의 코어를 부수는 건 불가능하니까.
“이제 충분히 쉬어. 넌 죽다가 살아났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돼.”
“……나도 알아.”
지금도 선명한 죽음의 공포. 잘게 떨리는 자신의 손에 얼굴이 굳은 그녀가 고개를 떨궜다. 극복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 * *
“코어를 파괴하고, 위험할 수 있는 모든 개체를 처단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남은 시간 15분, 소요 시간은 1시간 44분여입니다.”
“압도적이고 빠르네. 역시.”
코어를 파괴하는 순간. 강렬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 가며 죽지 않은 침략종들이 일제히 활동을 정지하고 쓰러졌다.
물론 얼마 안가서 다시 일어나겠지만, 일단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위기에 빠진 각성자들은 구출될 테니까.
워낙 압도적인 승리라 루시의 마왕군은 별 타격을 입은 것 같지도 않았다.
“무수한 가능성을 생각하고, 별별 상상을 다 해 보긴 했는데. 설마 당신이었을 줄이야. 말도 안 돼.”
투구를 벗은 김서윤이 다가와서 나를 보고 기겁한 것이 그때였다.
내 정체를 공개한 셈이지만 딱히 상관없다. 어차피 김서윤은 루시와, 우리와 하나니까.
“대체 정체가 뭐죠?”
“지금까지 마왕군과 합류해 잘 싸워 놓고 이제 와서 정체를 묻는 건 좀 이상하군요.”
“서, 설마 당신이 마신이라고요? 마왕이 이야기하던?”
그녀는 루시와 나를 번갈아 보며 입을 크게 벌리고 놀라더니 눈을 파르르 떨었다.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도 충격이 큰 것 같았다.
“목적이 뭐죠? 마왕은 분명…….”
“그동안 루시의 목적은 내 목적을 위한 일종의 과정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이것입니다. 루시의 힘을 이용해 적들과 싸우는 것이죠. 내 목적은 처음부터 하나였습니다. 우리 세상을 침략한 적들을 몰아내는 것.”
나는 목적을 묻는 김서윤에게 숨김없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전혀 다른 대답을 예상했는지 그것을 들은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당신은 아마 모르겠지만 루시는 본래 자그마한 미궁 하나에서 출발했습니다. 계속되는 성장, 무한한 진화. 그것을 거쳐서 힘을 탐하고 숫자를 늘려 왔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그, 그런.”
“루시를 돕는 것이 곧 이 세상을 돕는 일입니다. 실제로 방금 당신은 그것을 해냈죠. 평범한 각성자 시절이라면 불가능했을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강심들을 부착하고, 결전 병기인 궁니르를 들고서.”
김서윤이 아직도 이곳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어느 정도 달래줄 생각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자신의 가족이 살아가는 이 땅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조금 더 힘이 날 테니까.
“이용당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길. 오히려 마왕군의 힘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룬다고 생각하는 게 더 편할지도 모릅니다. 가족을 위해, 싸우고 있잖아요?”
루시가 했으면 아마 못 믿을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던전으로 소환되어 루시에게서 받은 힘으로 직접 침략종을 죽이고 던전을 공략하게 된 김서윤은 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 * *
“이제 돌아가야 합니다.”
“대기 시간이 어느 정도라고?”
“다시 차원문을 열려면 적어도 사흘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김서윤과의 대화를 마친 직후, 슬슬 시간이 다 되었음을 느낀 나는 루시를 돌아보았다.
시간 제한이 있는 불완전한 차원문이지만 그마저도 버겁다. 다시 열려면 사흘 이상이 필요하다는 말을 명심했다.
혹시 다른 일정이 생긴다면 만약을 대비해서 반드시 사흘의 텀을 두고 잡을 생각이었다.
“덕분에 큰 도움을 받았어.”
루시가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 본 나는 일단 칭찬부터 해 보았다. 과연 정답이었는지 평소에는 조금의 감정도 보이지 않는 그 얼굴에 약간의 표정 변화가 있었다.
“돌아가서도 뭐, 어차피 너는 늘 내 옆에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작별 인사라는 것도 우리 사이엔 통하지 않는 말이다. 당장 내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여성은 루시의 여러 모습 중 하나일 뿐.
그것이 사라지더라도 루시는 계속해서 내 옆에 남아있다.
[시간이 다 되어, 모든 병력이 강제로 송환되었습니다.]
실제로 한 순간에 마치 신기루처럼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든든한 병사들이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내가 귀에 꽂고 있는 이어폰에서는 여전히 루시의 목소리가 들린다. 휴대폰 인공지능 박스디의 목소리를 기반으로 한 그 목소리는 언제나 한결같다.
“할 일을 해. 나는 일단 빨리 돌아가야 할 것 같아. 그래야 의심 받지 않을 테니.”
나는 서둘러 다시 은신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렇게 서두른 내가 베이스에 복귀한 시점은 각성자들이 가까스로 탈출해 생환한 직후.
당연히 혼돈의 도가니인 베이스는 일개 매니저 하나 사라졌다고 딱히 찾지도, 이상한 점을 눈치 채지도 못했다.
나는 그대로 사람들 틈에 섞여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복귀한 각성자들을 맞이했다. 이지연 역시 당연히 살아 있었다.
“우리의 희생이 유의미한 데이터였을까?”
그녀는 내 부축을 받으며 돌아온 자리에서 그렇게 말했다.
이번에 자신들이 몸을 던져가며 적과 싸운 것이 의미가 있느냐고.
“의미 없는 데이터는 없지.”
루시는 모든 종류의 데이터가 활용 가능한 것이라고 늘 말해 왔고, 나는 그것을 그대로 말해 주었다.
실패해도 괜찮다. 그것을 분석하고 확장한다면 오히려 더 많은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으니까.
“그건 좋아.”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곧바로 의식을 잃어버리듯 잠들어 버렸다. 육신은 초인이지만 정신은 그렇지 못하니, 급격한 피로감을 느끼고 안전한 순간이 오자 그대로 뻗어 버렸다.
[다만 제 계산에 의하면, 만약 게이트에서 저런 함선형 거대 괴수가 4개체 이상 동시에 출현하면 현재 지구인들이 가진 기술이나 능력으로는 막아 낼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또 방법을 생각해야 하는 건가?”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긴 했지만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계속해서 발전하고 진화하는 적들을 따라잡아야 하는 입장이 된 우리는 또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따라잡지 못하면, 그 대가는 멸절이다.
[그리고 대륙에서 새로운 소식이 입수되었습니다. 최근 지지부진한 전쟁에, 연합군의 연합이 서서히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복잡한 와중에 루시는 새로운 소식이 있다며 내게 전해 왔다.
본래 이쪽 세상의 일과는 관련 없는 일이지만, 루시와는 적대하는 그들 중 일부가 이곳에서는 함께 싸워야 할 동맹의 동맹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로는 묘하게 껄끄러운 일이 된 일이었다.
“연합이 흔들리면 교단을 못 이길 텐데?”
[전해들은 추측일 뿐이지만, 아무래도 전쟁을 이 상태로 유지하고 남은 것이라도 차지하기 위해서 각 통치자들이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루시는 이 일에 흥미를 보였다. 총력을 타락 세계수와 감염체들이 득실거리는 라비즈다에 쏟은 탓에, 힘으로 억누르지 않고 지켜보는 입장이라 더욱 그래 보였다.
“교착 상태가 되면 네게는 좋은 거잖아.”
[그렇습니다. 하지만 현재 대륙의 전쟁에 신경을 쏟고 있는 마계 세력이 여유를 찾게 된다면, 어쩌면 그 방향을 잃어버린 북방 영토를 되찾는 쪽으로 돌릴지 모릅니다.]
이미 루시는 깊게 저 세상 일과 엮여 있다. 커다란 이변이 생긴다면 루시도 피해 갈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거기도 난리네.”
헛웃음을 흘렸다. 어째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 아무 곳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