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시작일 뿐 (10)
“교단이 그렇게 급하게 움직였다고?”
[그렇습니다. 그들 역시 이번을 마지막 기회로 인식한 듯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살짝 놀랐다. 지금의 교단 세력은 우리와도 연관이 있으니까. 루시의 말을 듣고 나름 소식을 찾아봤지만, 과연 리암을 비롯한 북미 지역의 몇몇 각성자들이 이미 모습을 감춘 지 시간이 좀 지난 이후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평소처럼 육체적, 정신적 휴식기를 가진다고 예상했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오히려 더 싸우기 위해 사라진 것이다.
그들 역시 저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진심이니까. 그들에게는 저곳이 곧 희망이었다.
“……그런데 지금 당장 대륙에 신경 쓸 순 없지 않나? 마계와의 힘겨루기가 한창인데.”
[그것도 사실입니다.]
나는 살짝 걱정된다는 말투로 물었지만, 루시는 당연하게도 담담했다.
[하지만 마계에서의 전투, 계산 결과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성향상 이번에는 결코 물러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번 전투로 사실상 마계 전체에 대한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루시는 마계에서 격렬하게 싸우는 중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명운을 걸고 벌이는 진정한 전쟁.
듣기로 마왕이라는 존재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존재다. 마왕은 마계의 정점이어야 하니까.
그러니 저 대전쟁에서 승리한 자가 마침내 진정한 마왕이 되고 마계의 주인이 된다. 루시에게는 자신을 저쪽 세상으로 불러들인 이들이 남긴 사명을 완수하며 말 그대로 진정한 자유를 찾게 되는 일이기도 했다.
“큭, 어떻게 이럴 수가!”
루시는 화면을 돌려 내게 그곳을 보여 주었다. 자신이 마왕 바알을 비롯한 마계 영주들과 치열하게 싸우는 그 모습을.
뿔을 달고 있는 마족, 바알은 피를 뚝뚝 흘리며 소리치는 중이었다.
다른 마계 영주들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서로가 끝장을 볼 각오로 끌어올린 강력한 힘과 힘이 충돌해 만들어 내는 거대한 충격에 휘말려 부상을 입은 그들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저기 부러지고 짓이겨져 체액을 흘리고 있는 루시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고작 이 정도로 두려워합니까? 한때는 목숨을 걸고 마왕도 잡았던 이들이, 이제는 싸울 때 자신의 목숨을 걱정하여 망설입니까?”
화면 속 루시는 자신의 부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그들을 비웃었다.
한때 마왕을 잡는다는 목적 하나로 사투를 벌였던 영웅들은 이제 필사의 정신은 모두 까먹어 버린 지 오래.
레벨과 가진 힘은 과거보다 더 성장했다 해도, 막상 그것을 온전히 끌어낼 정신은 전보다 못했다.
“다, 닥쳐라! 다들 뭘 하는가! 저년도 부상을 입었다!”
찔렸는지 바알은 소리치며 자기 주변 마계 영주들을 다그쳤다. 마왕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그들은 싫은 티를 팍팍 냈지만 그 몸은 저절로 움직여, 루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나, 둘 던져 주고서라도 루시를 잡겠다는 건가?’
그들의 의도는 나조차 읽어 낼 정도로 뻔했다.
루시가 자신의 의도대로 서로 충돌하는 힘의 증폭을 이용해 자폭에 가까운 공격으로 모두에게 타격을 줬으니,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루시를 잡겠다는 것이다.
차라리 차례대로 덤벼들며 루시의 힘을 빼는 식으로 움직였다면 그들은 손실 없이 이겼을 수도 있지만,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고 처음부터 큰 힘을 끌어 썼다가 제대로 역풍을 맞은 셈이다.
“크아악! 죽어라!”
마왕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던 마계 영주들은 부상 당한 몸으로 루시에게 덤벼들어야 했다.
검은 깃털을 가진 하피가 마력이 타오르는 발톱을 휘두르고, 보라색 피부의 오크가 큼직한 도끼를 내지르는 등.
그러나 루시는 피하지 않고 그 공격을 받아치며 그들이 몸에 상처를 늘려 갔다. 물론 그 과정에서 본인의 몸 역시 점차 무너져 내렸다.
“어리석은, 정말 혼자서 이길 수 있다 생각한 것인가.”
바알은 그 모습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게 뻔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런 광경을 몇 번 봤다. 루시가 괜히 자신의 진정한 정체에 대해서 꽁꽁 숨기고 있던 게 아니니까.
그리고 오늘, 어쩌면 루시는 그들에게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공개하게 될지도 몰랐다.
* * *
“가프! 포라스! 마무리 지어라!”
바알은 자신의 힘을 회복하고 부상을 치료하며 루시를 궁지로 몰아넣은 마계 영주들에게 마무리 지을 것을 명령했다.
그가 보기에 루시의 상태는 이미 한계였다. 마계 영주들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여기서 몇 명 잃는다 해도 이득이라 판단한 것이다.
“큭, 으아아!”
“이런 젠장할!”
실제로 그의 예상대로 진행되었다. 마왕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던 마계 영주들은 부상 입은 몸으로 루시를 향해 돌진하며 마지막 힘을 짜내 공격을 날렸고, 그것은 루시의 몸에 정확히 적중했다.
단단한 갑각이 완전히 박살 나고 체액을 뿌리며 한쪽 팔이나 다리, 내장 기관 등 신체 조각들이 흩날리고 짓이겨진다.
“아아악!”
“포라스!”
하지만 루시가 날린 공격도 그들의 몸에 적중했다. 롱기누스가 휘둘러지고 에너지를 뿜어내며, 마계 영주 몇몇이 단숨에 반으로 갈라지고 몸에 구멍이 뚫리며 밑으로 추락했다.
대전쟁에서 승리하고 지금까지 마계의 지배자로 군림했던 이들의 허망한 죽음. 그 모습을 본 바알이 이를 악물었다.
‘희생이다. 대를 위한 희생!’
대륙을 정복한다는 마왕의 숙원이자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희생이라 생각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벌레답게 생명력 하나는 질기구나. 하지만 이걸로 끝이다. 우두머리를 잃은 벌레 집단은 곧 우후죽순 흩어져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바알은 몸 대부분이 망가져 얼굴만 겨우 남은 루시를 보고 저주하듯 내뱉었다. 그러나 루시는 분명 숨이 끊기기 직전인데도 태연했다.
그 태연함에 바알은 자기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당신들은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웠습니다.”
“무, 무슨.”
어느새 부상 입은 그들에게 다가온 상위종 오크·델타 하나가 망가진 루시의 몸을 안아 들었다.
곧바로 마법을 쏘아 내 숨통을 끊을 작정이었던 바알은, 뭔지 모를 기묘함을 느끼고 순간 망설였다.
“주변을 보십시오. 이 전쟁의 승자가 누구인지.”
“그게 무슨 헛소리냐.”
“한때 작은 미궁의 미물에 불과했던 나를 여기까지 성장시킨 것에 당신들의 멍청한 행동들도 큰 공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오크·델타의 품에 안긴 루시는 피식 웃으며 주변을 보라 말했다.
자신도 모르게 전장을 내려다본 바알의 눈이 흔들렸다. 치열하긴 하지만 분명 자신들이 이기고 있다. 전장을 뒤집어 버릴 초거대종까지 등판한 전장이지만, 자신들도 뼈와 살을 갈아 넣어 가며 그 의지를, 마왕의 아래 하나로 집결한 마왕군의 힘을 보여 주는 중이었다.
“분명 이 세상의 지배종다운 강한 힘과 막대한 자원들을 손에 넣었지만 당신들은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며 그것들을 땅에 내 버렸습니다. 나는 그것들을 먹고 여기까지 자라났으니 아군의 기반에 당신들, 마족들의 데이터가 큰 역할을 차지함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헛소리 마라. 너희들은 여기까지다. 이 땅은, 이 마계는, 마왕이라는 정점의 것이란 말이다!”
바알이 평정을 잃고 소리쳤다.
그러나 마계는 마왕의 것이라는 그 말에 루시는 오히려 웃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마계는 마왕의 것. 하지만 당신의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마왕, 루시의 것입니다.”
“네년…….”
두 팔로 루시를 안고 있던 오크·델타가 한 쌍 더 달린 팔을 이용해 자신의 투구를 잡았다. 그리고 그 투구를 벗자 드러난 것은 찰랑이는 흑발과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
바알을 포함한 마계 영주들 모두가 굳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새롭게 등장한 루시는 품에서 가동을 멈춘 자신의 원래 몸에 손을 찔러 넣더니, 박혀 있던 강심을 회수해 자신의 몸으로 흡수했다.
그리고 남은 시체는 망설임 없이 바닥에 내 버렸다.
“싸움은 끝나지 않습니다. 누가 진정한 마왕인지 가려야 하기에.”
“닥, 닥쳐. 닥쳐라…… 닥쳐!”
바알은 마왕이라는 단어에 격분했다. 마왕의 상징인 마정을 가진 자신만이 온전한 마왕일 수 있었다. 하지만 루시에게 자신의 지배력이 통하지 않은 순간부터 그는 사실 이런 사실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죽여라. 저 괴물을 죽여!”
“마왕을 배신한 배신자들, 그런 주제에 마왕이 되고 싶은 뻔뻔한 종자들. 그 비효율적인 행동으로 당신들은 여기서 멸종합니다.”
패닉에 빠진 바알이 마왕군 전체에 명령해 루시를 죽이라 명령한 것과, 루시가 대기시키던 제 3타를 발진시킨 것은 동시에 일어났다.
마계 영주들이 전대 마왕을 배신하고 대전쟁의 승리자가 된 순간부터 시작된 자그마한 스노우 볼이 여기까지 굴러와, 이제는 역으로 그들을 집어삼키려 한다.
“어디 계속 부활해 봐라. 계속 죽여 주마.”
“감당할 수 있습니까?”
바알은 자신이 직접 전력을 쏟아부어 루시를 공격해, 그 몸을 반으로 갈라 버리고 얼굴을 움켜쥐었다.
그러고선 그대로 그 얼굴을 으깨 버렸다. 제대로 만든 특수종의 육체가 아니라 약하긴 약했다.
하지만 바알 본인도 안다. 이 전쟁은 고작해야 루시의 몸 하나를 부순다고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자랑스러워해도 됩니다. 나는, 우리는 이 마계가 만들어 낸 가장 강력한 군단이니까. 그 과정에 당신들의 공로가 큽니다.]
“마, 마왕님!”
울려 퍼지는 루시의 목소리와 함께 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생물체들이 일제히 전장에 난입했다.
생물종의 극의. 루시가 침략종 아일랜드와 라비즈다에서 접하게 된 우주 인류의 우주 함선을 보고 모방하여 만들어 낸 함선형 생물체들.
“일단 후퇴해야 합니다. 지금 저 거대한 놈들을 이길 순 없습니다!”
“아니! 놈들에게 시간을 주면 어떻게 되는지 지금 그 결과를 보고 있지 않나!”
그 압도적인 위용에 기가 눌린 다른 이들은 후퇴할 것을 권했지만 바알은 듣지 않았다.
“여기서 싸운다. 저 괴물들도 이번에는 저것이 마지막일 터! 둥지를 파괴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영영 놈들을 이길 수 없다!”
‘내가, 내가 진짜 마왕이다. 내가!’
바알은 저 멀리 보이는 마왕군의 둥지를 보고 이를 갈았다. 루시의 정체를 알아 버린 이상, 여기서 물러선다면 마왕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포격이다. 막아라!”
그리고 그 순간 하늘에서 다가온 거대한 함선형 병사들이 그 거대한 몸으로 품고 있던 강력한 에너지를 지상을 향해 폭사하기 시작했다.
마법 같은 기교도 없이 순수하게 마력을 응축해서 쏘아 내는 그 일격을 막으려면, 마계 연합은 자신들이 직접 연료가 되어 방어막을 만들어야 했다.
“큭.”
바알 역시 마찬가지다. 직접 지상으로 내려가서 마법을 펼친 그는, 자신을 향해 내리꽂는 거대한 광선포를 정면으로 받아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