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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157화 (157/200)

157화 시작일 뿐 (7)

“네가 한 번에 밀어 버렸으면 밀렸을 텐데. 보니까 영 힘을 못 쓰고 있는 것 같아.”

[이렇게 아낀 양분은 라비즈다에 사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루시는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물론 내가 보기에도 화면 속에서 벌어지는 다른 세상 이야기일 뿐이긴 하다.

다만 나는 이미 루시의 힘을 몇 번이나 직접 보았고 그것에 전율했다. 특히 최근에 있었던 ‘미지의 던전 공략 사건’때 일부나마 겪은 그 힘은 더더욱.

내 말 한마디에 쏟아져 나온 무수한 군단과 그들을 지휘한 루시의 등장은, 여전히 기억에 선명하다.

당연히 사람들은 한바탕 하고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마왕군에 대해 알지 못했고, 덕분에 수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한 미지의 사건은 여전히 미궁 속에 남아 수많은 추측만 낳고 있을 뿐이었다.

[마계 연합이 새로운 변수를 꺼내지 않는다면 아군의 승리 확률은 56%입니다.]

“설마 그렇게 빨리 무너지진 않겠지.”

나는 집에서 나갈 준비를 하며 답했다. 전대 마왕을 배신한 배신자들. 루시가 반드시 처단하고 싶어 하는 원수들. 그들도 한 세상의 지배자들이다.

최근에는 하나로 뭉쳐 그 힘을 더욱 더 극대화했다. 만약 그들이 조각조각 나뉘어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는 대신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나왔다면, 변방 구석에서 시작한 루시는 이렇게 크지도 못했을 것이다.

“근방에 게이트가 열릴 예정입니다. 거리가 좀 떨어져 있으니 주민분들은 해당 방향으로는 나오지 마시고…….”

집 밖으로 나오니 웅 소리와 함께 휴대폰에 정부 기관에서 보낸 문자가 도착했다. 그리 멀지 않은 인근에서 게이트가 열릴 예정이니 신경 쓰라는 문자였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받았는지, 길가에 있던 사람들 모두 휴대폰을 들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여러모로 바뀐 풍경 중 하나였다. 게이트라는 단어만으로 발작하던 전에 비하면, 사람들은 이제 어지간한 일은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 버렸다.

‘끝이라는 게 있나?’

그런 모습들을 본 내가 작게 탄식했다. 루시가 단계를 나누어 마치 그 전력과 잠재력을 시험하듯 마계 연합을 자극하고 상대하는 모습을 본 나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연 이 끔찍한 재앙들에 끝이라는 게 존재하긴 할까 싶다.

이미 이 재앙들은 그 짧은 시간 만에 평범하게 흘러가던 내 인생을 바꾸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무수한 사람들의 인생도 함께 바꾸었다.

잃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잃었고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무수히 죽어 나갔다.

마계 영주들의 거센 반격에 루시가 주춤하거나 당하는 모습이 보여도 그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듯이 우리의 저항과 투쟁이 어쩌면 그런 부질없는 발버둥이 될까 신경 쓰였다.

‘괜히 추천했나?’

피식 웃은 내가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애초에 루시에게 침략종을 모방할 것을 추천한 건 나다. 루시는 무엇이든 모방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그걸 보고 두려워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 * *

[오늘은 다른 길로 가시는 것 같습니다.]

“맞아. 오늘은 출근 안 해.”

운전대를 잡은 내가 운전을 시작하자 루시가 머지않아 의문을 제기했다.

실제로 나는 지금 늘 다니던 길로 차를 몰지 않았다. 회사로 가는 것도 아니었고 이지연의 집으로 가는 것도 아니었다.

지난 번 사건 이후 우리는 다시 휴가를 받았고, 이지연도 군말 없이 쉬는 중이었으니까.

“볼 일이 있어서.”

그 대신 내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학교였다. 취직하는 순간 급하게 휴학을 하긴 했지만 아직 처리해야 할 것들이 남아서 오늘 방문한 것이다.

“슬슬 2학기 종강할 때 아닌가? 봐, 저기 있는 버스 정류장이 네가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건 곳인데.”

학교 안은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내가 멀쩡하게 학교를 다녔다면 나 역시 그들 사이에 있었겠지.

실제로 내 친구들은 여전히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이제 곧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4학년 2학기에 취직한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니었지만 역시 나는 조금 특별한 경우였다.

[그리워하는 것 같습니다.]

“부정할 수 없지.”

내 감정을 용케 읽어 낸 루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억울하고 무력하게 당할 바에는 차라리 힘을 가지고 그 혼돈 속에 뛰어드는 게 낫다고 여기며 지금까지 활동해 왔지만, 그것은 사실 본심을 숨기기 위한 논리적인 핑계에 불과했다.

역시 나는 이지연 같은 사람과는 근본이 다른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누렸던 과거의 일상이 그립고 미련이 남았다.

어쩌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그것이.

“어, 유명인사 아니야?”

“뭐?”

그런 감정들을 숨겨 놓은 상태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연락이야 하고 있었지만 워낙 많은 일이 있었기에 내가 학교를 관둔 이후 실제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내 얼굴을 보자마자 그가 웃으며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우리 중에 너만큼 성공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당장 다들 취업 걱정에 머리 싸매고 있는데.”

“나도 몰랐던 성공이지.”

아니라고 할 순 없었다. 이지연의 전담 매니저라는 자리는 이지연의 유명세가 커지면 커질수록 덩달아 커졌으니까.

특히 그것이 그녀와 함께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라 더더욱 그랬다.

순전히 그녀의 의지였고 나 역시 팀으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나 혼자 움직이는 게 훨씬 편했지만 아무래도 그 덕에 받는 혜택이 좀 있었다.

“솔직히 말해봐. 이지연 씨랑 인연이 있던 거지?”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겠지. 하도 물어봐서 이제는 그냥 그렇다고 대답하는 편이거든.”

“아니 뭐, 아니면 아닌 거고.”

어느 정도 내려놓은 나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남들이 어떻게 보든 사지를 넘나드는 그녀에겐 조금도 고려할 요소가 아니었고 나도 이제 지쳤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그럴 수 있지 않느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마음속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쪽이 블루오션인 걸 알았으면 나도 그쪽으로 갈걸 그랬나. 근데 막상 다큐나 이런 거 보면 그것도 못할 짓이더라. 헌터들에 비하면 위험할 일은 없겠지만 나는…… 못 볼 것 같아. 사람이 죽고 다치는 것.”

웃음의 종류가 바뀌었다. 나는 내 눈치를 보며 쓰게 웃는 그의 얼굴에 피식 웃었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다. 따지고 보면 수많은 죽음을 보고 부상도 보았다. 그것을 보고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건, 그것들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다른 것에 신경이 팔려 있기 때문.

나는 손에 들린 내 휴대폰을 흘끔거렸다.

세상에 닥친 재앙과는 별개로, 내 인생을 바꾸고 나를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은 바로 루시였다.

“처음에는 힘들어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좀 덜해. 진짜 죽을 수도 있으니까 뭐든 하게 되더라. 너도 몸 조심해라.”

친구는 자신도 전과 많이 달라졌다며 웃었다. 확실히 변하기는 했다. 단순히 시간이 지나서 그런 건 아니었다.

* * *

“처음에는 코웃음 쳤지. 네 몸이나 잘 돌보라고. 그런데 이젠 아닐 것 같아. 네가 좀 많이 도와줘야겠어.”

모든 일을 끝내고 다시 차량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멍하니 주변을 보며 중얼거렸다.

학교 풍경은 내가 다닐 때와 다를 것도 없었다. 학생들은 분주히 수업을 들으러 캠퍼스 내부를 돌아다닐 뿐이다.

괴물이니 재앙이니 해도 아직 희망이 있는데 벌써부터 모든 미래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분명 아무것도 아닌 광경이었지만, 나는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는 이 일상과 풍경을 잃고 싶지 않았다.

저쪽 세상에서 어떤 종류의 전쟁이 벌어지는지, 경쟁에서 밀려 패배하고 도태하는 이들의 말로가 어떤지 너무 많이 보아서 더욱 그렇다.

[제가 존재하는 이유는 처음부터 그것이었습니다.]

루시는 공허한 내 말에 늘 그렇듯 단번에 대답해 주었다.

[무엇이든 명령하신다면 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수행합니다. 그것이 제 의무이자 사명입니다.]

루시는 거짓말을 잘 못한다. 아무리 성장해도 마찬가지였다. 거짓말이라는 것 자체를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믿을 수 있었다.

마치 당연한 것이라는 듯 가볍게 말하지만 나는 루시가 한 번 뱉은 말은 무조건 이룬다는 것을 이미 여러 번 보았다.

“널 믿지 않을 이유가 없지. 널 이용하지 않을 이유도.”

불안하고 경계된 것이 분명 사실이었다. 혹시라도 루시가 통제를 벗어날까 이상한 방향으로 성장할까. 그러나 이쯤 왔으면 그런 걸 걱정할 단계는 지난 것 같았다.

루시는 아무리 성장해도 오직 내 말만을 들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이 자신의 근본인 인공지능의 성질을 따르는 것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루시를 못 믿을 이유도 없다.

“우선은 그쪽 일부터 잘 끝내 봐. 아직 여기는 여유 있으니까. 아니면 네가 계산해 보는 건 어때. 우리가 침략종과의 싸움에서 끝까지 이길 수 있을까?”

[데이터가 부족하여 예측조차 불가능합니다.]

“역시나.”

운전석에 올라 탄 나는 우선 마계 연합과의 전쟁을 끝내라고 지시했다.

이곳은 아직 시간이 있는 게 사실이었다. 이지연을 포함한 뛰어난 각성자들이 직접 핵탄두를 들고 탄두를 설치하고 빠져나오는 미친 작전을 시행해서 함선형 침략종을 상대한 이후.

던전에 나타난 함선형 침략종을 제거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시행되었다고 주워들었다.

비록 그 성과가 뚜렷한 방법은 별로 없었지만, 어쨌든 놈들이 던전에 박혀 있는 이상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마계 연합군이 대군을 이끌고 정면으로 돌격해 오고 있습니다. 선두에 선 마계 영주들만 20개체 이상. 아무래도 그들이 아군의 의도를 꿰뚫어 보고 도박수를 펼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자마자 루시는 급변하기 시작한 전황을 다시 보고해 주었다.

덕분에 차량을 출발시키지 못한 나는 주차장에 차를 세운 상태로, 휴대폰을 들어 루시가 보여 주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예 뚫어 버리고 중앙까지 오겠다는 건가? 어째서지? 저렇게 싸워서야 뒤가 없을 텐데?”

말 그대로 전력을 다한 돌격이었다.

나조차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한 점으로 뭉친 그 힘이 엄청나게 강력해 보이긴 하지만, 그들은 엄연히 저곳에 살아가는 주민들이다. 이미 다른 세상에 본진을 만든 침략자 입장인 루시와는 다르다.

저렇게 스스로를 불태우는 불덩이가 되어 루시를 들이박는다면 설령 루시의 마왕군이 전멸하더라도 그들은 손해일 확률이 높았다.

[아군의 둥지를 점령하거나 타격하려는 의미가 큰 것 같습니다. 둥지를 공격하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어떻게 대응할 건데? 둥지를 지킬 거야? 아니면 포기할 건가?”

[현재 계산 중입니다.]

먼저 공격한 것은 그들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칼자루는 루시가 쥐고 있었다.

내 물음에 루시는 평소처럼 확률을 계산했다. 그리고 그 결과 값에 따라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대응 방법을 결정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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