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시작일 뿐 (4)
“빨리 움직여라!”
“괴물 놈들에게서 우리의 땅을 되찾을 때다. 제기랄.”
마계 중부 지역. 바알의 지시로 이곳에 차출된 마계의 병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휘관들은 병사들을 지휘하면서 불편한 티를 팍팍 냈다. 하지만 할 수 있은 없었다. 마왕의 지배력은 그만큼 마족들에겐 절대적. 오히려 더 강한 지배력으로 그들의 생각마저 지배하려 하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일 지경이었다.
“북부 출신 놈들이야 복수할 수 있다고, 차라리 낫다고 두 손 들고 환영하지만 이게 맞나 싶군. 우리가 왜 마왕을 몰아내었던가. 그 독재를 타파하기 위함 아니었나. 바알은 자기 입으로 자신은 전대 마왕들과 다를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걸 믿을 수 있나?”
“못 믿지. 믿을 수 있었다면, 지금 이렇게 일 처리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거친 비늘을 가진 트롤과 안광을 번득이는 해골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마계 영주 벨리알과 이포스가 자신들이 이끌고 온 병력들이 집결하는 모습을 보며 탄식했다.
사실 모든 마족들이 이 전쟁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고향을 되찾고 복수한다는 일념으로 최전선에서 루시의 마왕군과 싸우고 있던 북부 출신 마족들은 오히려 바알의 결단을 환영하고 지지했으니까.
이미 자신들을 대변할 마계 영주를 잃어버린 그들 입장에서는, 이리저리 이용당하며 소모품으로 쓰일 바에는 차라리 바알의 밑으로 들어가는 게 낫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알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 그들을 품어 주고 다른 마계 영주들을 차출해서 그들을 도와 북진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도……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일이 실현되기는 했군. 마왕을 제거한 이후 우리가 이렇게 하나로 뭉칠 수 있을지는 몰랐는데.”
벨리알이 그 광경을 보고 중얼거렸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척 굴다가 막후에서 움직이며 끝내 마왕의 권능을 다시 되살린 바알의 행동에 불만이 가득하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다시 하나로 뭉치게 된 마계의 힘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대전쟁 직후 초토화되었던 마계는 지난 세월 각 영주들의 경쟁에 가까운 통치로 빠르게 복구되었고, 오히려 과거 이상으로 발달한 면이 있게 되었으니까.
그것에 쓰인 힘은 단순히 마계의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연합에 합류해 전쟁을 치르며 마계 외부에서 끌어온 무수한 전리품들이 곧 마계 전체를 강화하는 일종의 재료가 되었다.
지금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다양한 종족과 일족의 대군세가 그 결실이다. 굳이 세어 보지 않아도 족히 수십만은 되어 보이는 대규모 병력.
심지어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지금 오고 있는 다른 영주들까지 전선에 합류하면, 마계 역사에 없었을 어마어마한 규모의 군대가 일제히 북진하며 감히 이 마계의 땅을 차지하고 있는 괴물들을 학살할 것이다.
“이건?!”
“놈들이 먼저 몰려옵니다! 흑철충들이!”
하지만 루시가 한 발 더 빨랐다. 이미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루시는 그저 비축하고 있던 힘을 풀어내면 그만이었으니까.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는 대군세가 지축을 울리고 하늘을 빼곡하게 가르며, 집결 중인 마계 연합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마왕님! 노, 놈들이 너무 많습니다!”
당연히 이 보고는 바알에게도 들어갔다.
수정구에 가득 비치는 것은 마치 검은 물결과도 같았다.
조금의 빈틈도 없이 그 끝도 없이 몰려오는 검은 물결. 숫자를 헤아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냥 당장 눈에 보이는 개체가 수백만 단위를 넘는 것 같았다.
“영주들을 재촉해라. 중부 전선에 만들어 놓은 요새들이 넘어가면 놈들을 상대로 버틸 수 없다.”
‘비축한 힘이 있겠지. 저것을 소모시켜야 우리에게 공격의 기회가 넘어온다. 하지만 어째서 그 거대한 괴물들은 보이지 않지?’
바알은 아직까진 예상 범주 내라는 듯 침착하게 지시를 내렸다. 의심스러운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상대가 먼저 쳐들어오는 이상 일단은 막는 게 우선이었다.
‘이게 네놈들의 선택인가?’
그는 마왕군의 범상치 않은 숫자에 혀를 찼다. 어딜 보아도 마왕군이 보일 정도로 많다. 질려 버릴 정도로 많은 그 숫자가 상대가 택한 전술이라고 이해한 바알은, 이것을 이겨 낸다면 자신들에게 차례가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버티는 게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그래서야 아군의 피해도 크지. 그렇지 않나, 제파르?”
“그렇습니다, 마왕이시여. 이대로 가다간 승리해도 북진할 수 없을 겁니다.”
“잊힌 고대의 주문을 깨워야 할 것 같군. 언제까지 저 벌레들의 소모전에 당해 줄 순 없으니까.”
바알은 자신이 마왕이 되는 데 크게 도움을 준, 자신의 심복이자 같은 남부 지역 마계 영주인 제파르를 히죽 웃으며 돌아보았다.
소의 머리를 달고 있는 미노타우로스 제파르는 고대의 주문이라는 말에 살짝 당황했다.
바알도 바보는 아니었다. 이대로 가면 뻔해질 전장의 판도를 뒤흔들 변수를 꺼내어 이 위기를 극복할 생각이었다.
문제는 루시는 이미 그들이 이런 변수를 꺼내 들 것을 계산하고 준비했다는 것. 그들이 루시를 이기기 위해선 그 변수를 계속해서 꺼내 들어야 했다.
* * *
“노, 놈들이 너무 많아…….”
“캬아악! 그냥 숫자만 많은 괴물들일 뿐이다!”
마왕군과의 사투를 반복하며 우후죽순 만들어진 중부 지역의 요새와 장벽들. 마계 연합군은 지금까지 그래 왔듯 그곳에서 농성하며 끝도 없이 몰려드는 마왕군을 상대로 맞서 싸웠다.
마치 감염체들을 상대하듯 끝도 없이 밀어 넣는 무수한 병사들.
분명 마계 연합에 라비즈다 대부분을 멸망으로 몰고 간 감염체들 같은 대응 능력은 없었다.
“이놈들은 별거 아니다. 마력을 쓰지 못하니까. 덩치만 크고 사납게 생긴 짐승들에 불과하다. 이까짓 짐승들이 무서워 물러설 생각이냐!”
트롤 하나가 마력을 머금은 철퇴를 연달아 휘둘러 성벽을 이어 오르던 거대한 거미의 다리를 부수고 얼굴을 으깨어 떨어트렸다.
비록 감염체들 같은 무수한 숫자와 과격함은 없지만 다양한 마족들이 연합한 그들에게는 각자의 역할에 맞는 힘이 있었다.
모든 개체들이 타고난다는 마력. 그리고 그 마력을 이용한 전투법 등등.
마력을 머금고 강한 힘으로 휘둘러지는 강공에는, 그것을 막아 낼 수 있는 강심을 달지 않은 마왕군 일반종들은 한 번에 다수가 휩쓸리기 십상이었다.
“감히 어딜.”
그리고 그런 마족들 중에서도 특출나게 강한 마계 영주들. 대전쟁 시절부터 성장의 권능을 이용해 착실히 힘을 키워 온 그들은, 다른 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힘으로 넓은 면적의 마왕군을 한 번에 날려 버렸다.
‘하지만 놈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다. 쉴 틈은 있어야 하는데.’
불러낸 거대한 화염 폭풍으로 족히 수백은 되는 마왕군을 날려 버린 마계 영주 벨리알은, 침음하며 자기 동료들의 시체를 짓밟고 조금의 감속 없이 몰려오는 마왕군을 보고 움찔했다.
분명 싸움에서 그들이 크게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바알이 마왕이 되면서 억지로 뭉치긴 했지만 어쨌든 다양한 일족과 종족의 마족들이 뭉쳐서 만들어 내는 대전쟁 시절의 마왕군처럼 그 시너지가 상당했다.
마계 연합이 하나 죽을 때 마도 공격에 전혀 저항할 수 없는 일반종만 투입한 마왕군은 두 자릿수로 죽어 나간다.
그런데 그럼에도 전장은 치열하다 못해 힘겨웠다. 그만큼 마왕군이 너무 많았다.
[진행률 14%, 교환비는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진 둥지에서 어마어마한 일반종 병사들을 뽑아내고 있는 루시는, 이 교환을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어차피 그 시체만 회수해도 투자한 양분의 상당수를 재활용 가능한 일반종은 소모품일 뿐이다. 얼마든지 생산해서 얼마든지 채워 넣을 수 있다.
[변수가 없다면 이대로 전쟁은 끝납니다.]
루시의 목적은 단 하나. 더 강한 힘을 투입하기 전에 마계 영주들이 가지고 있는 손패를 하나씩 털어 내는 것.
“이럴 수가. 메테오!”
그리고 그 변수가 얼마 지나지 않아 터졌다.
루시의 명령으로 마계에 복귀하여 출격할 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유리아는 저 먼 하늘을 가로지르며 전장을 향해 낙하하는 거대한 유성을 보고 기겁했다.
* * *
“설마 이게 가능하다니. 이런 게 있었다면 대체 왜 전대 마왕들은 쓰지 않았단 말입니까? 이것만 있었어도 대륙은 이미 옛적에 마계의 손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몰랐을 리가 있는가. 내가 이것에 대해 들은 것도 전대 마왕에게서였다. 그러니 쓰지 않은 게 아니라 못 쓴 것이겠지. 힘이 부족하니까. 그것은 곧 지금의 우리는 마왕을 쓰러트렸던 그 순간보다도 더 강력하다는 걸 반증한다.”
자기 계산대로 업적을 하나 이루게 된 바알은 수하들을 데리고 하늘을 보았다.
하늘을 가로지르며 전장을 향해 떨어지는 유성은, 그들이 불러낸 것이다. 과거의 마왕들도 쓰지 못했던 고대의 강력한 주문 중 하나.
마왕을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물론, 그 이후에도 그들은 서로 경쟁하며 힘을 착실히 키워 왔다. 대륙에서 공수한 전리품들도 고스란히 그들의 힘이 되었다.
그 결과 전대 마왕들도 쓰지 못했던 것을 바알과 마계 영주들은 현실로 구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연달아 쓰기는 힘들지만 상관없다. 흑철충들은 절대 감당하지 못할 테니까. 숫자로 밀어 보려 시도한 것이 놈들의 패인이다.’
바알은 불타오르며 지상으로 낙하하는 유성을 보며 히죽 웃었다.
자신이 루시의 계획을 완벽하게 받아쳤다고 확신했다.
실제로, 고대의 주문 메테오는 바글바글하게 몰려오던 마왕군의 머리 위로 정확히 떨어졌다. 조금만 가깝게 떨어졌다면 아군마저 휘말리게 만들었을 충격파와 소음 등이 천지를 뒤흔들고 대기를 울렸다.
“마, 마왕님. 성공입니다. 놈들이 전멸했습니다!”
“전멸은 아니지. 하지만 충분해.”
물결이 되어 몰려오던 마왕군이 km 단위로 짓이겨져 나가고 증발했다.
물론 이 한 번의 일격으로 중부 전선 전체를 두드리고 있는 마왕군이 몰살당한 것은 아니지만, 부족하진 않았다.
그 압도적인 물량 공세에 위기에 몰렸던 전장이 단숨에 뒤집힐 정도였으니까. 이렇게 한쪽이 여유를 찾으면 자연스럽게 다른 쪽도 도울 수 있게 된다.
[변수의 위험도가 예상 이상. 손실률 5%.]
어떤 형식으로든 비장의 수가 있을 것이라고 미리 예상하고 있던 루시 역시, 이 일격과 그 여파를 절대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예상 범주를 뛰어넘어 효율을 깎아 먹은 운석 낙하 공격에 대비가 필요했다.
“쉴 틈은 없다. 힘이 회복되고 주문이 다시 활성화되는 대로 계속해서 놈들을 향해 메테오를 퍼붓는다.”
[2차 웨이브 준비.]
고대의 주문을 발현할 수 있는 석판 앞에 선 바알이 다시금 명령을 내려 2차, 3차 공격을 준비하는 사이, 루시 역시 상대가 꺼내 든 변수에 대해 고민하고 그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계산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