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시작일 뿐 (2)
“그게 무슨 소리요?! 대놓고 휴전을 하겠다니!”
“내게 그리 많은 권한이 있는 건 아니다. 마계 영주들이 지지부진한 전쟁에 실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것이 전부다.”
혀를 찬 바알은 마계 연합의 지원이 덜해질 것이라고 황제에게 통보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이득을 보기 위해 뛰어든 전쟁이 계속해서 끌리면서, 이득 대신 손해가 늘어나기 시작한 탓이었다.
마계 영주들이 대륙의 전쟁에 참여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이득을 보기 위해서였으니까. 자신들이 참전하든 안 하든 교단과의 균형이 유지되기만 하는 이상 더는 싸울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마계 북부도 되찾아야 하고, 어쨌든 쉬어 가는 시간은 필요하다.”
“큭…….”
황제는 바알에게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제대로 된 성과가 나오지 않은 건 사실이니까.
다만 이대로 마계의 군대가 연합에서 이탈하면 교단에 맞서기 위해 결성된 연합군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이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마계의 일을 빠르게 처리하면 다시 올 수 있지 않겠소?”
“아마 그럴지도.”
그러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마계의 일이 최대한 빠르게 잘 수습되어 다시 여유를 찾은 마계 영주들이 다시 연합에 합류하는 것을 기도하는 것 뿐.
바알은 할 말 다하던 전과는 달리 끙끙거리면서도 한 마디도 못하는 황제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으며 이내 통신을 종료했다.
“각하, 회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통신을 종료한 순간, 기다리고 있던 부하가 그에게 준비가 다 되었음을 보고했다.
이제는 숫자가 꽤 줄어 버린 마계 영주들을 모두 모은 총회의였다. 그 의도는 마계의 힘을 한데 모으고 자신의 진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바알은 목에 걸고 있던 마정을 만지작거렸다. 이 크리스탈이 바로 마왕의 상징이다.
‘이 날을 기다렸다. 나는 새로운 마왕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일이 다 이것을 위해서였다. 마계 영주들을 구슬려 연합군에 참전하게 만든 것도, 그들을 선동하여 이제 슬슬 연합군에서 손을 떼게 만든 것도.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은 힘을 온존했다. 이미 설득이 끝난 심복들도 있었다.
남은 일은 감히 자신에게 반발할 수 있는 이들을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뿐이었다.
“왔군.”
“인간 황제가 가만히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
바알이 회의장으로 향하니 이미 그곳에는 마계 영주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히 자리에 가서 앉은 바알은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통보는 끝났다. 우린 이제 더 이상 교단과 싸울 필요가 없다.”
“그게 맞지. 처음에야 전리품을 쓸어 담았지, 이제는 병력만 갈려 나가고 얻는 것도 없었다고.”
바알이 황제와의 대담 결과를 말해 주니 대다수가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전쟁을 그만두길 원하는 여론이 대세였으니 여기까지는 아무런 걸림돌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마계 북부에서 설치고 있는 그 검은 벌레들을 처리하는 일이겠군. 몇몇은 알고 있겠지만, 그놈들은 최근 마계를 벗어나 전장에 끼어들고 엘프들을 공격하는 등, 주제넘게 움직이고 있다.”
“크흠! 마음에 안 드는 건 사실이지만 굳이 신경 써야 하는 일인가 싶은데.”
다만 바알이 루시의 마왕군으로 화제를 돌리자 은근슬쩍 반대하는 의견이 튀어나왔다.
교단과의 전쟁과 똑같다. 지금 중부 지역에서 질질 끌리고 있는 마왕군과의 전투에 굳이 다른 지역 영주들까지 신경 써야 하냐는 뜻이었다.
그들에겐 오히려 이 기회에 자신들이 힘을 늘려 나갈 기회였으니까.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런 생각으로 북부 지역이 멸망하는 것을 관망한 결과가 바로 이것이니까. 만약 이렇게 방치하는 사이 중부 지역마저 무너지면 놈들은 더 강해질 것이고 우리는 그걸 막을 수 없다.”
바알은 코웃음을 치더니 그런 의견을 정면에서 반박했다.
“어쭙잖은 경쟁심 따위는 집어 치워라. 지금은 우리가 다시 하나로 뭉쳐야 할 때. 하나로 뭉쳐서, 저 괴물들에게 빼앗긴 땅을 다시 되찾아야 할 때다.”
“하나로 뭉치는 건 지금 싸우는 놈들이나 그래야지. 자기들끼리도 제대로 연대하지 못하는 놈들 아닌가.”
“뭐라!? 지금 말 다했소!?”
그러나 바알의 설득이 잘 먹히지는 않았다. 다른 영주들은 지금 마왕군과 싸우면서도 제대로 뭉치지 않고 어영부영인 중부 지역 영주들을 성토했고 그것에 발작한 중부 지역 영주들이 발끈하며 회의장은 순식간에 개판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이기도 했다. 마계 영주들은 마왕에게서 해방된 이후 서로 대등한 관계니까, 누가 누구에게 명령하고 무시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부 닥치게. 해방 이후 매번 이딴 식으로 흘러가니 마계가 발전할 리가 없지.”
바알이 자신의 마력을 끌어올려 폭사한 것이 그때였다.
순간 움찔한 모두가 터져 나온 강렬한 기세에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스스로들을 돌아보라. 경쟁심과 탐욕에 미쳐 서로를 경쟁자라고 생각하고 서로 싸우며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있다.”
“너,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군, 바알. 우리가 이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샛노란 눈을 번득이는 바알의 말에 보라색 피부를 가진 오크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계 영주들은 오히려 바알의 태도가 어색했다. 그들의 목적은 그저 마계 내부에서 자기들의 입지를 다지는 것일 뿐이니까. 하지만 마계를 통일하여 하나의 강력한 세력을 이루고 자신이 그 정점이 되어, 마계는 물론 그 이상을 노리고 있는 바알에게는 마계 영주들의 분열이 거슬리기 짝이 없었다.
“아니, 이제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
바알은 그런 자신의 생각을 드디어 마계 영주들에게 드러내었다.
처음에는 다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꿈벅거릴 뿐이었다.
“대륙은 교단과 연합 두 개로 나뉘어 서로 치고박느라 그 어느 때보다 약해져 있다. 이런 기회를 놓친다고? 그것만큼 멍청한 선택이 어디 있지? 마왕조차 이루지 못한 업적을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인데.”
“자, 잠깐. 당신, 설마?”
히죽 웃은 그의 모습에 드디어 다른 이들도 심상치 않은 이변을 감지하고 크게 술렁거렸다. 그런 모습을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은 바알은 목에 걸고 있던 마정을 들어 보였다.
“마계에 새로운 마왕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를 올바른 길로 이끌 진정한 지배자가.”
그러고선 폭탄 발언을 쏟아 내었다.
마계 영주들은 마왕에게 원한을 품고 마왕을 배신해 그 지배의 굴레에서 가까스로 해방된 이들. 그런 이들에게 마왕의 존재란 언급만 해도 발작을 일으킬 만한 금기 그 자체.
“당신 지금 제정신이오!?”
“이럴 줄 알았어. 이래서 귀족 출신은!”
당연히 마계 영주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들의 힘을 끌어올리며 강력히 반발했다. 그들에겐 바로 이것이 외부의 적이 어떻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일이었다.
주체가 바알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마왕이라는 존재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섭리를 거스를 순 없다! 이 마계에는 마왕이 필요해.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끼리 조각조각 찢어진 상태로 아웅다웅하며 살다 교단이든 흑철충이든 더 큰 적들에게 먹혀 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바알 역시 단호했다. 그는 힘을 끌어올린 마계 영주들을 보며 지지 않고 일갈했다.
“아, 아가레스!”
“네놈들……!”
그리고 그 순간 마계 영주들을 이탈해 바알의 편에 붙은 이들이 등장했다. 마계 영주들은 배신자들의 등장을 이해할 수가 없어 단체로 스턴 상태에 빠졌다.
“우리는 과거 마왕을 죽이고 그 권능을 72조각 내어 각자 품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그 72명 중 12명이 흑철충에게 당해 죽어 없어진 상태. 덕분에 조각난 마왕의 권능을 되돌리는 데는 남은 권능의 1/4, 즉 15조각이면 충분하다.”
입꼬리를 비튼 바알이 손에 든 마정을 들어 올렸다.
다른 마계 영주들이 전쟁과 전리품에 공을 들이고 있을 때. 유독 조용히 있었던 바알이 바로 직전까지 온 신경을 쏟은 것은 바로 자신과 뜻을 함께할 동지들을 만드는 일이었다.
사실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루시의 마왕군이 몇몇 마계 영주들을 더 살해한 덕분에 엉겁결에 조건이 달성되었다.
“안 돼! 막아라!”
“마, 마왕이 부활한다!”
사색이 된 마계 영주들이 바알과 그 파벌을 죽이기 위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러나 바알이 마정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더 빨랐다.
‘마왕은 존재해야만 한다.’
강인한 마계 영주들도 버틸 수 없는 강렬한 폭풍이 터져 나와 사방을 휩쓸었다.
그 마력 폭풍의 중심에 서 있는 마족 하나가, 눈을 번득이며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 * *
“마계에서 이변이?”
[그렇습니다. 다만 확실하게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무언가를 감지했을 뿐입니다.]
마계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루시가 대륙 반대편에서 불어온 옅은 마력파를 감지한 것은, 바알이 자신의 계획을 성공시키고 결국은 마왕으로 각성한 지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
“뭘 감지한 건데?”
[이것은 지금의 저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데이터에서 기반한 것입니다.]
창현의 질문에 루시는 방금 자신이 느낀 것이 지금은 거의 발현하지 않고 있는 옛 데이터에 기반한 것임을 보고했다.
“근본적인 데이터. 네가 새로운 마왕이 되었을 때의 데이터?”
[그렇습니다.]
루시가 말하는 데이터는 맨 처음, 평범한 인공지능이었던 루시가 선택되어 이곳으로 불려오며 주입된 데이터들.
그 데이터의 대다수가 마왕과 관련된 데이터였다.
배신자들을 척살하고 마계를 평정하며, 더 나아가 세상을 정복하고자 하는 욕망과 의지. 그것은 곧 마왕의 사명과 본능이었다.
무수한 데이터를 추가로 쌓아오며 잠시 억누르고 있던 그 데이터가 갑자기 수면 위로 끌어 올려진 것이다.
[이유 없이 이런 반응이 발현될 리가 없으니, 이변이 생긴 것이라 계산됩니다].
그리고 그 본능에는 또 다른 마왕에 대한 무차별적인 적의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하늘 아래 정점이 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뿐. 마왕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도전자를 제거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네가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곳은 라비즈다인데.”
[그곳에도 마침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직전에 도시 하나를 습격해 제대로 도발을 날린 일을 언급하며 걱정했지만, 루시는 금방 계산을 끝냈다.
최근 도시를 습격하여 얻은 정보에 의하면 우주 세력으로 보이는 그들의 뒷배가 상당히 강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해서 공격을 몰아치면 공격당한 카르투스 사와 다크엘프들, 혹은 더 강력한 그 뒷배가 제대로 된 전력을 이끌고 보복할 수 있으니 충분한 전력을 갖추기 전 잠시 몸을 사리고 전력을 감추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하면 양면 전쟁을 피할 수 있다. 그러고서는 남는 시간에 이번에는 마계에 전력을 집중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마계를 정리하고, 대륙을 정리하고, 그 모든 힘을 한곳으로 모아서 새로운 세상마저 정복한다면 아군은 더 성장하고 진화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루시는 계획을 완전히 바꾸어 그동안 최소한의 힘만 투사하던 마계에 더 큰 힘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