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균열 (4)
“오, 온다! 괴물들이 온다!”
“이런 미친! 전부 뛰어!”
대륙 북부 변방의 조용하던 시골 마을, 그러나 지금은 조용하지 않았다.
서둘러 피난 준비를 하던 그들을 적들이 습격했기 때문이다. 적들은 끔찍하게 변이한 몸을 기괴하게 비틀며 안광을 번득이고 타액을 질질 흘리는 변이체들.
바알의 죽음 이후 통제를 잃고 날뛰며 본능대로 날뛰는 변이체들은 마왕군을 피해 밀려나며 안 그래도 힘든 현지인들을 더 힘들게 만드는 원흉들이었다.
“어서 뛰게! 막을 수 없다고!”
“안 돼! 세라!”
촌장은 주민들을 다그쳤다. 하지만 평범한 일반인들이 다수인 그들이 미쳐 날뛰는 괴물들에게서 벗어나는 게 쉬울 리 없다.
낙오되는 이들부터 하나씩 괴물들에게 사냥당했다.
그 날카로운 손톱에, 칼에, 이빨에 사지가 찢겨 나가고 목이 베였다.
“히이익…… 아아악!”
게다가 재수 없이 사로잡힌다면 일격에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다.
변이체들이 내뿜는 증기를 들이마신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변이를 일으켜 또다른 괴물이 되었다.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가족이나 동료를 죽이려 들고 자신과 똑같은 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지옥인가?’
촌장 루카스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지옥,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마왕군과 벌이던 대전쟁도 겪어 보았고 교단과 연합의 싸움도 겪어 보았다.
그런데도 단언컨데 지금처럼 끔찍한 적이 없었다. 그 어떤 때도 느껴보지 못한 절망감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이름을 날리던 영웅들마저 무너진 진짜 재난이었다.
“안 돼!”
곧 루카스가 있던 곧까지 놈들이 몰려왔다. 그의 곁에 있던 이들은 최후를 직감하곤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루카스도 마찬가지였다.
“어?”
그때 그의 예상과는 다른 일이 펼쳐졌다. 단숨에 자신을 죽이려던 적의 몸에 어디선가 날아 온 굵직한 창이 관통한 것이다.
“쳐라. 변이한 괴물들이다!”
한 무리의 기사들이 다급히 달려와 습격당하던 마을 주민들을 구했다. 전투를 반복한 것인지, 계속 달려 온 것인지 그들의 상태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변이체들을 공격했다.
“이 괴물 놈들이!”
크리스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영주가 자신의 영지를 버리고 도주한 이후 결국 기사단과 함께 도시를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 것이다.
“크리스! 뒤다!”
“큭.”
크리스를 비롯한 기사들은 수십에 달하고, 지금도 그 숫자가 계속해서 늘어나는 변이체들과 전력으로 싸웠다.
이미 체력적으로 한계였지만 꼭 사람들을 구해야 했다. 단순히 목숨을 구한다는 의미 외에도 미래에 변이체가 될 이들을 구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대체 언제까지.’
검을 휘둘러 변이체 하나를 베어 죽인 그가 이를 악물었다.
가장 절망적인 것은 이것이 끝이 아니란 것이다. 변이체들도 결국은 자신들이 있던 곳에서 쫓겨나 자꾸만 변경으로 몰리는 것일 뿐.
진짜배기 거악은 이미 대륙 대부분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숙여! 마법이다!”
기사들이 힘들어하던 그 순간, 폭사한 마법이 달려들던 적들에게 꽂혔다. 파편과 열기에 얼굴을 찌푸린 크리스는 마법을 시전한 사람을 보았다.
홀연히 사라졌다 최근 다시 돌아온 유리아. 그녀의 마법이 아니었다면 기사단은 피난민들과 함께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끄, 끝났나.”
“안심하진 말라고. 언제 또 올지 모르니.”
곧 모든 적들이 제압당해 사살당했다. 반수나마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은 주저앉아 오열했고 지쳐 버린 기사들 역시 숨을 고르며 잠시 전력을 정비했다.
“갈수록 변이체들이 많아지고 있어, 크리스.”
“어쩔 수 없습니다. 결국 놈들도 쫓겨난 것이니까.”
유리아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그 말에 탄식한 크리스는 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사실 지금도 지체할 틈이 없었다.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 교단 세력과 합류해야 했으니까.
“그리 멀지 않습니다. 교단과 협력하면 됩니다.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
크리스는 물론 다른 모든 이들까지 아포칼립스 그 자체인 지금 상황에서 오직 교단과의 합류,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교단은 변이체들이 폭주하고 마왕군이 그 세력을 늘려 가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무조건적으로 피난민들을 받고 있었으니까.
이전부터 주장하던 개종이나 믿음의 강요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이벨리아를 필두로 한 교단의 지배층 역시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인지한 덕이다.
“어서 이동하죠. 단장이 이동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때 그들에게 나안이 다가왔다. 공식적으로는 엘프들 역시 변이체의 출현 이후 점령지를 버리고 대수림으로 돌아갔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돌아간 것은 맞지만 도망친 건 아니었다. 뭣도 모르는 변이체 일부가 대수림까지 넘보긴 했지만 이미 마왕군이 점령한 그곳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뿐이었다.
‘도착해도 문제다. 앞으로 이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 것인지, 과연 우리가 그 거대한 군단에 저항할 수 있을지.’
다시 이동을 시작한 크리스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마왕군이 얼마나 강성한지 그 편린을 본 자들이라면 자연스럽게 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나아.’
유리아 역시 그런 동생의 모습을 보며 마냥 편하게 마음을 먹긴 힘들었다. 다만 그녀에겐 크리스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으니, 차라리 이 상황을 좋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루시가 교단 세력을 비롯한 생존자들을 굳이 멸절시키지 않고 대륙 구석에 방치하기로 결정한 순간 유리아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들 내부에서 첩자로 활동하며 데이터를 수집하는 일로 지금까지 하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록 계속해서 크리스를 비롯한 주변인들을 속여먹게 되겠지만, 그게 선봉에 서서 그들을 다 죽여 버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러니 그녀는 그렇게 거짓말을 해서라도 그들의 마음을 지켜 주고 싶었다.
“뒤에 변이체들이 또 따라붙었다. 모두 속도를 올리시오! 놈들의 숫자가 수백 이상이니 맞서는 건 불가능하오!”
“이런 제길! 모두 힘을 쥐어짜시오! 앞으로 사흘은 더 걸어야 하오!”
먼 곳까지 살피던 정찰병이 다급히 소식을 알려온 것도 그때였다.
수많은 피난민들과 함께 그들은 쫓아오는 괴물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행군 속도를 더 올렸다.
* * *
“저기! 피난민들이 또 옵니다.”
“하지만 그 뒤에 또 괴물들이!”
크리스와 유리아가 속한 무리가 피난민들을 흡수하며 힘겹게 걸음을 옮겨 도달한 이곳은 교단 세력이 사수하고 있는 경계 지역.
그들은 이곳에서 저 멀리 다가오고 있는 피난민 무리를 보고 서둘러 무장을 꺼냈다.
“상부 명령이다. 피난민들을 구출하라!”
성기사나 사제는 물론 민병대까지 섞인 그들은, 무리의 뒤를 쫓는 변이체들을 보고 다급히 튀어 나가야 했다.
“바람 잘 날이 없구만.”
그런데 그들 중 특별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다른 이들과는 차림새부터 다른 그는, 선글라스를 쓴 금발의 사내.
리암은 검을 빗겨 들고 달려 나가 비명을 지르며 달리는 피난민들을 역으로 지나쳤다.
여기까지 오면서 계속 싸우느라 완전히 탈진한 크리스와 그런 그를 부축하던 유리아까지 지나친 리암은, 마력이 불타오르는 검을 뽑아들고 휘두르며 단숨에 변이체들을 토막 내고 절단해 버렸다.
[이제 이런 괴물들로는 기별이 안 오는군.]
“하!”
그럴 때마다 성장의 권능도 없는 그는 자신의 힘이 조금씩 늘어남을 느꼈지만, 이제는 그것도 힘들다는 목소리가 머리에 울리자 코웃음을 쳤다.
“이런 미친 괴물들로도 부족하면 대체 누굴 잡으란 거지?”
[알고 있지 않나? 인간이 변이하고 폭주할 뿐인 이 괴물들보다 더 강하고 폭력적인 존재들을.]
착실히 그의 성장을 도와준 성좌는 이번에도 그를 부추겼다.
변이체들을 따위로 만들 수 있는 더 강하고, 더 무서운 적들. 이미 그들을 알고 있던 리암은 탄식했다.
“대성녀 이벨리아도 어쩌지 못하는 게 그 괴물들이다. 그런데 내가 대체 어쩌라고?”
[네가 혼자서 그 모든 적들을 죽이는 게 가능하기나 하겠나. 그저 저항하고 발버둥 치라는 것뿐이다. 지금처럼. 그러면 언젠가 길이 보일 테니.]
리암의 냉소에 말해 주던 성좌 역시 냉소로 답했다.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성좌의 조언대로 해서 손해 본 적은 없던 리암은 이번에도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대체 정체가 뭐냐고 묻고 싶은 입은 달싹거렸지만 끝내 말을 꺼내진 못했다.
‘못 버틸 것 같은데. 나도 잘 모르겠군.’
게임 어플의 주인인 마리사를 통해 지구에서도 계속해서 지원을 보내고 있다.
굳이 리암처럼 특수한 성좌와 계약한 것이 아니더라도, 지구에서 온 각성자들은 능숙한 전사들이 넘쳐나는 이곳에서 제대로 된 전투를 훈련받고 기술을 전수받으며 강해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부족하다. 변이체들을 상대로 단숨에 승리를 거둔 마왕군의 위상은 이미 그 정도까지 올라왔다.
* * *
[리암 앤더슨이 대륙 북부 폴라스 지방에서 목격되었습니다.]
물론 그 마왕군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루시 역시 리암을 비롯한 이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지금도 유리아의 눈을 통해 관측한 리암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추적하는 중이었다.
“주워듣기로 꽤 많이 넘어갔다고 들었는데, 크게 달라질 게 있을까?”
[리암 같은 일부의 경우를 제외한 대다수의 각성자들은 아직 영웅급에도 들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경험이니 어떻게 성장할지는 모릅니다.]
루시는 각성자들에 대해 냉정히 평가했다. 솔직히 말해서, 루시에게 경계되는 각성자는 리암 정도가 아니면 없었다.
나머지는 휩쓸리듯 쓸려 나갈 수 있었으니까.
“그럼 내버려 두는 거지? 딱히 저격한다거나 하진 않고.”
[흥미가 가는 건 사실입니다. 현재 대부분의 성장 원리를 습득했는데도 아직 그들의 힘은 미지의 영역입니다.]
루시는 각성자들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마법, 심법, 검술 등등 다양한 전투법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사하는 게 가능했으니까.
서큐버스가 가지고 있는 매혹의 마안 같은 기술은 특정 신체 부위를 복제하는 것으로 복사하고 마법 같은 것은 고문을 통해 그 방법을 배웠다.
하지만 각성자들이 가진 힘은 복제하는 게 불가능했다. 상태창이라는 기묘한 법칙을 통해 힘을 행사하는 그들은 특별한 신체 부위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스스로도 그 원리를 모르고 힘을 사용한 탓이다.
[김서윤을 분석해도 알지 못한 그 힘, 계속해서 전투를 시켜 데이터를 추출한다면 뭔가 얻는 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으음, 되도록 안 죽였으면 좋겠는데. 그들이 죽기 살기로 덤비려나.”
루시는 그들에게서 데이터를 얻고 싶어 했다. 창현은 지구로 귀환해서 중요한 전력이 되어줄 그들을 잃는 것이 탐탁찮았지만, 그들보다 자신이 더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 루시를 뜯어 말릴 정도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