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시작일 뿐 (3)
본국은 수많은 행성을 세력권에 두고 있는 거대한 세력이다. 카르투스는 수많은 기업 중 하나일 뿐이지만, 프로젝트에 차질이 간다면 본국 의회에 이 소식이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루시가 도시를 습격하여 사로잡은 카르투스 직원의 증언은 그들의 실체가 얼마나 거대하고 예측 불가능한지 적나라하게 알려 주었다.
정신이 파괴될 정도의 고문에서 거짓을 말할 리가 없다고 판단한 루시는, 그 증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제대로 된 우주 세력은 지금의 루시가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강적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 그들과 전면전을 벌일 수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머, 먼저 공격까지 해 놓고 말인가?”
라온은 마치 다 먹어 버릴 듯 거하게 선공을 걸어놓고서 다시 한발 물러서겠다는 루시의 태도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만 루시는 이런 모순적인 태도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확보한 데이터와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내린 계산에 따르면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루시에게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언제나 가장 높은 확률을 계산한 방법대로만 움직입니다.”
“그럼 이제 어쩔 생각이지? 그들이 복수하러 올 것이 뻔한데.”
“다행히 주요 시설 공격 및 중요 인물 납치를 위해 강습을 시도했을 뿐, 본격적인 전면전에 들어가진 않았으니 기회는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어떻게 인식했는가. 그것뿐이었다.
그들이 만약 루시를 비효율적인 자본 소모를 감당하고서도 당장 제거해야 하는 커다란 악으로 규정했다면 루시도 감당하지 못할 군대가 몰려올 수 있으나, 만약 그들이 루시를 일개 괴물 집단 정도로 인식했다면, 루시는 꼭 필요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흘러가는 경과로 보면 아무래도 후자에 조금 더 무게가 실리는 상황이었다.
“만약 그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계획은?”
“적들의 대응에 어느 정도 당해 주며 그들을 방심시킬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이곳에서 확보한 양분과 병력을 마계에 투입하여 연합군에서 이탈한 마계 영주들을 쓰러트리면 됩니다.”
루시는 자신의 눈앞에 드넓게 펼쳐진 거대한 둥지를 바라보았다. 이제 더 이상 완전히 힘 싸움에서 밀리는 타락 세계수와 감염체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끝없이 펼쳐진 마왕군의 거대한 둥지들.
타락 세계수를 먹어치우고 획득한 능력으로 기상 상태까지 조작 가능해진 마왕군은 대지의 양분은 물론 광역으로 떨어지는 태양 빛을 모조리 양분으로 치환하여 병력을 생산하고 새로운 타입의 병사를 개발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비록 모든 세상을 먹어치운 것이 아니라지만 단순한 면적만 따지면 마계 전체보다도 넓은 둥지. 그리고 그 거대한 둥지에서 생산되는 양분과 병사들.
루시는 이것을 그대로 마계에 투사할 생각이었다.
“마계의 마족들이 이걸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어.”
라온은 헛웃음을 흘렸다. 함께 싸웠던 이들이니, 그 역시 마계 영주들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까.
이미 루시가 감염체들과 무슨 싸움을 벌여 왔는지, 진정한 군단과 군단의 싸움이 무엇인지 본 라온은 마계 영주들이 이길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100%라는 확률은 단 한 번도 도출해 본 적 없습니다. 자그마한 변수 하나로 모든 계산이 어그러지는 것은 다반사입니다.”
다만 루시는 그와는 달리 변수를 고려해 두고 계획을 세웠다.
당장 성공 직전에 발생한 변수로 계획을 틀거나 수정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애초에 지금 여기서 모든 전력을 쏟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이곳도 지켜야 하니까.
“새로운 마왕이 탄생했다고 합니다! 마계 영주 바알이 다른 영주들을 굴복시키고 자신이 마왕이 되었다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루시에게 마계에서 벌어진 이변이 제대로 전해진 것이 바로 그 직후였다.
* * *
“바알은 자신은 다른 마왕과 다르고, 지금은 마계 내부 단속에 집중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내부 단속이라 하면 우리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루시에게 제대로 된 소식이 들린 경위는 연합군에게 선포한 바알의 마계 통일 소식이었다. 유리아가 그것을 듣자 루시도 알게 된 것이다.
루시는 물론 유리아 역시 새로운 마왕이 된 바알이 주장하는 내부 단속이 마계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마왕군을 지칭하는 것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마계로 복귀하십시오, 유리아. 마계를 완전히 정리하고 배신자들을 청소할 차례입니다.]
루시는 당연히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동안 고의로 유지하고 있던 전장의 균형을 깨고 전력을 드러내어 마계 전체를 청소할 타이밍을 지금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가, 가신다고요?”
그녀의 동생 크리스는 당연히 갑작스러운 그녀의 이탈에 당황했지만, 쓰게 웃은 유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나의 의무라 어쩔 수 없어, 크리스.”
“대체 그 은인이라는 존재가 누구입니까. 얼굴 정도는 저도 볼 수 있잖습니까.”
“네가 알기를 원치 않아.”
유리아는 탄식을 흘렸다. 이미 진정한 마왕으로 각성한 루시의 목적은 마계는 물론 이 대륙 전체를 자신이 먹어치우는 것.
훗날 그런 때가 오면 크리스는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의 정체도 그때 알게 될 것이다. 다만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그냥 평범한 남매로 남고 싶었다.
“마계로 가시는 건 아니지요?”
결국 그녀를 막을 수 없었던 크리스는 떠나려는 그녀의 뒷모습에 가까스로 마지막 한 마디를 붙였다.
그 질문에 그녀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 * *
“데이터가 충분하진 않지만, 계산된 승률은 67%입니다.”
“그리 높지 않네?”
“그들이 가진 변수의 다양성이 감염력과 변이력을 제한당한 감염체들보다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
강제적으로 바알의 지배를 받게 된 마계 영주들과, 루시의 마왕군은 자연스럽게 서로 전쟁준비를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루시는 상대인 마계 연합을 직전까지 상대했던 라비즈다의 감염체들보다 높게 평가했다.
비록 그 규모 자체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지만, 그들은 감염체를 상대하던 자신처럼 다양한 종류의 전술이나 마법 등으로 규모를 뛰어넘는 효율을 보여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이었다.
[따라서 전력을 투사하기 전에 그들이 가진 변수를 모두 이끌어 낼 방법이 필요합니다.]
루시는 최대한 효율적인 전투를 위한 전략을 구상했다.
서로가 이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만 봐도 마계 일부, 대수림, 라비즈다까지 모두 가진 루시는 마계가 전부인 상대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 에너지 총량을 그저 들이붓기만 해도 승리는 아마 보장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전쟁을 수행한다면 루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그대로 쪼그라들어, 자신의 비대한 덩치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대로 자멸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가진 힘이 어디까지인지 궁금하다고? 이렇게 하는 게 어때.”
잠자코 루시의 계획을 듣고 있던 그가 이번에도 힌트를 하나 주었다.
본인 역시 멍하니 있다가 불현듯 생각난 그 방법은, 다름 아닌 자신의 주적인 침략종들이 쓰는 방법이었다.
“우리가 게이트나 던전에서 기어 나오는 침략종들을 상대하면서 가장 거슬렸던 것이 뭔지 알아? 바로 애매하게 찔끔찔끔 강해져서 다시 돌아오는 거야. 그게 의도된 것인지 아닌지 어쨌든 그 덕분에 우리가 숨이 붙어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라 죽어 간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아.”
루시가 말하는 변수. 지구의 인류는 처음부터 그 변수 하나만으로 이계의 괴물들과 싸워 왔다.
어떻게든 변수를 만들어 내면서 극복하려 애썼다. 그러나 상대는 그럴 때마다 매번, 그 변수를 기다렸다는 듯 더 강한 전력으로 파훼하고 다른 변수를 요구했다. 변수를 내놓지 않으면 이대로 죽을 것이라며.
[계산 결과 일정 규모 이상의 병력을 거느릴 경우, 진을 치고 있는 상대를 공략하는 데 있어 상당히 효율적인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루시는 그 방법을 꽤 괜찮다고 평가했다. 마계 연합을 지구인들로, 자신을 침략종이라 생각한다면 자신이 가진 압도적인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그것을 기준으로 단계적인 공략 계획을 설계하였습니다.]
‘이게 맞나?’
루시는 곧바로 1차적인 결론을 내어 그에게 보여 주었다. 얼결에 루시에게 침략종들의 수법을 주입해 버린 그는 당황했지만 그 효율만 입증된다면 그것이 적이 쓰던 방법이든 뭐든 가리지 않는 루시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동안 간접적으로 수집한 침략종들의 데이터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으음.”
심지어 루시는 침략종들의 방법까지 모방하려 했다.
예를 들면 첫 번째 ‘웨이브’는 초거대종과 초거대 비행종은 물론 감마 이상의 타입도 전부 제외한 순수한 일반종 병력만으로 공격해 적들이 가진 수를 꺼내놓게 만들겠다는 것.
물론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일반종들이 마력을 동원한 적들의 강력한 힘에 한 번에 쓸려나가고 몰살당하는 데이터는 이미 충분히 겪어봤으니 괜히 강심을 만들고 더 강한 상위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루시의 마왕군이 기껏해야 마계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과거와 지금은 엄연히 다르다. 그동안 루시가 비축한 모든 양분을 동원하여 제대로 된 병력을 구성한다면 마계 연합은 생전 본 적 없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물결을 마주하게 될 테니까.
[그들을 한계 직전까지 몰아붙여야 이 작전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이 견디지 못하고 대응 방법을 생각해 낸다면, 일반종 웨이브 다음으로 강심을 장착한 감마 타입을 추가하거나 마도 병기를 투입하는 등 서서히 그 강도를 올려 나갈 것입니다.]
루시는 이미 서서히 올려 나갈 그 단계들마저 구성했다.
이렇게 적의 전력을 측정하고 그 한계치를 아슬하게 넘는 방식으로 필요한 전략을 구성한다면 에너지를 극한으로 아낄 수 있다.
“방심하지는 마. 위기에 몰리면 정말 무슨 수든 쓸 테니까.”
루시의 결단에 괜히 긴장한 그는 침략종에 맞서 고뇌하고 고생하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조심해야 할 점들을 루시에게 말해 주었다.
루시는 그것을 새겨들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적’들이 할법한 생각을 대신 해 주는 것이니 도움이 안 될 리가 없다.
[그들이 제대로 된 체계를 갖추기 전 먼저 공격을 시도하겠습니다.]
게다가 계획이 정해졌다면 굳이 망설일 이유가 없다.
자신이 군체의 모든 것을 총괄하며 그 덕분에 엄청난 속도로 집단을 움직이고 판단할 수 있다는 하이브마인드의 장점을 극대화한 루시는, 상대방이 아직 제대로 된 체계도 잡지 못한 때에 먼저 공격을 시도했다.
막혀도 상관없는 가벼운 공격이었다. 어차피 이 뒤로 이어질 추가타가 계속해서 준비될 테니까.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루시가 가진 방법 이상의 변수를 준비해서 매번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유일하고 확실한 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