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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172화 (172/200)

172화 균열 (2)

“휴, 휴가가 필요하다고?”

“그래. 상부에 보고하기 전에 먼저 말해 주려고.”

나는 이지연에게 며칠 쉬겠다고 통보했다. 처음 있는 일이라 그녀가 당황한 게 보였지만 사실 휴가를 신청하는 건 내 권리다. 그동안 안 썼을 뿐이다.

“그냥 며칠 쉬는 것뿐이야.”

“으응, 그렇지.”

그녀가 반대할 리 없으니, 통보 자체는 수월하게 넘어갔다. 남은 건 상부에 보고해서 휴가를 얻는 일. 이것 역시 마찬가지로 손쉽게 처리되었다. 애초에 중요 인물은 이지연이지 나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태평양을 횡단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비행기를 타는 것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에너지 소모도 큽니다. 시간이 더 걸려도 괜찮습니까?]

“되도록이면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 그래.”

루시는 비행기를 타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비행기를 타지 않고 직접 날아서 그곳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과는 달랐다. 말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불법을 저지르는 일. 혹시 모를 일말의 꼬투리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계획을 실행합니다. 예상 비행 시간은 45시간입니다.]

“후.”

결국 나는 하늘을 날아서 태평양을 건너게 되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빌라 옥상으로 올라온 내 몸을, 꿈틀거리는 검은 액체가 덮어 간다.

곧 나노·오메가는 내 전신을 덮게 되었다. 이 나노·오메가 역시 과거와는 달리 더 많은 진화를 이루게 되었다.

더 효율적이고 강력한 증식과 압축. 그 힘으로 전신을 덮은 나는, 날개까지 꺼내 들고 강심을 빛내며 단숨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발아래에 깔리는 도시가 작아지고 멀어질 때까지, 구름을 넘어서 더 푸른 하늘 위로.

곧 내 몸이 위장하여 은신하게 되고 루시는 나노·오메가를 조종하여 빠른 속도로 한 곳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나 좀 잔다?”

나는 몸의 긴장을 완전히 풀고 힘을 뺐다. 어차피 내 몸은 전신을 덮은 슈트가 알아서 조종하니까. 도착했을 때를 대비해 나는 그냥 대놓고 쉬려 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이동은 순조롭습니다].

현 시대의 어설픈 자율 주행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성능을 가진 루시는, 내가 그렇게 힘을 빼도 몸을 완벽하게 통제했다.

[창현 님, 이제 곧 도착합니다. 예상시간보다 5시간 12분 앞서 도착했습니다.]

“나름 빨리 도착한 것 같은데.”

그리고 그렇게 잠들었다 깼다가를 반복하며 날아 온 것이 꼬박 이틀, 나는 끝내 바다를 건너 그 반대편 대륙에 도착했다.

* * *

“국제 기구에서 각성자들을 모집하고 있었지. 데스위저드를 잡기 위해 고위 각성자들을 모아서 토벌 작전을 시행하기 위해.”

은밀히 바다를 건너 지상으로 내려와 몸을 숨긴 이 넓은 숲은 북미 대륙에 위치한 한 국립공원이다. 우리의 목적은 이곳에 열린 던전. 그리고 그 던전 안에 있는 괴물이다.

현지 정부는 던전 안에 출몰한 신종 상급종을 처리하기 위해 연합 기구에 각성자들을 파견해 달라 요청했다. 내가 언론에도 공개되지 않은 이곳의 정체를 알게 된 이유 역시 그들이 보낸 공문을 이지연의 계정을 통해 엿보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지금 그곳은 경계 병력들이 주둔하여 그 주변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내 계획은 몰래 그곳에 들어가서, 루시와 함께 던전 내부의 적들을 쓸어버리고 목표물인 데스위저드를 루시에게 전송하는 것이었다.

“몰래 들어가는 거, 가능하지?”

[충분히 가능합니다.]

위장 능력까지 계속해서 발휘하며 조심스레 몸을 움직인 나는 던전이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넓은 국립공원 한가운데 등장한 던전의 크기는 커다란 트럭만 한 크기. 그리고 그 주변을 무장한 군대가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이제부터 저곳에 몰래 들어가야 한다. 혹시 몰라 루시에게 물었지만 루시는 당연히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변수가 없다는 가정 하에 가능합니다.]

“미식별 움직임 반응!”

“적이다!”

“…….”

문제는 일반적인 계산 결과를 뛰어넘는 변수가 상대에게 있다는 것. 각성자로 보이는 한 여자가 다급히 뛰어나와 소리치니 군인들이 기겁하며 총을 들고 사방을 겨누었다.

[탐지 계열 능력을 가진 각성자 같습니다. 아군의 위장을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잖아. 정면으로 돌파하자.”

그들이 정확히 우리 위치를 특정하고 기관포와 포신까지 겨누니 더 이상 몸을 숨기는 건 의미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만, 지금은 우리도 힘을 쓰는 수밖에.

[전투 개시.]

루시는 단숨에 몸을 드러내고 여기저기 박혀있는 강심들을 빛내며 그 힘을 끌어올렸다.

그들은 내 모습을 보고 기겁하며 총을 쏘기 시작했지만,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 그 총탄들은 내 몸 주위를 둘러친 방어막을 뚫지 못했다.

그나마 위협적인 건 우리가 제공한 마법 코드로 만든 마도 병기 정도. 물론 우리가 준 것에 우리가 당할 리가 없다.

“해, 해치면 안 돼.”

[알고 있습니다. 비살상 전투 개시.]

그들은 내가 돌진하자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고 넘어졌지만 나는 루시에게 그들을 해치지 말라 지시했다.

루시 역시 단숨에 방어선을 돌파하면서도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애초에 일반적인 군인들으 굳이 상처 입힐 정도로 방해가 되지도 않았다.

“괴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문제는 군인들과 함께 이곳을 지키고 있던 각성자였다.

그리 급이 높아 보이지도 않지만 이 수염 덥수룩한 중년의 백인 아저씨는 쿵쿵거리며 달려오더니 손에 든 도끼를 휘둘렀다.

자신의 힘이 밀린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덤벼드니, 이러면 손대지 않고 제압하는 것도 곤란해진다.

“어쩔 수 없다, 루시.”

[제압하겠습니다.]

쓰게 웃은 나는 그를 제압해야만 했다. 명령을 수신한 루시는 단숨에 그의 팔을 움켜쥐고, 그대로 저 멀리 던져 날려 버렸다.

“마, 막아! 던전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즉시 몸을 날려 던전 안으로 진입했다. 그들은 막아보려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공간의 균열을 통과하자마자 사라진 소음들.

눈앞에 펼쳐진 풍경 역시 단번에 바뀌었다.

“움직이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적지 않은 마력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던전 내부는 베이스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야생 그 자체였다. 생명은 찾아 볼 수 없는 짙은 먹구름 아래 황무지. 그 너머에 우리의 적이 자신의 병사들과 함께 대기하는 중이다.

현지 정부가 국제 기구에 도움을 청할 정도로 급이 높은 던전이고, 상대도 그만큼 강하다.

그런 곳에 나는 지금 단신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니다. 남들이 보면 하나의 군단에 혼자서 덤벼든 무식한 놈으로 보겠지만 지금의 나 역시 나만의 군단이 있었다.

“이제 나와 루시, 지금까지 성장해 온 것, 다 이런 때를 위해서잖아.”

[그렇습니다. 차원문 개방.]

놈들이 나를 발견하고 움직이기 시작할 때. 나는 루시에게 지시해 병력을 꺼내 놓으라 말했다.

동시에 루시는 내 말대로 불완전한 차원문을 개방하고 자신의 병사들을 내 눈앞에 꺼내 놓았다. 지금까지 벌여 온 그 수많은 사투, 전쟁. 그 결실들이 내 앞에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 * *

“…….”

상급종 데스위저드. 던전에 배치된 보스답게, 그 어떠한 침입자가 오든 상대하여 척살하는 것이 그 의무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감히 이곳을 공격해 오는 적들에게 반격을 시도했다.

게다가 이번에 쳐들어 온 적은 고작 하나였다. 이러면 굳이 힘을 뺄 필요도 없었다. 이곳을 정탐하기 위해 헬기를 끌고 왔던 이들처럼 약간 겁만 주면 그대로 도주할 테니까.

그러나 그 예상은 머지않아 빗나갔다. 혼자서 이곳으로 오고 있는 적이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접근해 왔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봐줄 이유가 없다. 데스위저드는 병력을 돌진시켰다. 고작 하나라지만 철저하게 짓밟아 부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때, 분명 혼자였던 적이 엄청난 숫자의 병력들을 소환해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상급종 데스 위저드를 제외한다면 모두 데이터가 있는 적들입니다. 예상 승률 67%. 병력을 추가로 투입한다면 예상 승률은 85%입니다.]

루시는 자신이 지휘하는 마왕군이 적들과 충돌하자마자 예상 승률을 계산했다.

덩치에서도 숫자에서도 밀리지 않는 마왕군이 돌진해 오자 곧 두 군단이 정면에서 충돌하고, 더 강하고 큰 병력을 투입한 마왕군에게 침략종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변수는 하나뿐이었다. 신종 상급종 데스위저드. 놈은 자신이 직접 나서 마왕군을 상대하기 위해 힘을 움직였다.

“저게 저놈의 힘이야.”

그는 놈이 자신의 몸에서 뿜어낸 촉수로 쓰러진 시체들에 박아 넣더니 그 양분을 흡수하여 마력으로 치환하는 모습을 보고 루시에게 말했다.

치환된 마력은 곧 강력한 살상기가 되어 마왕군을 향해 뿜어졌다. 루시는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던 상위종들을 이용해 그 포격을 막아 내었다.

“그렇다면 반드시 얻어야겠습니다.”

“그, 그렇지.”

그는 자신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루시를 보고 흠칫했다. 자신의 아바타를 직접 움직인 루시는 붉은 광석으로 이루어진 쌍날 검, 롱기누스를 들고 어지간한 존재는 막아 내지 못하는 강력한 에너지를 적에게 폭사했다.

“마계로 가서 마무리하는 게 맞지 않아?”

“여기까지 왔으니, 굳이 넘어갈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여기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는 루시가 데스위저드를 데려갈 줄 알았지만 어째서인지 루시는 이곳에서 끝장을 보려고 했다.

“견뎠다?”

게다가 놈은 루시가 폭사한 공격을 견뎌 내었다. 비록 그 주변에 있던 다른 적들은 흔적도 찾을 수 없이 소멸했지만.

루시는 재밌다는 듯 피식 웃더니 직접 놈에게 접근해 무기를 휘둘렀다.

“대체 너희들의 주인은 누구지?”

루시는 자신의 검을 가까스로 막아 낸 이 괴물을 보고 중얼거렸다.

싸우면 싸울수록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감염체나 변이체 같은 이들과도 싸워 왔지만, 침략종과 싸울 때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그 점이 마치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에 신경이 쓰였다.

“…….”

데스위저드는 루시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발성 기관이 없었다.

전투에 필요하지 않으니, 제거한 것이다. 마치 마왕군 병사들처럼.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요.”

루시는 롱기누스를 휘둘러 마지막 발악을 시도하는 적의 몸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어차피 침략종 역시 자신의 적이다. 계속해서 싸우다 보면 그 비밀을 알게 될 터.

그때까지 굳이 공들여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잡은 건가!?”

“그렇습니다. 남은 잔당들을 소탕하는 것 역시 몇 분이면 끝납니다.”

“잘했어.”

얼굴만 나노·오메가를 벗은 그가 반색하여 루시의 곁으로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그를 본 루시가 평소의 딱딱한 표정을 풀고 지연스럽고 희미하게 웃었다.

굳이 적을 둥지로 전송하지 않고 자신의 아바타를 직접 움직인 이유는, 사실 조금 사소하고 가벼웠다.

마음이야 늘 같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것에 차이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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