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정리 (2)
“정말 견딜 수 있소? 바다의 마수들이야 가리지 않고 날뛴다지만, 의미 없소. 놈들은 뱃속에 병력을 실은 거대한 괴물들로 하늘을 날아온다고.”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이게 우리의 마지막 방법인 것을.”
마계 영주, 흡혈귀 아가레스의 궁전이자 마계 영주들 최후의 방어선이 된 곳.
분위기는 침울하다. 가까스로 뜻을 모은 이들이 한데 뭉쳤지만 그 숫자는 초라했다. 이제 살아남은 이들이 자신들 뿐이란 것을, 마계를 덮친 재앙이 자신들을 마무리 짓기 위해 오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이렇게 된 것이지?’
모두가 말은 없었지만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버텨 온 기간에 비해 막상 충돌하고 무너지는 시간이 너무 빨라 더더욱 그렇다.
대체 왜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인지 아직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놈들에게 협상 따위는 통하지 않소. 자비도 없지. 싸우다 죽느냐 그냥 죽느냐. 그게 전부요.”
“미치겠군. 다른 놈들도 아니고 그 근본도 모를 이상한 괴물들에게 당한다고, 우리가!?”
그들 입장에서 루시는 말 그대로 재앙이다. 어느 한순간 등장하여 갑자기 자신들을 적대하고, 자신들과 싸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강해지는 끔찍한 재앙.
혁명을 이루고 종족의 한계를 초월하며 마왕을 끌어내린 공신이라는 사실들은 이제 아무 의미 없었다.
그들은 목적을 이룬 이후 발전을 포기하고 제자리걸음만 했으며 그나마 가진 힘도 서로를 견제하느라 다 써 버렸다.
그것은 오로지 본인들의 잘못이니 그들은 차마 뭐라 입을 열지 못했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무엇이 달라질까. 놈들의 싹수를 자르지 않은 순간부터 정해진 일이었다.”
행방이 묘연해진 바알을 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바알만이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보고 먼저 힘을 모아 마왕군을 공격하려 시도했으니까.
비록 그것이 실패해서 멸망을 앞당겼지만, 어차피 마왕군에 시간을 더 주었다면 멸망은 확정이었으니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주군. 놈들이, 놈들이 오고 있습니다. 하늘을 가득 채운 채로.”
곧 아가레스의 수하 중 하나가 달려와 그들에게 때가 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마계 영주들 모두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싸우자. 마계의 지배자가 될 새로운 마왕에게 감히 우리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 정도는 경고해야 하지 않겠나.”
그들은 최후의 결사 항전을 준비했다.
모든 병력을 이끌고 하늘을 가로질러오는 마왕군의 함선형 병사들을 맞이했다.
“포격 준비.”
그러나 루시는 그들이 원하는 장렬한 백병전 따위는 해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게 더 효율적이었으니까.
“포격.”
섬을 뒤덮은 함선형 병사들이 체내에서 폭발시키는 강력한 마력을 광선의 형태로 그대로 쏘아 보냈다. 루시가 가진 데이터 상 뽑아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화력.
그 위력은 평야 하나를 뒤집어 버릴 정도로 강력하다.
“으아아악!”
“막아라, 아니, 피해라!”
섬 전체가 포격 대상이었다. 병력을 내리지 않고 미친 듯이 폭격만 하던 루시의 공격은, 함선형 병사들의 출력이 한계에 달하고서야 멈췄다.
“…….”
마계 영주들 중 일부가 이미 그 포격으로 사망한 이후였다. 집중 포격을 막아 보려다 끝내 실패한 아가레스는 상반신 일부가 날아간 채, 그 입을 쩍 벌리고 수많은 병력을 이제야 뱉어내는 아일랜드·알파의 모습을 보고 탄식했다.
“단 한 개체도 남기지 않고.”
마왕군은 이미 전투 불능 상태가 되어 버린 최후의 저항군을 그대로 들이쳐 무자비한 학살을 이어 갔다. 유리아를 비롯한 특수종들도 모두 난입하여 마계 영주들을 찾았다.
포격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이들은, 미리 준비했던 제대로 된 계획도 없이 비틀거리는 상태로 그들을 맞아 싸워야 했다.
“이런 비겁한! 너희는 명예도 없느냐!”
“생존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효율뿐. 명예도, 긍지도 아니다.”
유리아는 분노한 적들을 향해 마법을 뿜어 내었다. 강심이 공명하며 시전되는 루시의 마왕식 마법은 빠르고 간결하다.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이들 몇몇 정도는 그냥 날려 버릴 정도였다.
“이 놈들…….”
게다가 유리아만 문제인 것도 아니었다. 마계 영주들은 분명 강한 힘을 바탕으로 전장의 균형을 부술 수 있는 이들이지만, 결국 앞서는 건 출력뿐.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총량에는 한계가 있다.
무력을 뽐내며 버티는 것도 잠깐이지, 곧 사방에서 자신들만 노리고 집요하게 덤벼드는 상위종들의 합공에 그들은 하나둘 쓰러졌다.
“마왕이라면 마왕답게 군림하고 지배하라!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이렇게 모두를 죽여 없애고 텅 비어 버린 땅에 괴물들만 가득 채워 넣을 셈인가!”
그런 모든 광경을 지켜 봐온 아가레스는 루시에게 소리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루시의 행동은 이해가 불가능했으니까.
루시는 마왕이었다. 그들도 그것은 인정했다. 그렇다면 그저 마왕답게 자신들을 지배하면 된다. 하지만 루시는 그러지 않았다. 그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럴 가치가 없습니다. 당신들은 물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자신들을 가치 있는 존재라고 착각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루시는 그 외침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가치가 없다. 그 말에 자부심은 하늘을 찌르던 그들의 눈이 흔들렸다.
“세상은 상상 이상으로 넓습니다. 그 거대한 세상에서 당신들은 일개 티끌에 불과합니다. 아등바등 살아가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고작해야 하나의 데이터 덩어리에 불과할 뿐. 다른 이들에 비해 조금 특출난 당신들도 역시 그것을 벗어날 순 없습니다.”
“무슨 헛소리를…….”
“당신들이 내게 패한 이유도 그것입니다. 자신들의 전력을 착각하고 자만했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고 빠르게 하나로 뭉쳤다면 어쩌면 결과를 바꿀 수도 있었겠지만, 당신들은 그것을 모르고 끝까지 티끌로 남았습니다.”
이제는 한 세상을 발아래에 둘 정도로 커진 거대한 군체가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하이브마인드인 루시에게, 개인 단위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모든 생물체들은 그저 가치 없는 티끌로 보일 수밖에 없다.
최근 들어 더 거대한 세상을 접하게 되었기에 더욱.
물론 마계 영주들은 루시의 그런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근본 자체가 다르니까.
“어떤 방식이 옳은지는 살아남는 쪽이 증명합니다.”
“이, 이런.”
롱기누스를 치켜든 루시는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최대 출력으로 터져 나오는 강력한 마력의 폭풍이 쏘아지며 그들을 휩쓸었다.
힘이 다 빠진 상태에서 견딜 수 있는 위력은 아니다.
“마계 영주 6인의 사망을 확인.”
“이제 마계를 안정화시키는 작업을 하실 것인지.”
“마계를 점령하느라 생산한 너무 많은 병력은 휴면 상태로도 계속해서 양분을 소모합니다. 그러니 최대한 효율적으로 소모할 방법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전투에서도 수월하게 승리한 이후 유리아는 루시에게 차후 계획을 물었다. 늘 하던 대로라면 점령지를 안정화하고 잔당을 소탕하며 둥지화를 하는 것이 정상.
그러나 루시는 고개를 저었다.
“병력을 소모한다면 대체 어떤 방식으로 하실 것인지.”
“마계를 청소했으니 다른 곳을 굳이 남겨 둘 이유가 없습니다.”
배신자들을 척결하라는 사명을 드디어 완수했지만, 루시는 덤덤했다. 애초에 고작 그런 것으로 만족할 때는 지난 지 오래다.
“대륙을 공격합니다.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끝내고 그곳마저 점령하기 위해.”
루시는 타깃을 돌렸다. 한때 마계 영주들과 손잡고 대전쟁을 승리로 가져간 대륙 세력들을 향해. 그들에 대해서는 이미 손바닥 들여다보듯 자세히 알고 있었다.
나안이나 유리아 같이 이미 그들에게 심어 놓은 정보원들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된다면…… 대륙도 마계처럼.”
유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루시는 분명 평범한 마왕과는 다르다. 다만 역대 마왕들의 숙원은 바로 대륙을 정복하는 것.
결국 루시도 역대 마왕들처럼 대륙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펼쳐질 것이다. 대륙은 결국 자기들끼리 나뉘어 싸우고 있고 무엇보다 루시는 역대 마왕들과 완전히 다른 존재인 탓이다.
그 일원인 유리아는 루시의 마왕군이 제대로 진격한다면 대륙이 견디지 못할 것이라 직감했다. 자신의 고향이 짓밟히고 소멸하여 마왕군의 둥지로 바뀌는 것이다.
“그곳에 살아가는 이들 역시 마족들처럼 죽이실 겁니까?”
“양분 효율이 좋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양분으로 쓸 수 있습니다.”
유리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루시는 단호했다.
덕분에 유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루시는 효율적이라 판단하면 그 무엇도 가리지 않는다. 당장 라온 역시 루시의 명령으로 동족인 엘프들과 싸우고 끝내 그들을 멸망시켰다.
루시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대가. 그것으로 유리아는 자신의 동족이었던 이들과 싸워야 했다.
‘크리스.’
사실 다른 이들은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특히 연합의 수뇌부들은 자신을 비롯한 의용군을 배반한 사악한 배신자들이고 원수였다. 그들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뭔들 못할까.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바로 동생인 크리스였다. 아직 그녀의 정체를 모르는 그에게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감히 예측하지 못한 유리아는 괴물의 몸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흠칫거렸다.
루시에게 크리스를 자신과 같은 마왕군의 일부로 만들어 달라 말했지만 과연 크리스가 그것을 받아들일지, 그렇게 되고도 자신을 누이로 봐 줄지 확신하지 못했다.
* * *
“교단 놈들이 물러난다. 모두 고생했다.”
“후…….”
마계에서 유지되던 균형이 단숨에 붕괴되어 버린 그 순간.
이곳에서도 나름 치열한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치열한 사투 이후 교단 병력들이 먼저 물러나자, 요새를 사수하던 병사와 기사들은 일제히 자리에 뻗어 버렸다.
“실력이 빨리 늘어나는군, 크리스.”
“안 늘 수가 없지. 최근 몇 달간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크리스 역시 그 중 하나였다. 동료의 말에 피식 웃은 그는 성벽에 기대어 서서, 시체가 즐비한 바닥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결국 끝을 보려는 건가.’
웃음과는 달리 그 눈은 착잡함이 엿보였다. 변방 지역에서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전쟁의 참혹함이 생각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광적으로 들이받는 광신도들의 공세는 익숙해지질 않았다.
‘지킬 수밖에 없다.’
그런 광적인 모습을 보면 도저히 교단이 옳은 이들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약한 힘이나마 연합에 거들어 적들에게서 사람들을 지키고자 했다.
‘그래야만 다시 전과 같이.’
그리 거창한 사명감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자신의 누이 유리아를 다시 만난 이후, 그는 다시는 되찾을 수 없었을 것 같았던 과거의 행복을 원했으니까.
이 전쟁만 끝나면, 교단만 없어진다면 이 세상은 다시 평화를 되찾고 평온한 삶을 보낼 수 있을 테니까.
어린 시절 혼자가 되어 버린 이후 계속해서 기사 일에 몸담아 온 그는 정말 간절히 평화를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