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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175화 (175/200)

175화 균열 (5)

“일이라니, 그게 대체 뭔데? 위에서 뭐 시켰어?”

“강제로 시켰다기보다는, 내가 답답해서. 별거 아니야.”

굳이 만나면 말해 주겠다고 사족을 단 이지연은, 결국 다시 얼굴을 본 지 일주일 만에 웃으며 말을 해 주었다.

그녀가 말한 일은 결국 싸우는 일. 다만 내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협회장님이 자꾸 해 보는 게 어떠냐고 하셔서, 해 보기로 했어.”

“훨씬 낫겠네. 괴물들이랑 싸울 바에는 사람이랑 싸우고 봐주는 게.”

나는 피식 웃었다. 협회장 백승철이 그녀에게 부탁한 것은, 다름 아닌 각성자 아카데미에서 신참 각성자들의 전투 수련을 도와 달라는 것.

협회장이 꽤 좋은 방법을 찾아냈다. 안 그래도 몸이 달아 있던 그녀에게 적당히 당근을 주면서도 위험한 곳으로 파견하지는 않는, 적절한 방법이었다.

“괜찮겠지? 이 일을 수락하면 더 이상 던전 같은 곳은 다니기 힘들어서 거부하려 했는데, 보니까 이제 필요 없는 것 같아서.”

“그런 셈이지.”

그녀가 내 눈치를 보기에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내가 그동안 그녀를 이용해서 필요한 던전이나 게이트에 들어가 원하는 표본을 얻어 와서 그것을 신경 쓴 것이다.

다만 이번에 내가 혼자 북미 대륙까지 건너가 던전에 갔다 오니 이제 더 이상 걸릴 게 없다는 뜻이었다.

‘이게 낫다.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그녀가 위험한 현장에 다니는 것보다 이게 낫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내게 자신의 과거를 말하던 때의 그녀는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현장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다녔고 굉장히 불안해 보였으니까.

그런 모습이 사라졌다는 것만으로 나는 만족했다. 이제 더 이상 그녀를 방패막이 삼아 움직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효율적으로 생각한다면 나는 이제 그녀의 매니저를 그만두는 것이 맞다. 애초에 내가 그녀와 붙어서 함께 일한 것도 다 그것을 원해서 그런 것이니까.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그녀가 변한 만큼 나도 변했다. 이 변화는 루시와는 별로 상관없는 변화였다.

[심장 박동이 빨라집니다. 혹시 심장병과 관련된 의심을 해 보시는 것이].

웅웅거리는 진동과 함께 메시지를 띠워 헛소리를 하는 루시의 반응을 보니, 내가 헷갈리는 것도 아니었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이지연은 신경 쓰지 마. 그녀는 너와 경쟁 상대가 될 수 없어. 본질이 다르니까. 너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

이지연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휴대폰을 든 나는 쓰게 웃으며 그것을 통해 루시에게 말을 전했다.

[물론입니다.]

루시는 대답은 잘만 했다. 다만 나는 그것이 진심인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거짓말을 잘 못한다 해도, 자신의 진심을 숨기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으니.

“대륙 상황은 어떻지. 그대로인가? 작업은 네가 원하는 대로 되어 가고?”

[그렇습니다. 현재 모든 지역에서 원하는 작업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대신 루시의 사고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고의로 질문을 했다. 그 질문에 맞춰 루시는 화면을 돌리고 설명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 * *

[변이체들의 숫자는 아직 많습니다. 특유의 번식력으로 제대로 된 집계나 추측조차 불가능한 그 괴물들은 아군의 둥지에서 밀려나 변방 지역으로 도주하고, 그렇게 도주한 변이체들이 현지인들을 다그치는 채찍이 되어 그들을 더 빨리 피난하게 만들었습니다.]

바알이 남긴 유산, 참 더러운 유산 변이체. 루시가 공격하기도 전에 이미 대륙 절반을 작살 내 놓은 그 괴물들은 통제를 잃은 이후 마왕군을 이길 수 없다. 본인들도 그걸 아는지 루시의 마왕군에는 덤비지 않고 만만한 현지인들을 습격해 꾸준히 괴롭히는 중이었다.

“징글징글하긴 하네. 감염체들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나는 혀를 찼다. 만약 변이체 같은 괴물이 이곳 지구에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 약간만 접촉해도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증기가 퍼지고, 그렇게 변이한 사람들이 미쳐 날뛰며 주변을 공격한다면.

라비즈다의 타락 세계수와 감염체들은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들기라도 했지, 저놈들은 불리하면 도망치고 피해 갈 줄도 아는 놈들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인구 밀도가 저곳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이곳에 저런 저주가 퍼진다면 이 세상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저런 괴물들을 만들어 냈는지 모르겠네. 그 마정이란 물건, 조사는 아직 덜 끝난 거야?”

[조사 자체는 끝났습니다.]

루시가 보석 하나를 보여 주었다. 바알이 인간 황제에게 강제로 박아 넣어 폭주시켜, 변이체라는 괴물들을 만들어 낸 자줏빛 보석.

마왕의 상징이자 증표인 그것은 상당한 고농도의 힘을 품고 있는 일종의 신물이었다.

[그 원리가 강심과 비슷합니다. 착용자의 힘을 급격히 강화하고 특수한 성질을 부여해 줍니다.]

“마왕의 상징이라며. 너는 이용하지 않을 건가?”

[약간의 가공으로 또 하나의 전략 병기를 탄생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왕이라 불리고 있지만, 배신자들을 척살하여 그 복수를 이룬 이후 루시는 딱히 마왕 자리에 집착하지 않고 있다.

그런 루시에게 마정은 그저 많은 힘을 품고 있는 도구일 뿐. 유산으로 내려오던 드래곤의 심장을 가공해 궁니르라는 전략 병기를 만들었던 루시는 이 마정까지도 자신의 병기로 써먹을 생각이었다.

“누구에게 줄 건데? 유리아인가? 나안? 라온? 아니면 역시 돌려쓰나?”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쌍날 검이나 랜스 등 무장의 형태를 하고 있는 다른 병기들과는 다른 종류이기에 사용자의 기량이 중요하다 생각됩니다.]

막대한 출력을 보조할 수 있는 전략 병기의 강점은, 누구나 돌려쓸 수 있다는 점. 실제로 루시는 공들여 만든 자신의 아바타가 아닌 일개 상위종의 몸으로도 그것을 사용하기도 했다.

[일단은, 주민들의 피난 유도부터 완수하겠습니다.]

루시는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시선을 돌렸다.

치열하고 처절한 전쟁과 전투. 여기도 드물지 않았지만 저곳에서는 말 그대로 끊이지 않고 벌어지는 중이다.

* * *

“어서 이쪽으로.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창 사람들의 대피가 이루어지고 있는 경계 부근. 한 무리의 사람들을 데려 온 사내는 교단 측 병력을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남아 있는 사람들?”

그 말에 반응한 사람은 건장한 체구의 남성이었다. 다만 그는 차림새가 다른 교단 사람들과는 좀 달랐다.

“원래 이들과 함께 오다가, 근처 요새에 낙오한 사람들 같습니다, 에단 님.”

“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의 이름은 에단. 지구에서 온 각성자였다. 그는 낙오자들 소리를 듣고서는 그들을 구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함께 움직이던 성기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에단 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을 습격한 변이체들은 수십 이상. 만약 그들이 전부 당했다면 지금은 그들을 먹어치우고 그 숫자가 수백으로 불어났을 겁니다. 우리끼리만 급히 달려가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늘어난 괴물들이 이곳까지 공격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지금 가야 합니다.”

리암을 포함한 다른 각성자들처럼 교단 세력을 돕기 위해 이곳에 파견된 에단은 조금 더 진심이었다. 평소에도 앞장서서 적들과 싸우고 사람들을 지키던 그는 영웅이라 불리던 사람이다.

이곳에서도 그 영웅 정신은 어디가지 않았다. 파견된 것은 개인의 수련을 비롯한 정부의 은밀한 설득도 있었지만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말이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평소에도 자주 충돌하던 리암과의 라이벌리는 덤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오. 갑시다. 최소한 그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라도 판단할 수 있게.”

현장을 지휘하던 지휘관인 성기사단장 루소가 에단의 말에 공감했다.

변이체들에게 당하는 이들을 방치하면, 그들은 곧 또다른 괴물이 되어 자신들을 공격해 오니까.

“가자!”

곧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몰아 사람들이 고립되어 있다는 요새로 달렸다. 그들이 멀쩡히 버티는데 성공했다면 충분히 구출 가능한 전력이었다.

“저기다!”

“이런, 늦었나!”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요새는, 이미 함락 직전이다. 성벽 앞에는 변이체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지만 놈들은 기어이 손톱을 벽에 박아 넣고 기어올라 내부에서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이놈들.’

에단은 곧장 자신의 활을 꺼내 섬광에 맞먹는 화살을 날려 변이체들을 저격했다.

함께 온 다른 성기사들도 각자의 무기를 빼들고 미쳐 날뛰는 괴물들을 상대하며 절체절명이던 사람들을 구해 내는 데 성공했다.

‘왜 이렇게 필사적이지? 이쯤 되면 도주해야 하는데.’

다만 놈들을 상대하던 에단은 뭔가 어색함을 느꼈다. 바알의 통제를 잃은 이후 압도적인 힘을 보여 주면 끝까지 들이박기보다는 일단 도주하는 것이 변이체들의 패턴이 되었지만, 이번에는 마치 바알이 통제하던 시절처럼 무작정 앞으로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저, 저건!”

“놈들이다. 흑철충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머지않아 밝혀졌다.

변이체들의 뒤에서 나타나 광선포로 놈들을 전부 쏴 죽인 한 무리의 괴물들이 또다시 나타났다. 에단은 누군가의 외침에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고 이를 악물었다.

변이체를 날뛰는 짐승 따위로 만들어 버리는 진정한 괴물, 진정한 적.

검은 갑주를 입은 그들은, 언제 여기까지 추격해 왔는지 다시 한 번 광선포를 들어 에너지를 응축해 쏘아 내었다. 이번에는 변이체들이 아닌 인간들을 향해 쏜 것이었다.

“먼저 대피하십시오.”

에단이 앞으로 나서서 힘을 끌어올렸다. 그의 활에서 뿜어진 여러 갈래의 화살이 광선포를 요격하고 막아 낸 것이다.

[에단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루시 역시 지구에서 온 에단의 모습을 확인하고 그에 맞는 전력을 출격 시켰다.

네 개의 팔에 네 자루의 검을 들고 있는 상위종 트롤·델타.

현지인들을 몰아넣어 한 곳으로 계속해서 밀어 넣고 있는 루시는 기꺼이 에단의 도전을 받아 주었다.

“큭…….”

에단은 거칠게 달려들어 검을 휘두르는 트롤·감마의 일격에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 역시 나름 손에 꼽는 각성자니 단순한 1 대 1 대결이라면 모른다. 다만 트롤·델타는 다른 병사들과 함께 협공을 펼쳐 에단을 압박했다.

“사람들은 모두 대피했습니다. 일단 피하십시오!”

그런 와중에 요새에서 버티던 이들은 모두 대피했다.

먼저 도주해야 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에단이 이를 악물었지만, 루시는 그가 먼저 포기할 수 있도록 더 거세게 몰아붙였다.

[지금 도망치지 않는다면 죽입니다.]

그리고 그 경고도 한 번이 전부였다.

만약 에단이 끝까지 덤비고자 한다면 루시는 망설임 없이 그를 죽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전투 승리. 현재까지 75%에 달하는 이들이 도주를 완료했습니다.]

어차피 목적을 이룬 마왕군은 도망가는 그들의 뒤를 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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