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균열 (9)
그들의 입장에서, 루시의 마왕군은 전례 없는 적이었다. 분명 많은 면에서 그들이 조사한 감염체와 유사한 면모가 있긴 하다. 빠른 증식력과 이성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 행동 등등.
하지만 단순히 변이를 일으킨 괴생명체 집단이라기에는 이질적인 면들이 적지 않았다. 파괴적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폭주에 가깝게 날뛰던 감염체들과는 달리, 루시의 마왕군은 철저히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움직였으니까.
중구난방, 마구잡이로 난전을 펼치는 것 같아도 다르다. 오직 중앙 통제 시스템인 루시만이 다룰 수 있는 그 무수한 명령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수많은 군대를 움직여 목적을 행한다.
[적들의 장비를 노획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덕분에 루시는 똑같은 전쟁을 치러도 남들보다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강해진다.
“하지만 네가 원한 건 그들의 함선과…… 관련된 기술 아닌가?”
[그렇습니다. 이번에 획득한 기술 대부분은 소형 혹은 중형 에테르 병기들에 대한 정보. 그리 효율적이지는 않습니다.]
루시는 창현에게 이번 전투로 얻은 수확은 그리 크지 않다고 보고했다. 확실히 루시 역시, 지금까지 치러 본 전쟁 양상과는 조금 다른 이 상황에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루시가 철저하게 분석하고 분해하여 그 원리와 구성을 뜯어볼 수 있는 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의 세포들이다.
아무리 강인하고 튼튼한 생명체라 한들 루시가 작정한다면 완벽히 복제해 내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기계 장치는 다르다. 생물과는 그 근본부터가 다른 분야. 루시에게 기계 장치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없다. 문제는 지금 루시가 잡아먹고 그 장점을 빼 와야 할 상대가 기계 문명 그 자체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학문을 습득하고 그것을 응용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지만 선제적인 데이터가 없는 바, 시행착오와 시간이 필요합니다.]
루시의 발전에 제동이 걸렸다. 계획과는 달리 적들의 특징과 장점을 흡수하는 데 시간과 노력이 더 들어가며 효율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적들의 새로운 병력들이 오고 있습니다.]
게다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개척지 사령부에서 파견한 나름 규모 있는 병력들이 도시를 점령한 마왕군을 섬멸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쉽지 않아 보이지만 그래도 이길 수 있지? 네가 그 정도도 계산하지 않고 덤비진 않았을 것 아냐.”
[그들의 전력은 이미 데이터에 있습니다. 저들을 압도적으로 제압하고 그 여파를 이 행성 전체에 끼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더 큰 적들을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예상과는 조금 틀어졌지만, 루시는 그것을 감수하고 그들과 맞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으니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
선전 포고를 날린 것은 애초에 싸우기 위해서였으니. 싸우다 보면 길이 보일지 모른다. 그것이 지금까지 루시가 쌓아 온 경험이었다.
* * *
“적들의 움직임은?”
“도시를 궤멸시킨 이후 그곳에 주둔하며 지금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루시가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 그들 역시 이미 루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루시는 아직 시도하지 못하고 있는 우주 공간의 위성을 이용해 지상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그들은, 루시가 도시에 둥지를 펴는 모습도 관측하는 게 가능했다.
“이 빌어먹을 괴물 놈들이 감히!!”
사령관의 명령을 받아 병력을 이끌고 온 지휘관은 주민들의 시체를 양분 삼아 발전하고 있는 마왕군의 둥지를 보고 격노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휘관은 이 사실을 전 병력에 알리도록 지시했다.
병력의 대부분은 현지인인 다크엘프들. 그들은 동족들이 괴물들에게 당해 일개 거름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 당연히 크게 분노해 전의를 불태웠다.
“전투기들을 발진시켜라. 어차피 도시 내부에 생존자는 없고, 시설은 완파된 상황. 거리낄 것 없이 폭탄을 먹여 주라고.”
“알겠습니다!”
그는 전투기들을 먼저 파견했다. 개척지답게 구형 군용 장비들을 싼값에 사 개조하고 수리해 굴리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전투기다.
미사일과 폭약을 장착한 전투기들이 일제히 하늘을 가로질러 마왕군을 향해 접근하니, 루시는 지상에 내려와 휴면 상태로 있던 함선형 병사들과 비행종들을 동원해 공중전을 시도했다.
“죽어라, 이 괴물들아!”
그러나 이리저리 흩어져 날아다니는 전투기들이 뿜어내는 미사일과 총탄은 그런 방어 시도들을 모두 비껴 내고 도시에 착탄해 폭발을 일으켰다.
뜨거운 화염이 둥지를 태우고, 달려들던 병사들은 충격파에 짓이겨진다.
그것을 막기 위해 출격한 함선종들이 단단한 몸을 꿈틀거리더니 전면부에 집중된 광선포를 쏘며 격추를 시도했지만 전투기들은 너무 작았고, 그렇다고 비행종들이 따라잡기에는 너무 빨랐다.
‘이거 잘만하면 쉽게 가겠는데.’
전투기 하나를 몰던 파일럿, 마커스는 자신이 쏜 기관포에 전신이 찢겨나가 떨어져 내리는 비행종들의 모습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너무 거대한 함선종들이나 너무 작고 느린 비행종으로 구성된 마왕군의 공중전이, 자신들을 상대하기에는 의외로 허술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건 기회야. 최대한 타격하라는 명령이다.”
“더 날뛰어 보라고!”
전투기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도시 상공을 누비며 들고 온 탄약을 전부 소모할 기세로 마왕군을 일방적으로 공격했다.
루시가 비행종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여 만든 공중 방진으로 그들을 잡아보려 했지만 강력한 엔진 출력을 가진 전투기를 강심도 없는 일반적인 생물체가 따라잡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저놈은 설마.’
그런 와중에 마커스는 옆을 스쳐 가는 동료의 전투기 너머로 무언가를 보았다. 누가 봐도 날짐승들인 비행종들과는 전혀 다른 적. 날개도 없는 주제에 공중에 둥둥 떠서 그 찰나의 순간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저 팔 네 개 달린 적은 불그스름한 방어막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
‘상위종!’
당연히 그도 저 적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었다. 감염체들 중에서도 종종 있었던, 에테르 병기에 맞먹는 힘을 쓸 수 있는 괴물들.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적들이었다.
“큭, 그러면 어쩔 테냐. 느려 터진 주제에!”
마커스는 기수를 돌리며 히죽 웃었다. 상대가 강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니 꼭 정면에서 싸워 줄 필요조차 없다.
이대로 자리를 벗어나 다른 곳에서 공습을 이어 가면 그만이다.
“이, 이게 뭐야!”
하지만 그의 그런 움직임은 갑작스럽게 금방 봉쇄당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강력한 힘이, 그가 타고 있던 전투기 전체를 한순간에 덮친 것이다.
분명 최대출력으로 발진하고 있지만 전투기는 마치 무언가에 고정 당한 듯 일렁이는 주변 공기 안에 갇혀 꿈적도 하지 않았다.
[마법은 아무리 간략화해도 효율이 좋지 않지만, 변수가 필요한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판단됩니다.]
상대에게 일격을 당한 루시가 지금까지 쌓아 둔 그 막대한 데이터를 뒤져 가며, 상성상 우위에 있던 전투기들을 잡기 위해 동원한 방법은 다름 아닌 마법. 강심을 가진 상위종들이 시전하는 마법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들을 옥죄었다.
“그, 그만!”
마커스는 필사적으로 상식을 벗어나는 이 미지의 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허공에 고정된 전투기를 향해 날아온 상위종이 손에 든 검을 쳐들었고, 그가 창백해진 얼굴로 그것을 본 순간 전투기는 그의 몸과 함께 반으로 갈라져 폭발했다.
루시의 마왕군이 전혀 다른 적들과 처음으로 벌인 제대로 된 충돌은 이렇게 어딘가 묘한 방향으로 시작되었다.
“저, 전투기들이 모두 당했습니다!”
“이 미친 괴물들이!”
그리고 이것은 다른 전투기들도 마찬가지였다.
동료들이 당하는 걸 보고 곧바로 도주한 몇몇을 제외한 전투기 편대는 모조리 제압당해 바닥으로 추락했고 이 광경을 지켜 본 지휘관은 이를 갈며 화를 내었다.
“위험합니다. 놈들이 무슨 수작을 더 부릴지 알 수 없는…….”
“이대로 물러나면 우리는 패배하는 거야. 그러고 싶나! 지금 당장 포격한다.”
야심 차게 파견한 전투기들이 격추당하고 분노한 지휘관은 이제 본격적으로 마왕군과 그 둥지를 두들기기로 결정했다.
더욱더 가까이. 그는 지상에서 함께 전진하고 있는 육군과 함께 자신이 탄 함선을 마왕군의 둥지까지 접근시켰다.
이 개척지에 단 둘 존재하는 함선이다. 그마저도 군용이 아닌 것을 개조한 것이지만.
[드디어 그들의 ‘함선’과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루시가 자신들을, 정확히는 자신들이 타고 있는 함선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지 못했다.
“쏴라. 이제 우리가 공격하는 입장이다. 어디든 쏴도 놈들이 맞는다.”
지휘관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말 그대로 이제 공격자와 방어자의 입장이 바뀌었다.
한때 그들이 지켜야 했던 도시를 마음껏 공격해도 되니 부담은 그만큼 적어졌다.
[아군의 타격이 큽니다.]
하지만 루시는 아니었다. 이제 방어자의 입장이 된 루시는 먼 거리에서 쏴 대는 적들의 포격에서 병력과 둥지를 지켜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함선종들을 발진시켜 공격 보내 맞대응하는 것이 가장 정석적인 상대법일 것이다.
[전체 방어막 실행.]
그런데 루시는 전혀 다른 방식을 취했다.
목표로 노리고 있는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시도한 것은 바로 자신이 이 도시를 공격할 때, 이 드넓은 면적 전체에 펼쳐지던 에너지 방어막.
루시는 함선종들의 강심을 이용해 그것을 비슷하게나마 재연했다.
“저 개자식들이. 저건 설마.”
그리고 루시의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마왕군이 펼친 방어막이 자신들의 기술이라고 착각한 지휘관의 눈이 뒤집힌 것이다.
그가 보기에는 지금 마왕군이 자신들을 도발하는 것으로만 보였다.
“지금 당장 저것을 부숴라. 저것들이 우리 기술을 빼먹은 것이야.”
“그, 그러려면 더 다가가 함선의 주포로 공격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혹시라도 저것들이 반격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끝장을 보기 위해 여기 온 것 아닌가. 이대로 시간을 주면 저 미친 괴물들이 어디까지 갈지 몰라. 무엇이든 복제하고 감염시키는 괴물들이야. 저 변종들에게 우리가 가진 장비들마저 빼앗긴다면 그건 재앙이라고.”
당연히 분노 하나만으로 돌격 명령을 내린 건 아니었다.
아직도 마왕군을 변종 감염체로 오해하고 있는 그들은 생물체를 감염시키고 변이시키는 감염체들이 이제 자기들이 가진 기계들까지 감염시키고 이용하게 되었다고 판단해 버렸다.
가정에 불과하지만 실현된다면 재앙 그 자체인 끔찍한 일. 그의 주장에 설득된 다른 이들도 결국 접근해서 포격하는 데 찬성했다.
[그들이 오고 있습니다.]
동시에 루시는 그들의 결정을 알아차리고 준비를 시작했다.
그들이 최대한 가까워진 시점에, 한 번에 뛰쳐나가 휩쓸어 버리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