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시작일 뿐 (8)
결코 적들을 상대로 소모전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바알이 가진 일종의 확신이었다. 처음에야 땅과 하늘을 가득 채우며 몰려오는 대군세를 보고 저것이 루시의 전부라고 확신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조금씩 조금씩 마치 단계를 올려 나가듯, 자신들이 가진 힘을 모두 드러내라는 듯 구는 마왕군의 행동이 모두 의도된 것임을 알아차렸으니까.
‘기회를 주지 않고 총력을 다해야 한다.’
다수의 마계 영주들을 이끌고 본인도 직접 나선 바알은, 시간을 끄는 것 자체가 루시의 의도에 놀아나며 그대로 전쟁에서도 패하는 길임을 알고 도박수를 던진 것이다.
“이번 전투에서 놈들을 전멸시키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적어도 놈들이 정확히 어떤 놈들인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 놈들이 결코 평범한 마수 집단이 아님은 알지 않는가.”
“알려진 바, 놈들의 우두머리는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 흑발의 암컷 아닙니까?”
바알의 말에 측근인 제파르가 루시에 대해 언급했다.
그들이 흑갑충과 전쟁을 벌여 온 지도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다. 당연히 그동안 수집한 정보도 적지 않았고 ,목격자 등을 통해 퍼진 루시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루시가 적들의 우두머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놈들에게는 더 큰 비밀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바알은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순히 루시 하나가 이 모든 병력을 지휘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은 것이다.
마왕이 된 자신보다 더 강력하고 큰 지배력을 행사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바알은 도저히 그 사실을 그대로 믿을 수 없었다.
‘신종 마수나 마족이라기에는 이상한 점이 너무 많다. 마왕의 명령도 듣지 않는 놈들이 마계의 일원일 리가 없으니, 반드시 그 실체를 확인할 것이다.’
사실 바알이 루시의 정체를 제대로 밝히려고 집착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마왕이 되었는데도 흑철충들은 그 명령을 조금도 듣지 않았으니까.
마계의 생물이라면 마왕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이 일종의 법칙. 지능이 낮은 마수들이야 그렇다 쳐도, 흑철충들이 일개 마수 집단이 아님은 이미 알려진 지 오래다.
때문에 내심 그 마음속에, 자신이 다시금 마왕을 부활시켜 직접 마왕이 되면 그들이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흑철충들은 그런 마왕의 지배력에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았다. 바알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는 감히 마계에서 자신을 거스를 수 있는 유일한 적들을 나서서 확인해야만 했다.
루시의 정체가 비록 불완전하긴 하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마왕의 의지를 이어받은 존재라는 것을 몰라서 할 수 있는 착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계속해서 루시를 의식하는 것은 분명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같은 마왕이라는 존재에 대한 본능적인 적의도 있었다.
“놈들이 오고 있습니다! 역시 자기들 본진으로 들어올 때까지 가만히 둘 생각은 없는 모양입니다.”
머지않아 그들은 방어선을 두들기지 않고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해 사방에서 모여드는 루시의 마왕군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 * *
[적장인 바알을 비롯한 마계 영주 42인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마왕을 처단하면 전쟁은 그것으로 종료. 그러니 변수를 경계해서 힘을 아낄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마계에서의 지겨운 싸움도 끝이 보이는 건가.”
그들이 대놓고 쳐들어오는 것을 당연히 루시도 다 지켜보고 있었다. 곧바로 공격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가진 힘이 가벼운 마음으로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하기 때문.
만약 지금처럼 고의로 절제하고 있는 병력을 파견한다면 몇 배로 많은 병력을 보내도 극심하게 비효율적인 전투를 수행하고 그대로 손해를 입을 것이다.
[상위종들에 더해 초거대종 같은 대형 병기들도 투입하겠습니다.]
그들의 힘을 가늠한 루시는 마왕 바알의 지휘하에 지금과는 다른 결단력과 단결력을 보여 주는 그들을 인정하고 자신 역시 몇 배 이상으로 투입할 수 있는 힘을 늘렸다.
“처음부터 저렇게 나왔으면 진짜 힘들었을 것 같은데.”
그는 루시가 보고해 주는 내용을 듣고 헛웃음을 흘렸다. 마왕 바알이 지배력을 사용해 강제로 힘을 모으게 만든 마계의 힘은 과연 강했다. 루시에 의해 그 일부가 소실된 상태로도 자기들끼리 견제하고 미적지근하던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만약 루시가 새로운 세상에 자신의 거대한 둥지를 만들지 못했다면, 지금 정말 뒷생각 없이 사력을 다해 싸워야 했을 만큼.
[일어나지 않은 가능성은 유지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루시는 이미 지나가 버린 가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적들이 아군과 조우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서로를 향해 다가가던 두 마왕군이 대면하게 되었다. 루시는 병사들의 눈을 통해 보이는, 족히 수십만은 되어 보이는 마계의 군대를 바라보았다.
대륙에서 영웅이라 불리던 이들과 맞먹는 힘을 지닌 마계 영주들만 수십에, 그에 필적하는 수하들도 엄청나게 많다. 말 그대로 마계 전체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군단이었다.
[그러니 저들을 분쇄할 수 있다면 이 전쟁은 아군의 승리로 끝날 것입니다.]
“정면으로 싸워서 이긴다면 말이지. 그러면…… 정말 굳이 정면으로 싸워야 하나?”
창현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루시가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전부 지켜본 입장에서 일종의 패턴이 보였기 때문이다.
루시는 전투를 이기기 위해 싸우지 않는다. 오직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효율적인 방법만을 찾는다. 특히 결연하고 필사적인 각오를 다지고 모든 것을 건 정면 대결을 걸어오는 상대를 무시하고 그 후방을 교란하며 능욕하는 건 루시의 특기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저들의 모든 생산 기반과 생활 기반이 텅텅 비어서 방치되어 있어. 그곳들을 습격해서 파괴할 수 있다면.”
[합리적인 전술입니다. 다만 현재 아군의 전력상, 뒤로 돌릴 수 있는 특공대의 병력 수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루시는 당연히 이 정면 대결에 모든 것을 걸지 않았다.
정면 대결에서 패할 경우에는 든든한 보험이자, 승리할 경우에는 상대의 저항 의지에 최후의 비수를 꽃을 별동대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으니까.
[아일랜드·알파 5기와 그것을 호위할 아일랜드·베타 15기. 그리고 탑승한 일반종 병력 1500기와 상위종 50기가 이번에 동원한 병력입니다.]
루시는 그에게 전환시킨 화면을 보여주었다. 뿌옇고 흐린 먹구름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는 거대한 초거대 비행종들이 소리 없이 날고 있었다.
라비즈다의 거대한 둥지들에서 만들어져 대수림으로 나오게 된 그것들이 향하는 곳은 당연히 마계. 지금 대산맥 앞을 지키고 있는 장벽을 넘는 중이었다.
저것들이 루시가 이번 작전에 동원할 병력들이다. 분명 마계에 필적하는 거대한 영토를 거의 대부분 먹어치운 것에 비하면 적은 병력이었다.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는 라비즈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발생할 변수들을 통제하기 위해 전력을 아껴야만 했습니다]
“맞아. 사실 따지고 보면 거기가 더 중요하긴 하지.”
마계의 변방과 비교해도 몇 배 이상은 더 큰 둥지가 바로 새롭게 점령한 라비즈다의 둥지. 냉정히 생각해서 루시에게 더 중요한 곳도 이제는 그곳으로 바뀌었다.
[아군의 우회 기동을 모르고 있는 그들이 뒤쪽을 신경 쓸 수 없도록 앞쪽을 몰아쳐야 합니다.]
물론 루시가 내린 이 모든 판단은 계산 결과 이길 수 있다고 결과를 도출했기에 가능한 것.
척박하고 드넓은 마계의 황무지에서 두 군단이 서로를 마주했다.
루시는 그들에게 쉴 틈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시간이 끌리면 끌릴수록 생산력과 회전율이 빠른 자신의 이득이었으며, 이미 지금 이 순간부터 상대의 후방은 교란당하고 있으니까.
괜히 바알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소모전을 피하려던 게 아니었다.
“변수는 없는 건가?”
[현재 예상하는 변수는 지금까지 그 데이터가 없었던 마계 영주들의 집단 행동입니다.]
루시가 가장 경계하는 변수는 마침내 그 힘을 하나로 모은 마계 영주들의 힘이었다. 한때 마왕마저 떨어뜨린 그 힘.
북부를 점령하며 그 편린을 맛보기는 했지만, 그래 봤자 몇 명 수준에 그들도 루시의 이간질까지 당하며 제대로 뭉치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비록 모두가 모인 것은 아니지만 그 숫자도, 준비 상태도, 마음가짐도 비교할 수 없었다.
[따라서 우선은, 그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제 1타 진군.]
루시는 망설임 없이 병력들을 돌진시켰다. 효율을 추구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승리. 수많은 병사들을 희생시켜도 이번에 승리하기만 하면 고작해야 일반종 병사 수십만 정도는 잃어도 상관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번 공격으로 이길 수 있는 확률은 어느 정도인데?”
[그들이 이렇다 할 변수를 보여주지 않는 한 25%입니다.]
애초에 이번 한 번의 공격으로 이 세상의 지배자인 적들의 주력을 꺾고 단번에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적들이 대응합니다.]
그리고 그 예상이 들어맞았다. 총력전을 각오하고 몰려온 마계 연합은, 자신들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드는 거대한 군세에 겁먹거나 두려워하지도 않고 곧바로 대응을 시작했으니까.
[적들의 첫 번째 대응은 고대의 주문 메테오. 하지만 한두 발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타오르는 불덩이 세 개가 그 꼬리를 늘어뜨리며 엄청난 속도로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마왕군에게 이미 파훼당한 지 오래인 메테오 공격.
루시는 미리 준비시켜 두었던 대공포를 준비해 하늘을 겨누고 그 힘을 한 점에 모아 쏘아 냈다.
회피 기동을 한다거나 위력을 더 올리는 것은 불가능한 메테오들은, 무수한 요격에 당해 그대로 허공에서 가루가 되었다.
“과연 방심하지는 않는구나. 전부 무기를 들어라!”
물론 메테오는 일종의 인사나 마찬가지였다. 루시의 마왕군이 어렵지 않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고 입꼬리를 비튼 바알이 자신은 물론 모두에게 전투를 준비하라 명령을 내렸다.
“마, 마왕님!”
“마왕이 명한다. 물러서지도 말고, 힘을 아끼지도 말라. 우리의 힘을 놈들이 측정하지 못할 만큼 한 번에 뿜어내어 그대로 분쇄한다.”
그리고 가슴에 박힌 마정을 반짝인 바알은 마왕의 권능을 이용해 절대적인 명령을 내렸다.
일개 병사들은 물론 마계 영주들까지 전력을 다해 싸우라는 명령이었다.
[에너지의 총량이…….]
그게 전부였다. 자신들이 가진 무의식의 잠재력까지 강제로 끄집어내는 것이 마왕의 지배력. 거부할 권리는 없다. 그러나 그 위력은 분명하다.
루시는 그동안 쌓아 온 데이터를 바탕으로 만든 자신의 계산식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치솟는 적들의 힘에 살짝 당황했다.
설마 이런 식으로 각성하는 게 가능할지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