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균열 (1)
대성녀 이벨리아, 대전쟁의 판도를 바꾼 대영웅, 여신의 뜻을 받아 영웅들을 범람하게 만든 원인, 한계를 뛰어넘은 초월자.
루시 역시 이벨리아에 대한 소식은 꾸준하게 들어왔다. 특히 그녀가 얼마나 강하고 이레귤러적인 존재인지는 더더욱.
그럼에도 그들이 지금까지 제대로 된 충돌이 없었던 이유는, 충돌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직 여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이벨리아와 루시의 목적 사이에는 연합과 마계라는 완충지대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순망치한이라 하던가. 루시가 자신의 목적 중 하나였던 마계를 무너뜨리고 이제 대륙까지 진출해 연합을 무너뜨리자 이벨리아와 루시는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새로운 데이터가 필요하긴 합니다. 다른 영웅들보다도 한 차원 위에 있다는 이벨리아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루시는 이벨리아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견제를 시작했다. 모든 판단의 근거가 되는 데이터가 필요했으니까.
현재 루시가 가진 전력으로는 이제 어지간한 영웅급 전력은 충분히 상대 가능했다. 강심을 최대한으로 장착한 가장 고성능의 상위종인 델타 타입은 출력에도 크게 밀리지 않고, 전투 경험 역시 뒤처지지 않았다.
조금 더 특출난 영웅들 역시 유리아나 김서윤 같은 특수종이 결전 병기까지 들면 맞상대 가능했다.
[이것이 대성녀의 힘. 전장의 판도를 바꾸는 진정한 강.]
그런데 이벨리아는 조금 달랐다. 전신에서 폭사하는 거대한 신성력이 폭풍이 되어 몰아치니, 덤벼들던 마왕군은 그 폭풍에 휘말려 일제히 찢겨 나가고 타 버렸다.
루시가 순간 당황하여 판단이 밀릴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일격에 수백의 병사들이 소멸하고, 남은 건 고고한 자세로 하늘에 떠 지상을 내려다보는 이벨리아뿐이었다.
“과거 보였던 모습보다 더 압도적입니다. 그녀 역시 성장의 권능을 가지고 있으니, 분명 계속해서 강해지는 것입니다.”
유리아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이 기억하던 이벨리아가 얼마나 더 강해졌는지 알려 주었다. 분명 이 정도는 될 수 없었다. 그때도 전장의 성녀였지만 다른 영웅들과 함께 빛났지 혼자서 빛나는 별은 아니었으니까.
“계속해서 강해진다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영웅들이 직접 나서는 전쟁 자체가 줄어들어 다른 영웅들의 성장은 둔화되었었지만, 이벨리아는 달라 보입니다.”
[그동안 수집한 데이터에 따르면 그들이 가진 레벨이 만능은 아닙니다. 어느 수준에 다다르면 성장이 멈추거나 성장세가 둔화됩니다. 다만, 이벨리아는 조금 다를지도 모릅니다.]
유리아는 이벨리아의 성장력을 경계했다.
마계 영주들처럼, 대전쟁의 영웅들은 대다수가 전장에 나서 싸우는 전사에서 세력을 다스리는 지배자가 되었다. 지배자가 직접 전장에 나서는 경우는 적으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성장은 전쟁의 종결과 함께 쇠퇴했다.
하지만 이벨리아는 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쟁의 선두에 서서 계속해서 싸워 왔다. 루시 역시 그 점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한 번 직접 상대해 봐야겠습니다.]
흥미가 생긴 루시는 자신의 아바타를 움직였다. 델타 타입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가장 강한 육신에 결전 병기 롱기누스를 들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동안 여러 번의 활용을 통해 데이터를 쌓고 형태를 잡아 간 새로운 시스템을 사용해 자신의 몸을 강화했다.
[추가 무장 시스템. 이것으로 출력을 더더욱 강화합니다.]
슬라임을 베이스로 만든 나노 덩어리들이 루시의 몸을 덮어갔다. 전신을 착 달라붙는 갑옷으로 두르고도 가냘프던 몸은 마치 전투 슈트를 입은 듯 육중해지고 커졌다.
강심의 출력을 늘리면 육체가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파훼하기 위해 개발한 일종의 편법. 강심의 출력은 두 배로 늘어났지만, 그 부담을 나눠 갖기에 루시는 더 큰 힘을 휘두를 수 있었다.
이렇게 무장을 통해 출력을 강화하면 마계 영주들 다수를 상대해도 문제없다는 사실을 이미 여러 번의 실험을 통해 확인한 루시는 그 즉시 이벨리아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너는 조금 특별한 것 같구나.”
이벨리아는 루시가 다가오기 전부터 그 존재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재와 연기가 자욱한 참혹한 전장의 하늘. 그곳에서 찬란한 백익을 펼친 이벨리아와 검은 중갑을 두른 루시가 마주쳤다.
* * *
‘우두머리가 분명 있다고 했다. 이놈인가?’
이벨리아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루시를 보고 경계했다. 루시가 바알에게 밝힌, 마왕에 대한 정보는 바알이 죽어 버리며 묻혔지만 그 사실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경계할 만했으니까.
마정이니 지배니 여러 가지 얽혀 있던 마계 영주들과는 달리 다른 게 마왕이 아니었다. 이벨리아의 입장에서는 마계에서 발원하여 세상을 침공하려는 존재. 그것이 곧 마왕이었다.
“큭?!”
하지만 루시는 이벨리아를 기다려 주지 않고 곧바로 공격을 가했다. 롱기누스를 겨누고 쏘아 낸 강력한 에너지 공격을 날개를 교차해 막은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루시는 굳이 이벨리아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얼굴도 검은 투구를 써서 가렸다. 지금은 서로 대화를 나누러 온 것이 아니라 전투 데이터를 얻기 위해 온 것이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 짐승이란 소리구나.”
그에 맞춰 이벨리아도 힘을 끌어올려 공세를 취했다.
하나로 뭉치는 신성한 빛. 그것은 곧 황금빛 칼날이 되어 루시를 향해 쏘아졌고, 루시는 출력을 끌어올려 방어막을 가동했다.
[출력의 증폭이…….]
그러나 루시가 그 힘을 방어하는 순간. 이벨리아가 가진 신성력의 힘이 폭발했다. 찰나의 순간 증폭한 에너지가 터져 나오며 방어막을 단번에 부숴 버린 것이다.
“아니면, 말할 수 있는데도 나와 말하기 싫다 이건가?”
“…….”
그 압도적인 힘에 루시는 순간 당황하여 이벨리아의 행동을 놓쳤다. 고작 여파만으로 산산이 부서져 떨어져 나가는 보조 무장들.
가면 역시 마찬가지라, 이벨리아는 반쯤 드러난 루시의 얼굴을 손으로 붙잡고 히죽 웃었다.
“네 정체가 뭐지?”
“말해도 당신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계를 어떻게 했지? 그곳에 사는 머저리들은.”
루시가 주변에 있던 병력을 불러들이고 롱기누스를 겨누자 이벨리아는 손을 놓고 다시 떨어져 거리를 벌렸지만 이미 자신이 이겼다는 듯 히죽이고 있었다.
반면 가면을 벗어 던진 루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직접 마주친 이벨리아의 전투력이 자신의 계산을 아득히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성장하지 못한 약자들은 도태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 마왕을 배신한 주제에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한 마계 영주 72인은 모두 죽었습니다. 모두 죽어서, 아군의 양분이 되었습니다.”
마치 자신이 강자라는 듯 구는 그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루시는 자신도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굳이 공개할 필요가 없었던 정보지만 어차피 그녀도 알고는 있을 테니.
“그들을 다 죽였다고? 마왕을 배신해? 설마.”
이벨리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맥락을 따져 보면 유추할 사실은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사력을 다해 저지하려 했던 세상의 재앙. 확실히 그것이 다시 부활했다면 배신자인 마계 영주들을 살려둘 리가 없다.
“다짜고짜 공격이라니.”
생각을 마친 이벨리아는 단숨에 공격을 시도했다. 그 판단을 내리는데까지 채 1초가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벨리아가 상대하는 상대는, 판단력이라는 면에서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빠른 존재. 자신은 물론 주변에 있던 상위종들의 동력까지 끌어 써서 중첩된 방어막을 만들어 낸 루시는 자신을 지켜 주는 병사들 뒤에서 미간을 찌푸렸다.
“내게 그 사실을 밝힌 것이 네 실수다. 내가 너희의 존재 자체를 용납할 것 같은가? 그 무엇보다 우선되는 여신의 의지는, 다름 아닌 마왕의 소멸이었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마왕이란 존재를 없애기 위해 설정된 존재. 그러니 계속 그렇게 발버둥 치십시오.”
이벨리아는 공격 태세를 갖추고 다시 공격을 시도했지만, 그녀를 비웃은 루시는 더 이상 맞상대하지 않고 몸을 피했다.
어차피 이벨리아를 직접 상대해서 죽일 생각은 없었다. 사실 죽이는 게 가능할지도 확신하지 못했으니까.
애초에 목적 자체는 이벨리아를 죽이는 게 아닌, 포함한 대륙의 생존자들이 끊임없이 저항하며 싸우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분명 그 싸움을 통해 강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루시 역시 마찬가지. 성장과 진화라는 면에서 루시는 그 누구도 자신을 따라올 수 없음을 강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보셨습니까? 저 괴물들이 우리의 새로운 적입니다. 놈들은 마왕군입니다. 그것이 확인된 이상 결코 물러설 수 없습니다.”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생긴 것만 봐도 기분이 나쁘긴 해.”
루시가 그렇게 떠나간 사이 결국 복귀한 이벨리아는 굳은 얼굴로 탄식했다.
그런 그녀의 말을 들은 리암 역시 평소와 달리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루시의 마왕군을 보고 어딘가 불안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침략종과 비슷하잖아. 기분 나쁘게.’
그 이유는 마왕군의 특성과 생김새 때문이었다. 오직 효율적인 전쟁만을 위해 만들어진 전투 생물체들로 구성된, 철저한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기계 같은 군단.
리암은 이미 그런 괴물들과 무수히 싸워 왔었다. 그렇기에 차라리 모습은 괴물 같아도 비슷한 감정을 가진 마족 군대가 나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 * *
“어때. 성과가 있어?”
[이벨리아의 힘이 예측 이상인 것은 사실이지만 애초에 그녀를 잡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닌 이상, 그녀가 본진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는 게 아니라면 별로 문제 되지는 않습니다.]
루시의 목적은 그냥 그들을 가둬 놓고 계속해서 공격하는 것이다. 마치 마계에서 전쟁을 질질 끌며 시간을 벌었을 때처럼. 내가 제안한 것도 그것이었다.
그 지루한 소모전을 통해 얻을 게 있다는 건 이미 경험해서 알고 있었으니까.
“나도 정보를 하나 건졌지.”
루시가 활동하는 사이 나 역시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최근 마왕군을 운영하는 데 문제가 있다던 강심 수급 방법에 대해서 방법을 찾아보던 중, 무언가 발견했기 때문이다.
“침략종 중 하나인 데스위저드. 놈이 가진 힘은 에너지의 형태를 바꾸는 거라고 하던데.”
[흥미로운 결과입니다.]
나는 알아본 자료를 루시에게 알려 주었다. 최근 새롭게 등장한 상급종 중 하나인 데스위저드.
6개의 손을 달고서는 검은 로브를 걸친 비쩍 마른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이 괴물은, 촉수를 뻗어 흡수한 양분으로 마법 공격을 시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마르지 않는 화력.
그 힘에서 나는 루시가 원하던 실마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저기가 북미 대륙인데 이지연은 더 이상 해외로 나가지 않을 거란 말이지. 그래서 우리끼리 몰래 갔다 와야 해. 태평양을 건너야 하는데, 할 수 있을까?”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번에는 정체를 숨기고 그냥 혼자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만, 루시는 역시 가능하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