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정리 (8)
“그래. 끝을 보자, 마왕.”
“끝? 그 단어는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하는 데 적절한 단어가 아닙니다.”
화면 속, 바알은 마치 마지막이라는 듯 히죽이며 루시를 향해 손을 겨누었다.
그러나 한때 마계를 통일하고 마왕의 자리까지 올라갔던 존재의 그런 비장한 각오에도, 루시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팩트 폭격을 꽂아 넣었다.
“당신이 여기서 내 몸을 다시 한번 찢어발긴다 해도, 두 번, 세 번, 일백 번 다시 죽인다 해도 끝은 나지 않습니다. 내게, 이 마왕 루시에게 세포 하나만이라도 살아 있다면 끝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으니.”
루시는 현실을 알라는 듯한 말투로 바알에게 일침을 날렸다.
실제로 바알이 파괴한 루시의 육신만 몇 개더라. 그도 그 사실을 알았는지 눈을 파르르 떨더니 이내 이를 악물었다.
나는 감히 그 기분을 예측할 수 없다. 자신이 모든 것을 걸었는데 상대는 여전히 범접할 수 없는 벽이다. 눈앞에 있는 상대를 죽여 봤자 상대는 또 다른 몸으로 갈아타고 다시 나타날 것이고, 그 사이 자신의 저항 수단은 하나둘 사라져간다.
“뭘 그렇게 굳건히 믿고 있는 거지? 대체, 네 그 확신의 근거는 무엇이냐.”
바알은 어딘가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루시에게 그렇게 말했다. 네가 믿는 것이 대체 무엇이냐고.
입꼬리가 흔들리는 걸 본 나는 루시가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루시의 대답을 예측했다. 아마 자신이 그동안 무수히 쌓아 온 데이터로 만든 함수식들. 그것일 것이다.
인공지능에 근본을 둔 루시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계산 결과가 말 그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니까.
“저 위에 계시는 분이, 나의 믿음.”
그러나 루시의 답은 내 예상과 달랐다.
바알은 물론 나조차 놀라서 눈이 커질 대답. 그런데도 루시는 오히려 웃었다.
“그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었을까. 당신은 탐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대체 내가 어디서 왔고,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마계의 모든 것을 잡아먹으며 자라난 나는 결코 혼자서 이 모든 것을 이룬 것이 아닙니다.”
“그, 그럼 대체 누가. 누가 마왕을…… 설마!”
바알의 목소리가 빠르게 떨렸다.
교단 사람들이 믿는 빛의 여신과 비슷한 존재인 마계의 마신.
빛의 여신이 신성력이라는 기적으로 자신이 선택한 이들에게만 숭배되는 것과는 달리 마신은 조금 다른 개념으로 알고 있었다.
애초에 진짜 여신도 아닌 존재와 다를 수밖에. 다만 지금 루시는 나를, 빛의 여신으로 알려진 일개 지구인과 다를 바 없는 나를 마신에 빗댄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마신은 이제 지상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제는, 이제는 개념만 남은 존재란 말이다.”
“그걸 확신합니까?”
발악하듯 소리치며 부정하던 바알도 루시의 평온한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 말대로, 확신할 수 있는 정답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 나는…….”
바알의 마음이 꺾인 것이 내 눈에 보였다. 하긴 내가 그의 상황에 마음을 대입해 봐도 답이 안 보인다.
이렇게 발악하는 자신의 패배가 생각조차 못 하던 신의 개입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는데 충격받지 않을 리가.
“마지막 마계 영주 바알. 더 이상 변수가 없다면 당신은 여기서 끝이고, 마왕을 배신한 72인의 마계 영주도 여기서 전멸합니다.”
루시가 롱기누스를 겨누고 힘을 응집시켰다. 마왕군의 공격에 다른 변이체들이 모두 묶여 버린 바알은, 저항하려는 것인지 본능적으로 마법진을 띄우고 방어 준비를 했지만 나는 결말을 알 것 같았다.
* * *
“바알은 죽었습니다. 통제를 잃고 사방에서 날뛰는 변이체들 역시 전부 토벌하는 데 시간이 걸릴 뿐, 문제는 아닙니다.”
“하긴, 네게 통제도 잃은 변이체들은 별문제도 아니겠지. 뭔가 기분이 묘하네.”
나는 화면 속 루시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지금 시간은 오전 8시. 나는 출근하지 않는 날이라 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맞으며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다.
방금 한 세상을 지배하려 했던 큰 적이 죽었다. 수많은 생명들이 죽어 나간 전쟁 끝에.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화면 속에서나 벌어진 일일 뿐이었다.
아니란 것을 아는데도, 그저 하나의 영화를 본 느낌이다.
“그래서 이제 어쩔 계획이야? 바알을 잡았지만 그 결과 마왕군의 정체를 당당하게 전세계에 공개했는데.”
“계획이 앞당겨졌을 뿐입니다. 대륙마저 전부 둥지로 만들면 ‘그들’에 대항할 수단이 더 늘어날 것이니.”
루시는 망설임이 없었다. 이미 그동안 끌어모은 무수한 데이터로 가능한 거의 모든 생물적 진화를 이룬 루시의 마왕군은, 더 이상 일개 세상 하나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루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자극을 그만두고 몸을 숨긴 것이 효과가 있는지 카르투스 사는 결국 조금 더 지켜보기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저희가 파괴한 도시를 수습하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싸우기 위해서, 여길 점령할 생각인 거지?”
루시는 이미 자신의 적을 우주 세력인 카르투스 사로 결정한 모양이다. 어떻게든 효율을 따지며, 비축하는 모든 양분은 모두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모으는 것이었다.
그런 루시에게, 한때 치열한 전쟁과 세력 다툼이 있었던 이 대륙은 그저 발판에 불과하다.
“교단 세력, 남겨 두는 게 어때.”
그래서 나는 고뇌한 끝에 루시에게 한 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제안이었다.
“쉽게 이해하기 힘듭니다.”
“간단해. 어차피 그들은 널 이기지 못해. 하지만 때로는 네게 도움을 줄 수도 있지. 마치 각성자들이 함선형 적들을 공략하는 방법을 네게 알려 줘서 이번에 수월하게 방어할 수 있었던 것처럼.”
나는 조금 생각해 봤던 내 생각을 말했다. 말 그대로 고의로 그들을 대륙 한쪽에 남겨 두는 것. 살아남은 이들은 종족, 세력 가리지 않고 그곳으로 가서 최후의 저항을 펼칠 것이다.
그리고 그 최후의 저항은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 내 제안이 전부 멸절시키겠다는 루시의 계획보다 악독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희망을 보며 살아가겠지. 이미 두 개의 세상을 먹어치운 너와 낼 수 있는 에너지 총량 자체가 다르지만, 그걸 알면서도 싸울 수밖에 없어.”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데이터가, 제게 도움이 될 것이란 말씀이진지.”
“확신하진 못해. 그냥 그렇다고 생각해 본 것뿐이야.”
루시가 과거처럼 내 말에 의존하는 단순한 상태도 아니니 나는 그저 의견을 제시할 뿐이다.
그리고 그 의도 자체는 사실 루시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교단 세력과 손잡은 이들이 영웅이 될 수도.’
싸움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 과연 루시만은 아닐 것이다.
교단 세력은 멸망한 세상의 생존자들을 하나로 규합하고 루시와 다투게 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 그들 역시 성장한다.
지구 세력 중 일부가 그들과 손을 잡은 마당이다. 그들이 성장한다는 것은 곧 우리도 성장한다는 뜻.
내가 지구의 인류 전체를 위해 마법 코드를 공개했듯 실제로 미국 역시 자신들이 대륙에서 얻은 비밀들을 세상에 공개해 다 함께 침략종에 대응하여 싸우자고 주장했다.
‘말하면 불만을 가지겠지?’
나는 이 의도는 루시에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루시는 어서 차원을 이동할 완전한 기술을 습득해 내 옆으로 오고 싶어 하고, 자신의 힘으로 우리를 지키고 싶어했다.
나는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아예 답이 없는 상황에 몰리지 않는 이상 우리의 힘으로 살아남고 저항하고 싶었다.
“분명 일리 있는 말입니다. 어차피 계획대로 마계와 대륙 대부분을 점령해 둥지로 만든다면, 변방 구석 정도는 방치해도 별 의미 없을 겁니다.”
루시는 내 의견을 긍정적으로 판단했다.
어지간하면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만, 어처구니없이 비효율적이라 판단하면 칼 같이 차단하는 루시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가능성이 높다.
“그들과 놀아 준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너무 방심하지는 말고.”
내가 생각해도 루시가 그들에게 질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사실 지금 당장 루시가 게이트와 던전에서 몰려오는 침략종들과 전투를 벌인다면, 놈들이 가지고 찔끔찔끔 풀어내는 모든 것을 꺼내 놓지 않는 이상 이길 것 같았다.
[어디 가십니까?]
“늘 그렇듯, 넌 너의 일을 하고 난 나의 일을 하는 거지.”
내가 휴대폰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루시가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 말을 걸어왔다.
루시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나름 정한 규칙이 있다. 바로 루시에게 너무 매몰되지 않는 것.
루시는 엄연히 다른 세상에서 활약 중이다. 설령 루시는 아니라고 부정해도 루시의 힘이 내 힘인 것도 아니고, 점차 뚜렷해지고 강해지는 루시의 목적이 내 목적과 동일시 될 수도 없다.
[무슨 일입니까? 제가 도울 수 있다면 당연히 돕겠습니다.]
“여러 일이지. 뭐, 밀린 청소를 한다든가, 빨래를 한다든가.”
적어도 이 조용한 집만 보면 참으로 평화롭다. 직전까지 수많은 이들의 생명을 담보로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의 대화가 아니었다.
[도울 수 있습니다.]
“이건 좀 편한 걸?”
내 옷으로 변해있던 나노·오메가가 변형하며 촉수가 되었다. 의자 등에 널브러져 있던 빨랫감을 가져와 세탁 바구니에 넣고 청소기를 잡아 알아서 돌리는 등.
나는 상상도 못했던 루시의 도움에 피식 웃었다.
무수한 군단도, 강력한 호위도 아닌 정말 아무것도 아닌 도움.
그런데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악재는 끊이질 않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튼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소식들은 사소한 행복 따위는 누릴 수 없게 만드는 참혹함뿐이다.
이제 꽤 시간이 흘렀다지만 그럼에도 적응이 되지 않는 격변.
그나마 전보다는 낫다는 반응에 동의하기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하기 힘들었다.
[불안해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한 세상을 멸망으로 몰고 갈 수 있는 마왕군이 함께합니다.]
“네가 이해할지 모르겠다, 루시. 하지만 그럼에도 말하자면 나는 네가 조금 더 다양한…… 행복을 찾았으면 해.”
루시는 용케 내 감정을 알아차리고 먼저 입을 열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성장과 진화도 좋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 성장을 지켜봐 온 내게 루시는 결코 인공지능이나 마왕 따위가 아니었다.
진짜 딸도 아니지만 마치 자라나는 자식을 바라보듯, 나는 루시가 고정된 본능 말고 다른 것을 느끼고 볼 수 있길 원했다. 마침 배신자들을 다 처단해야 한다는 마왕으로서의 사명도 전부 완수한 참이니까.
“가능할까? 네가 성장과 진화 말고 다른 것을 원하고 추구하는 것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나도 몰라.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물론 지금 당장 그것만 바라보기엔 우리 둘 다 아직 진정한 여유를 찾지 못했다. 아직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