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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176화 (176/200)

176화 균열 (6)

“슬슬 지겨워지는군.”

[맞아. 솔직히 여기, 아무것도 없잖아. 금방이라도 무슨 일 벌어질 것 같더니.]

루시가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그동안 나뉘어 있던 전선을 정리하고 마계 쪽 일에 집중하던 그때.

타락 세계수들의 영토를 완전히 정리한 라비즈다의 마왕군은 활동을 멈추고 양분을 비축하며 경계 태세만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 먼저 공격을 시도해서 큰 피해까지 입혔지만 상대는 반격해 오지 않고, 그저 방어 태세만 더 강화할 뿐.

그곳에 대기하던 라온은 나름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었지만, 이제 슬슬 몸이 답답해지던 참이었다. 그와 계약한 땅의 정령 티타니아는 루시의 지휘가 없다면 빈 깡통이나 다름없는 마왕군을 보며 대놓고 불만을 표출할 정도였다.

‘대체 무엇을 경계하는 건지.’

라온은 아직도 루시가 무엇을 경계하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다크엘프 생존자들과 카르투스의 직원들은 그동안 루시가 상대해 온 적들에 비하면 그리 강해 보이지 않았으니까.

물론 그들이 가진 에테르 병기는 지구인들이 어설프게 흉내 내는 마도 병기나 마왕군의 생체 병기를 훨씬 뛰어넘는 물건이지만, 그뿐이다.

그들의 숫자는 적고, 전체적인 화력도 부족하다. 이미 억 단위의 병력이 드넓은 면적에서 서로 충돌하여 싸우는 모습까지 지켜봤던 라온에겐, 그들의 강함이 그리 와닿지 않았다.

루시가 진심으로 경계하는, 자신의 진정한 대적자들로 꼽은 우주 너머에 있을 그들의 진정한 본체를 아직 엘프식 사고방식에 익숙한 그와 티타니아는 미처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이미 대륙 쪽 정리는 전부 끝났으니까.”

“완전히 정리한 게 아니라면…… 의미가 없지 않나?”

마치 둘의 불만에 답해 주기라도 하려는 듯, 루시가 그동안 죽은 듯 행동을 멈춰 두었던 자신의 아바타를 움직인 게 그때였다.

라온은 그것에 반색하면서도 의문을 가졌다. 아직 마왕군은 대륙을 전부 정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래서야 마왕군은 또다시 두 가지 전선을 가지게 된 셈이다.

“이미 양 집단의 체급 차이가 너무 벌어져서 그쪽 부분은 전선이라 하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루시는 그의 말을 부정했다. 이미 루시의 계산 속에서 대륙의 생존자들은 그 목숨을 자신이 쥐고 있는 통제 가능한 무리일 뿐.

생존자들은 자신들이 필사의 정신으로 저항하여 생존하고 있다고 믿겠지만 사실 그것은 루시가 힘을 조절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체 어째서지? 후환을 남길 수도 있는 일인데.”

“후환?”

루시만큼 철저히 감정을 배제하고 계산식으로만 사고할 수 없던 라온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이 알지 못하는 미래와 불길한 징조를 두려워하듯 라온은 혹시 모를 미래를 경계한 것이다.

하지만 루시는 그 말을 듣고 대놓고 웃었다. 자신은 불확실한 미래 따위는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오직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데이터를 바탕으로 계산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물론 대성녀를 포함, 그들 중 영웅이라 불리는 일부 개체가 자신의 한계를 더 뛰어넘어 특출난 강자가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차이는 일개 개인이 뒤집을 수 있을 정도를 넘어섰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성장한 그들은, 아군의 성장을 위한 좋은 비료가 될 것입니다.”

“허.”

천하의 대성녀 이벨리아마저 자신의 성장을 위해 이용해 먹겠다는 루시의 말에 라온은 탄식했지만, 막상 그 말을 부정하는 건 힘들었다.

하이브마인드이자 중앙 통제 시스템인 루시의 힘은 곧 마왕군 전체의 힘.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진정한 집단의 힘이 무엇인지 그 화신이나 마찬가지인 루시의 힘을 라온 본인도 알고는 있으니까.

아무리 개인이 강해도 두려움과 분열을 모르는 진짜 집단을 상대로는 무력하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여기 돌아온 이유는, 역시 다시 그들과의 전쟁을 재개하기 위해서인가?”

“그렇습니다.”

어쨌든 문제 중 하나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온 루시는, 다시 하나에 집중하기 위해 이곳에 시선을 돌렸다.

웅크리고 잠자코 있던 시간은 이제 끝이다. 한때 타락 세계수와 감염체들이 점령했던 그 버려진 땅들에서 얌전히 대기하던 마왕군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자기들 도시를 공격한 우리를 바로 보복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하더군. 그 흔한 정찰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정찰은 이미 하고 있을 겁니다. 우주 공간은 그들의 영역이니까.”

루시는 하늘 위의 세상에 대한 개념이 부족한 라온에게 우주에 무엇이 있는지 대충 말해 주었다. 위성 전력을 이용해 실시간으로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란 말에 라온이 당황할 정도였다.

“병력을 생산해서 굳이 땅속에 파묻어 둔 이유가 그것 때문인가?”

“아군의 정체와 규모를 대충 알고 있으니 그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 것도 말이 됩니다. 아군이 그 이상 움직였다면 그들도 어떻게든 지원을 끌어왔겠지만.”

루시는 목적을 설정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사방으로 날뛰던 마왕군이 한 수 접어 주고 잠시 힘을 비축한 것은 적들이 가진 힘이 일개 행성 수준을 넘었다고 판단한 탓이다.

그 근원은 바로 우주였다. 우주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는 그들은 마왕군이 무슨 짓을 해도 우위에 있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아군 역시 그 우주를 영역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실상 두 개 세상을 먹어치웠지만 이제 더 이상 땅에만 욕심을 내지 않았다.

루시는 이미 더 큰 곳을 자신이 나아가야 할 곳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럼 그냥 싸우는 걸로 안 된다는 건가?”

“우선 목적을 설정해야 합니다. 가장 우선해야 하는 목적은 그들이 보유한 에테르 기술들.”

그래서 단순히 병력을 파견해 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우주에 진출하고 이미 그곳을 점령하고 있는 이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이 필요했다.

“전쟁이 벌어지면 적들의 함선이나 기술자들을 최대한 확보해야 합니다. 그들에게서 알아낸 정보를 바탕으로 아군도 우주에 진출할 수 있는 병력을 생산해야 하니까.”

“결국 일단은 싸워야 한다는 거군.”

“거기에 더해 가능하다면 그들이 가진 ‘워프’기술도 얻을 수 있도록 일정 급 이상의 함선도 얻어야 합니다.”

분명 카르투스의 직원들은 평범한 인간들이다. 하지만 루시가 가진 능력은 생물체의 구조를 분석하고 그것을 복제, 개조할 수 있는 능력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이 가진 기술들. 아무리 고등하고 복잡한 이론과 학문이라도 엄청난 연산력을 바탕으로 단숨에 외우고 분석하는 게 가능하다.

지금 루시는 자신의 그 능력을 믿고 그들의 기술을 빼 보려 시도하는 것이었다.

“출격을 준비하십시오. 이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합니다.”

“차라리 이게 낫지.”

루시는 라비즈다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특수종인 라온에게 병력들과 함께 움직일 것을 명령했다.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반드시 취해야 하는 선제적인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일단 전쟁을 벌여야 했다.

* * *

“기술을 습득하는 건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데, 그걸 재현하는 게 진짜 가능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조금도 멈추거나 망설이지 않고 착실히 앞으로 나아가는 루시의 계획을 들었을 때, 나는 살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저쪽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지만, 그래도 도와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기에 더더욱.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현재 아군의 초거대 함선형 병사들은 언제든지 우주로 나갈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여기에 습득한 기술의 원리를 파악하여 개조하는데 이용할 수 있다면 필요한 병력을 갖추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런 내 의문에 루시는 문제없다고 답했다. 이미 자신의 병력은 척박하기 짝이 없는 우주 공간에서도 충분히 생존할 수 있다며.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지. 정확한 계획이 뭔데?”

루시를 의심할 수 없었던 나는 화제를 바꾸었다.

대륙에서는 여전히 루시의 마왕군에 쫓겨난 변이체들과 대륙의 변방으로 밀려나 버린 생존자들의 치열한 사투가 한참이지만, 이미 루시는 그곳에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더 이상 교단과 일부 지구 세력이 애쓰고 있는 대륙은 루시의 관심에서 멀어진 지역이 된 것이다.

대신 루시는 견문과 시야가 넓어진 이후 자신의 진정한 목적이 된 이들을 노리기 시작했고, 개인적으로는 나도 이쪽이 편했다.

‘어차피 싸움을 멈출 수 없다면 더 멀리, 큰 세상으로 가는 게 나으니까.’

마치 처음에, 루시가 고블린이나 먹으면서 겨우겨우 몸을 불려 가던 그때로 돌아간 느낌.

루시의 힘을 빌리기 위해 루시를 성장시키고 내가 직접 간섭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이미 나는 루시와 한배를 탔다.

그러나 나도 사람이고 그만큼 간사하다. 같은 동족인 인간들과 루시가 싸울 때보다는 이종족인 마족들과 싸우는 게 더 편했고, 지구인들 중 일부도 넘어가 싸우고 있는 대륙의 생존자들과 싸우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세상의 인간들과 전쟁을 벌이는 게 더 나았다.

깨끗한 전쟁이 어디 있을까. 성장하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 누군가를 포식해야 하는 운명인 이상 루시는 멈출 수 없다.

그 자리에 서서 죽을 수는 없으니까. 그것은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다.

“잘 해봐. 나도 혹시 모르니 계속 자료는 찾아보는 중이야.”

[감사합니다.]

그렇기에 나는 루시를 말리거나 통제하지 않고 오히려 격려했다. 새로운 표본 등을 넣어 주면서 도와주기 위해 지금도 주기적으로 자료를 보고 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애매하게 멈출 수도 없다. 끝까지 달려서 루시의 힘을 이용해 지구에 닥친 문제를 해결한다는 내 처음의 목적을 위해 달려야 했다.

[아군의 정찰대가 출발해 그들의 정확한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감시 장비를 대충 예상하여, 걸리지 않을 만큼 빠르고 작은 이들입니다.]

이미 움직이고 있던 루시는 화면을 바꾸더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내게도 보여 주었다.

죽은 땅과 살아 있는 땅의 경계를 나누는 경계선은, 지금 폭풍전야처럼 날카로운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감시 장비가 보완된 모양이지만, 새만 한 크기의 정찰병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자그마한 날벌레 사이즈의 정찰병들은 감시망을 뚫고 내부를 염탐했다.

[그들이 가장 가까운 경계선인 이곳에 감시 전력을 증강시킨 것이 사실입니다. 함정으로 보이는 것들부터 무인 감시 장비까지 전보다 더 강화되었습니다.]

“뚫기 힘들겠네. 그런데 지도를 보니까 굳이 여기로만 가야 하나?”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는 우회하는 것이 더 효율적입니다.]

루시는 병력을 파견할 방향을 정했다. 다만 저번에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던 도시는 아니었다.

경계선 전체에 걸친 전방위적인 공격도 가능하긴 하지만 일단 경계심을 끌어 올린 적들의 힘도 탐색할 겸, 전과는 조금 다른 곳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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