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정리 (5)
“역시 상관없다는 건가.”
안 그래도 혼란한 와중에, 마계에서 장벽을 넘어 온 또 다른 군단이 대륙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지금 그 숫자를 대창궐한 전염병처럼 폭발적으로 늘려 가는 바알의 군단과 전쟁을 시작했다.
그 의도는 노골적이었다. 바알 역시 마왕군이 자신의 마력을 감지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쉽게 당하진 않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든지 자신을 처단하겠다는 루시의 마음을 알아차린 그는 웃었다. 마왕은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이들을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까.
“연합은 붕괴하고 제국을 포함한 대륙의 일부는 내 손에 떨어졌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분노를 터트린 그는, 자신이 직접 마정을 박아 넣은 황제를 조종하여 어느새 그 규모가 거대하진 군단을 움직였다.
변이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능력을 모두 이용할 수 있음은 물론 마왕군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이성과 자아를 제거한, 폭주하는 괴물 군단이다.
“놈들이 또 몰려온다!”
“도망쳐!”
그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갑작스럽게 재앙을 맞이하게 된 연합의 세력들이었다.
바알은 병사를 만들어 내기 위해 무차별적인 침공을 개시했고 그의 변이체 군단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잡아먹어 그 덩치를 불려 갔다.
당연히 제국을 중심으로 유지되고 있던 연합은 단번에 붕괴했다. 직전까지 교단 세력과 힘의 균형을 맞추고 있었지만, 바알에게 그런 건 이제 더 이상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교단 세력이 이것을 기회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루시는 그 과정에서 교단이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알이 난입해서 패악질을 부리기 시작하니, 연합의 세력들도 결국 자기들 살길을 찾아서 움직여야 했으니까.
그런 와중에 일말의 여지도 없이 끔찍한 괴물로 만들어 버리는 바알에게 항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그들은, 결국 교단에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교단이 연합의 세력을 일부 흡수해서 더 강해지려는 건가.”
교단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그들은 경계선의 경비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 병력을 움직여, 살기 위해 이탈해 오는 이들을 흡수하고 빠르게 그 덩치를 불려 갔다.
이미 연합은 붕괴하고 꽤 치열하게 이어져 오던 대륙의 내전은 이렇게 한순간에 허망하게 끝나 버리고 말았다.
“보니까 저쪽도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모든 것을 쏟아부은 느낌인데.”
[그렇습니다.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전투 병기라는 점에서, 마족들이 연합한 것보다 더 단단하기도 합니다.]
루시는 바알이 마지막 발악으로 만들어 낸 이 거대한 재앙에도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바알과의 싸움도, 미쳐 날뛰는 괴물 집단과의 싸움도 이미 데이터에 있었으니까.
[유의미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전투는 아닌 것 같습니다.]
루시는 이번에도 상대의 힘을 자신이 모방하여 쓸 수 있을까 관심을 가졌다. 특히 멀쩡한 개체를 감염시켜 아군으로 만드는 것은 라비즈다의 감염체들을 처음 만나 그 개념을 접한 순간부터 탐내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곳의 감염체들과 마찬가지로 바알이 만들어 낸 이 변이체들 역시 단순한 생물적 작용으로 만들어진 이들이 아니라, 그 감염력에 마력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작용이 들어갔다.
그것은 루시가 가진 유전자 분석 능력으로 파악하고 카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것을 얻으려면 배워야 하지만, 이성 없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배우는 건 말이 안 된다.
“어쩔 수 없지, 그건. 근데 내가 봐도 딱히 따라할 이유는 없어 보이긴 해.”
[그렇습니다. 양분으로 치환하여 병력을 생산하는 데 사용하는 것도 비효율적이긴 하지만, 그 과정이 다르진 않습니다.]
자신의 보고에 동의하는 그의 말을 인정한 이후 깔끔히 포기한 루시는, 자신의 병력들에게 상대를 몰살할 것을 명령했다.
대다수의 병력이 추가적인 생산 없이, 마계를 정복하느라 생산하고 남은 병력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적들과의 전투 데이터가 빠르게 쌓이고 있습니다. 상위종의 균형만 잘 맞춰 주면 아군이 승리합니다.]
그 결과 루시는 빠르게 승리 패턴을 도출했다.
바알이 만들어 낸 변이체들의 주요 전술은, 마력을 가진 기사나 마법사 출신 변이체들이 그 핵심. 덩치가 아무리 커도 마력을 지니지 못한 일반종 병사들은 그들을 이길 수 없으니 마계의 마족 군단과 싸우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반대로 말해서 그 특출난 몇몇만 제대로 마크하면 이길 수 있다는 뜻.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폭주하는 것이 거슬리긴 했지만, 루시는 체내에 강심을 단 상위종들을 적절히 파견하여 마크하는 식으로 상대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 강한 병사들이 필요하다.”
“바, 바알! 네놈이 감히!”
그것을 바알도 알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더 많은 병력과 더 빠른 병력 지휘가 가능한 루시에게 그냥 밀려버릴 것이라는 걸.
그런 식으로 밀려 버린 건 이미 겪은 일이었으니, 다시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다. 그걸 막기 위해 바알은 발 빠르게 움직이며 길을 막았다.
한때 영웅이라 불렸던, 지금 와서는 변이체 군단의 핵심이 되어 줄 강자들을 잡기 위해서.
* * *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이 사악한 마족아!”
“카론, 지금 이 세상에 어떤 위협이 닥쳐오는지 넌 모르겠지. 이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어쩔 수 없네.”
바알은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하고 변이체 군단에 둘러싸인 상대를 비웃었다.
“헛소리 마라. 결국 네놈도 마족이구나. 그 본성을 버리지 못한 것이야.”
“닥쳐라. 나는 이미 보았다. 오히려 내가! 모두가 합심하여 마왕을 막았던 대전쟁 시절부터 이어진 저항 정신을 끝까지 지키고 있는 것이니까.”
바알은 진심으로 자신이 옳다고 믿었다. 루시가, 마왕이 가진 힘과 목적을 두 눈으로 보고 겪은 그는 그것을 떠올리며 목소리를 떨었다.
“이번 대 마왕은 미친년이다. 이제 와서 교단 놈들과 손잡는다고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장담하는데, 수많은 마왕군 앞에 이 대륙 전체가 짓밟힐 것이다. 전대 마왕과는 그 종부터가 다르단 말이다. 그런 괴물 집단을 마음에 욕심만 가득 찬 너희가 이길 수 있다고? 멍청한 소리.”
“대체 무슨 개소리를…….”
상대는 주춤거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알은 나름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마계 세력들마저 모두 무너진 마당에, 루시가 지휘하는 마왕군을 기존의 방법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필요하다. 그러니 장렬히 희생해라, 카론. 다시 한번 희생해서 마왕을 막는 영웅이 되어라.”
“이 자식! 전부 무기를 들어라!”
바알은 병력을 움직여 상대방을 습격했다. 뛰어난 기사로 대전쟁 시절부터 이름을 날린 카론은 부하들과 함께 황급히 검을 들고 맞서 싸웠지만, 일 검에 쏘아진 참격으로 커다란 바위도 갈라 버리는 영웅도 다수의 적을 상대로 계속 싸우는 건 힘들었다.
“커헉.”
거기다 바알의 공격까지. 비록 마왕 위는 다시 내려놓았지만 착실히 길러 온 힘이 상당한 바알은, 자신의 병사들이 몸을 던져 틈을 만드는 사이 카론의 몸에 마법을 꽂아 넣었다.
“그, 그만! 안 돼!”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이제는 네가 앞장서서 다른 이들을 동지로 만들어 갈 테니까.”
짧지만 격렬한 전투.
순식간에 쌓인 시체들 위에서 온몸에 달라붙은 변이체들에 낑낑거리던 카론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조금 특별한 변이체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황…….”
다른 이들과 달리 유독 거대한 몸을 가지고 있던 그것이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은 황제의 관.
그러나 그것을 알아본 카론이 뭐라 하기도 전에 억센 손톱이 그의 가슴을 관통해 그 내부에 독을 흘려 넣었다.
‘지금이야 승승장구하고 있겠지만 조금만 기다려라.’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기 시작한 카론을 지켜본 바알이 히죽 웃었다.
이런 식으로 전력을 갖추고 마왕군을 들이받을 생각이었다. 마계 연합과 달리 변이체들은 두려워하지도 않고 물러서지도 않았으니까.
강제로 싸우는 것과 자발적으로 분노하여 싸우는 것에는 차이가 크다.
* * *
“저기 보입니다. 놈들이 피난민들을 쫓고 있습니다!”
“가서 구해야지. 가자!”
대륙 중부, 치열한 교전의 중심이 되었던 두 세력의 경계선. 그곳에서 더 이상 상대의 견제를 받지 않고 반대편에 무혈 입성한 무장한 교단 세력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다리던 대상들이 마침내 능선 너머에 나타났다.
“쏴라!”
서둘러 달려간 교단 병력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그중 일부는 손에 든 총을 들고 대피하는 피난민들의 뒤를 쫓는 변이체들을 향해 발사했다.
분명 소리를 찢으며 날아간 작은 금속 조각들은 끔찍하게 변이한 괴물들의 몸을 뚫어 버렸으나.
“저놈들은 마력을 다룬다. 뒤로 빠져!”
놈들 중 일부는 검이나 창 등 무기를 휘두르며 총탄을 튕겨 낼 정도로 몸이 단단했다.
마력을 품고 있는 그놈들을 상대하기 위해 교단에서는 사제와 성기사들이 나서서 적들을 베고 터트렸다.
“이, 이제 살았소!”
“진정하시오. 그보다 영주는 어디 있지? 분명 합류한다 하지 않았소.”
교단 측 대표였던 대사제는, 피난민들을 이끌고 온 중년 사내를 잡아 약속한 사람은 어디 있느냐 캐물었다.
애초에 그들이 여기 미리 나와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투항하기로 결정한 영웅 출신을 맞이하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배, 백작님은 놈들과 맞서기 위해 몸을 돌리셨소. 그 이후는 나도 모르오.”
피난민들을 이끌고 온 사내는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대사제는 그 모습에 얼굴을 찌푸렸다.
이벨리아가 그들에게 직접 명령한 이유는, 중요한 전력이 될 영웅급 인물을 데려오기 위해서였으니까.
“일단 다른 이들부터 후방으로…….”
“저기 보십시오. 놈들이 다시 옵니다!”
그러나 이것저것 따지고 있을 틈은 없었다.
대사제가 피난민들을 수습해 후방으로 보내려는 사이. 어느새 다른 적들이 나타나 그들에게 달려오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성기사들!”
피난민들을 추격하던 적들을 처리한 성기사들이 다급히 나서서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런데 그 적들의 선두에 있는 변이체 하나가 어딘가 투박하고 익숙한 커다란 도끼를 꺼내들더니, 마력이 불타오르는 그것으로 강력한 참격을 쏘아 보냈다.
‘저것은!’
모두가 당황했다. 지금 창백한 피부에 말라 비틀어진 몸을 가지게 된 끔찍한 괴물이 그들이 기다리던 저 도끼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건.”
미처 대비하지 못한 성기사들이 한 번에 쓸려 나갔다. 설마 영웅급 인물이 적이 되어 돌아올 줄 몰랐었으니까.
이대로라면 이곳까지 들이닥친 저 변이체들에게 모두가 몰살당한다.
“임무는 실패했군. 어쩔 수 없으니 뒤로 물러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가능하시겠습니까? 그는 대전쟁 시절 큰 공을 세웠던 전사입니다.”
그때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검 한 자루 들고 있는 젊은 남성. 대사제는 선글라스를 벗는 그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