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정리 (4)
“어쩐답니까. 지금 난리라는데 저희는 계속 자리를 지킵니까?”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돌아갈 수도 없어. 차라리 여기 있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대산맥 근처의 장벽. 한때 마계에서 넘어오는 이들을 막기 위해 치열한 사투가 벌어지던 곳.
대전쟁 당시에도 이곳은 빼앗기든 지키든 언제나 피로 물들어 있었지만, 이후로는 마계와 적대 관계가 풀리면서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곳에 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그것도 마계 쪽이 아닌 뒤쪽을 통해서.
“이미 제국 대부분이 그 괴물들 손에 넘어갔다고 했다. 산 사람을 통째로 괴물로 바꿔 버린다고.”
“하, 하지만.”
“사령관께서도 생각이 있으실 거다.”
현장 지휘관은 불안해하는 병사들을 달랬다. 병사들의 고향과 터전이 모두 뒤쪽에 있으니 걱정할만 했지만 막상 이곳을 버리고 가는 건 불가능했다.
“크, 큰일났습니다!”
그런 와중에 장벽 위의 망루에서 경계 임무를 수행하던 보초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자신이 관측한 이변에 대해서 알려왔다.
기겁한 이들이 모두 장벽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떡 벌렸다.
“조, 조장. 설마 마계에서 소식을 듣고 지원군을 파견한 걸까요?”
병사 중 하나가 멍청한 소리를 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한 어둑한 먹구름 아래 대산맥을 넘어 마계에서 넘어 온 무수한 군단이 일말의 소음도 없이 이곳으로 행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저게 어딜 봐서 마족들이란 말이냐.”
조장은 움찔거리며 목소리를 떨었다. 마치 서서히 차오르는 밀물처럼 스며들듯 다가오는 검은 물결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 모습을 더 적나라하게 보였다.
다양한 모습을 한 수많은 병력들이 골고루 조합되어 다가오고 있다. 중구난방인 것 같지만, 무수한 전투를 거치며 검증된 가장 효율적인 병력 조합이다.
전신에 두른 검은 갑각은 마치 갑옷 같고 그 생김새는 이질적이고 차갑기 짝이 없다.
분명 살아 움직이는데도 자신들과는 달리 생물 같지 않은 그 이질감에 소름이 돋은 조장은 뒷걸음질 쳤다.
“다, 당장 사령관께 보고해라! 괴물 군단이 몰려온다!”
본능적인 두려움은 떨쳐 낼 수 없었다. 애초에, 여기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흑철충이라 불리는 마왕군에 대해 소문으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기겁을 한 병사들이 서둘러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고 당연히 총책임자인 사령관 역시 튀어나와 장벽에 올라섰다.
“이, 이럴 수가. 마계에서 어째서!”
다만 사령관 역시 당황하고 흔들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잘못된 선택 한 번에 마계가 단숨에 무너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그들은, 아군인 마계에서 왜 저런 괴물들이 흘러나오고 있는지 감도 잡지 못했다.
“족히 수십만은 되어 보입니다. 지금 아군 병력으로는…… 절대 못 막습니다!”
사령관은 선택을 강요받았다. 대전쟁 이후 이 장벽을 상시 지키는 병사들은 고작해야 천 단위다. 겨우 관리만 하고 있는 수준인 그 병사들로 맞서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을 버린다면 맞서 싸울 수 있는 곳이 아예 없다.
* * *
[적들이 후퇴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채 1%도 되지 않는 승리 확률에 덤벼드는 것은 비효율적입니다.]
“상황이 많이 안 좋다더니, 그 여파인가?”
루시에게도 장벽을 지키던 병사들이 일제히 도주하는 모습이 보였다. 애초에 장벽 수비군과의 전투는 전투 취급도 하지 않으려던 루시는 그들의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중심추인 제국이 무너지고 빠르게 분열하고 있는 인간들은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장벽을 넘고 서둘러 그 ‘괴물’들을 처치하겠습니다.]
루시는 곧 병사들에게 돌진 명령을 내렸다. 마계 연합과 싸웠을 때와 같다. 지금 공격은 그저 마계 연합과의 전투에서 남은 병력을 소진시킬 겸 보내는 제1타에 불과했다.
[아군이 장벽을 넘었습니다.]
돌진하기 시작한 마왕군은 수월하게 장벽을 넘었다. 그 과정에서 미처 대피하지 못한 작은 마을이나 오두막 등을 발견하긴 했지만, 루시는 굳이 지금 당장 그들을 찾아가 죽이진 않았다.
가장 중요한 목적은 최근 빠르게 세력을 늘려 가는 정체불명의 괴물들을 처리하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루시는 장벽 근처 넓은 평지에 둥지를 만들고 전투를 길게 보기 시작했다.
“그 괴물들이 바알의 마지막 발악이라고 했지. 놈은 현지 사람들 전부를 소모품으로 쓸 생각인가.”
루시가 보여 주는 화면을 통해 상황을 보던 그는 쓰게 웃었다. 따지고 보면 땅과 양분을 차지하기 위해 대륙으로 침공한 루시 역시 무자비한 포식자. 마음에 걸리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그 걱정이 무색하게, 이미 상대에게 공격당한 현지인들은 괴물로 변해 버린 상태였다. 폭주하는 꼭두각시가 되어 버리는 그 괴물화에는 조금의 자비도 들어있지 않았다.
[승리 확률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그래. 차라리 네가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게 낫겠다.”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루시가 병사들을 움직여 본격적으로 괴물들을 공격하려 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이게 낫다.’
아무리 다른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사람이다. 마계의 마족들이야 마왕을 배신한 괴물들이기에 별다른 생각 없었지만, 역시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동족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힘든 법.
그런 그들이 미쳐 날뛰는 괴물이 되었으니 거북함을 느낄 이유는 이제 없다.
* * *
“모두 피해! 놈들이 몰려온다!”
“아, 안 돼……. 이제 못 버텨!”
이곳은 대륙 북부의 한 왕국, 그곳의 국경지대에 있는 한 도시. 중심부에 있던 제국이 끝내 무너지며 사방으로 쏟아내기 시작한 괴물들은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공격했다.
이곳 역시 마찬가지다. 차출된 병사들이 요충지에 있는 요새를 지키기 위해 집결한 순간, 상대적으로 방어가 느슨해진 도시나 마을들에도 괴물들의 습격이 이어졌다.
“으, 으아악! 이거 놔라!”
인간과 비슷하면서도 끔찍하게 비틀려 있는 이 괴물들은, 사람을 해치고 때로는 그들을 자신들의 일부로 만들었다.
“크륵.”
저항하던 기사 하나가 괴물들에게 제압당해 붙잡혔다. 기겁한 그는 버둥거렸지만 괴물들은 그를 희생자로 점찍었다는 듯 입을 쩍 벌리고 검은 증기를 뿜어내어 기사에게 주입했다.
당연히 기사는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비틀었고, 실시간으로 급변하기 시작한 기사의 몸이 변형을 일으키더니 어느새 이성을 잃은 괴물이 되어 검을 뽑아들고 으르렁거렸다.
“이럴 수가. 도시가 함락되었다.”
사람들은 빠르게 저항 능력과 의지를 잃어버렸다. 그나마 뭉쳐서 저항하던 방어선이 깨지자마자, 상식이 통하지 않는 괴물들은 단숨에 이곳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만들어 버리며 사람들을 죽이고 변이시켰다.
“아, 아버지.”
“아니야. 벗어날 수 있다. 그러니 준비해라.”
이제 남은 건 구석구석에 낙오 당하거나 도주한 이들을 쫓아가 살해하는 것뿐.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교외 지역에 고립당한 한 부자 역시,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괴물들의 모습에 몸을 떨었다.
‘대전쟁에서도 살아남았거늘.’
중년 사내는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대전쟁 시절도 겪었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한 것 같았다.
“캬아악!”
“뛰어!”
적어도 그때는 지금처럼 무차별적인 학살이 이어지지는 않았으니까.
포효한 괴물이 몸을 꺾으며 달려들자 그들은 마지막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딜 가나 이미 괴물들이 점령한 도시에서,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살기 위해 발악했다.
‘여기까진가.’
결국 막다른 길에 몰린 그들은 골목길이나 옥상 등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괴물들에게 포위당했다.
이제 진짜 모든 마음이 꺾였다. 도망칠 힘도 없고 싸울 힘은 더더욱 없었으니까.
“으, 으으.”
가장 선두에 있던 괴물이 히죽 웃으며 입을 벌리고 증기를 내뿜었다. 닿는 즉시 사람을 괴물로 바꿔 버리는 끔찍한 저주 그 자체였다.
“……어?”
그러나 그들이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순간.
하늘에서 쇄도한 광선포가 증기는 물론 그것을 뿜어내던 괴물까지 단번에 으깨 버렸다.
“저기!”
아버지의 품에서 떨던 아들이 하늘을 보고 탄성을 내질렀다.
그 무서운 괴물의 상반신이 사라지고 철퍽 소리를 내며 쓰러지게 만든 존재는, 하늘에 떠 있는 검은 갑주의 또 다른 괴물.
광선포를 손에 들고 쏜 상위종, 하피·델타가 손으로 다른 괴물들을 가리키니 곧 수많은 마왕군이 땅을 울리며 달려와 괴물들이 점령한 도시를 역으로 공격했다.
“이쪽으로!”
아버지는 그 틈에 아들을 데리고 반대쪽으로 뛰었다.
괴물들과 싸우기 시작한 또 다른 괴물들이 만들어 준 그 틈을 이용해서.
어린 아들은 그 순간에도 고개를 돌려 생전 처음 보는 마왕군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역시 숙주가 된 대상의 전투력에 따라 그 전투력의 크기와 형태가 달라지는 모양입니다.]
물론 인간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루시는, 실전을 통해 빠르게 데이터를 습득해 나갔다.
실제로 한때 기사였던 괴물들은 검을 휘두르며 마력을 뿜어내었다. 마법사였던 괴물들은 마법을 시전해서 마왕군을 공격하니 마력을 쓰지 못하는 일반종 병사들로는 그리 쉽게 상대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출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숙주가 가진 힘이 최대이기 때문에]
당연히 가장 강한 개체인 하피·델타에게도 적들이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일반종과 상위종은 마왕군 내부에서도 하늘과 땅 같은 격차가 있다.
루시는 마력 방어막을 끌어올린 하피·델타가 별다른 타격 없이 그들에게 보복하는 모습을 보고 승률을 상향 조정했다.
숙주에 따라 전투력이 바뀐다는 것은 숙주가 약하다면 변수 없이 약하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우선 이 지역을 점령한 적들을 일소합니다.]
얻을 데이터는 다 얻었다고 판단한 루시는 병력들을 움직여 승승장구하며 도시를 점령했던 바알의 병사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마계 연합과의 전투 과정과 비슷했다. 이 변이한 괴물들은 바알의 명령을 듣고 그대로 움직이긴 하지만, 바알은 태생이 하이브마인드가 아니었으니까.
바알이 신경 쓰지 못하고 있는 사이 루시는 손쉽게 괴물들을 처치하고 그 땅을 점령했다.
[46곳의 전장에서 45회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나머지 1곳 역시 승리 직전입니다.]
이런 일이 지금 이 변방의 작은 도시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괴물들이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던 무수한 곳을 동시에 공격한 루시의 마왕군은 현지 세력들을 무너뜨린 괴물들을 역으로 사냥하며 승리를 거두었다.
“흐, 마왕……!”
당연히 이 소식은 바알에게도 들어갔다. 한때 찬란하고 화려했던, 하지만 지금은 괴물들만 가득한 제국의 황궁.
그곳의 옥좌에 앉아 있던 바알은, 히죽 웃으면서 손잡이를 부서질 정도로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