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숙적 (2)
이유 불문, 원인 불문. 그녀에게 갑자기 개방된 이 게임은 처음엔 굉장히 단순했다.
세상을 위협하는, 마왕이라는 악적에 맞서 용사들을 육성해 사람들과 세상을 구원하는 것.
실제로 마리사는 착실히 게임을 플레이해 가며 게임 속 권능들을 아낌없이 사용해 위기를 돌파해 나갔고, 끝내 첫 번째 페이즈인 마왕과의 대결을 승리로 만들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자신의 지원과 점점 많이 개방되는 다양한 게임적 기능들을 통해 발전하고 성장하는 게임 속 캐릭터들을 보며 마리사는 분명한 가능성을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을 플레이하는 데 있어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설령 이것이 일개 게임이 아니라 진짜 현실이더라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그녀가 가진 권능은 그들이 그녀를 여신이라 떠받들 만큼 강력했으니까.
페이즈 2, 대륙 정벌도 이런 이유로 호기롭게 시작한 것이다. 비록 한때 같은 편이었던, 그럼에도 그녀의 통치를 거부하는 적들이 마계와 대륙을 아우르는 연합군을 결성해 저항하는 덕에 시간이 끌리긴 했지만 그건 하나의 방 해요소에 불과할 뿐이었다.
시간은 분명 그녀의 편이었다. 미 정부의 지원도 받고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교단 세력은 자신들보다 훨씬 큰 연합을 상대로 분전했으니까.
연합에 속한 권력가들이 끝내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는 탓에, 시간이 흐른다면 마리사를 여신으로 모시는 교단은 게임에서 스테이지를 클리어해 가듯 차분히 대륙을 먹어치웠을 것이다.
‘비이상적이라고……?’
그런 모든 계획이 어그러진 것은 예상 범주 내에 있던 원인이 아니었다.
평범한 여대생이었던 그녀를 한 세상의 여신으로 만들어 준 게임 시스템조차 예상하지 못한, 외부에서 흘러들어 와 끝끝내 자리를 잡고 꾸역꾸역 성장하는 데 성공한 이레귤러. 그것은 곧 하나의 버그와도 같았다.
그 버그는 엄청난 속도로 자신을 증식시켜 나갔다. 초창기에 대응하려면 분명 대응할 수 있었지만, 이 ‘버그’는 마치 뒤에서 조종하는 존재라도 있다는 듯 침착하고 차분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힘을 길러 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 힘이 폭발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게임 시스템은 기존의 방식으로는 그 버그를 막아 낼 수 없었다.
“대체 뭘 주려는 거지?”
마리사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특별 보상이라는 것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녀가 게임 시스템을 받아 온 보상들은 모두 눈에 보이는 보상은 아니었다. 그야 당연히 그녀에게 이것은 하나의 게임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들은 모두가 강력한 권능 그 자체라 받는 대상에게는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기적이기도 했다.
[캐릭터 슬롯x10].
“말도 안 돼. 이건 설마.”
마리사는 보상을 보고 잠시 얼어붙었다가, 이내 눈이 커졌다.
예상하고 있던 경험치 권이나 장비 소환권 따위가 아니었다. 캐릭터 슬롯이란 말 그대로 그녀가 ‘직접’ 육성하는 캐릭터를 늘릴 수 있다는 것.
지금까지 그녀가 아이템을 써 가며 직접 육성한 것은 대성녀 이벨리아가 유일하고, 나머지 영웅들은 그저 이벨리아를 통해 파생적인 것을 지원해 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이벨리아 같은 캐릭터를 10명이나 만들 수 있다는 뜻이었다.
‘리암도 된다.’
화면을 뒤적거리며 이 권능을 사용할 사람을 뒤져 보던 마리사는 이내 전율했다.
자신이 캐릭터로 만들 수 있는 이들의 목록에서, 현지인들은 물론 지금 그곳에 가 있는 지구인들도 지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 *
“서북부 전선이 계속 밀리고 있습니다. 대체 어디서 그렇게 오는 건지, 죽여도 죽여도 변이체들이 끊이질 않습니다.”
“전 대륙이 당했다. 살아남은 이들이 3할이 채 안 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남은 7할이 어떻게 되었겠나. 시체가 되었다면 차라리 모를까, 전부 저 괴물들로 변해 버렸다.”
이곳은 교단에서 만든 요새. 다들 지쳐 있는 와중에 이 요새를 통솔하던 대사제는 스트레스로 다 빠져 버린 머리를 반짝이며 이를 갈았다.
루시의 마왕군이 다른 세상에서 벌어지려 하는 제대로 된 전쟁에 집중하는 사이, 그 마왕군에 밀려난 수많은 숫자의 변이체들은 살아남아 변방으로 밀려난 생존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바알이 만들어 낸 끔찍한 유산인 변이체들은, 살아 있는 사람이 변이해서 탄생한 괴물들. 즉, 구하지 못한 인구수 자체가 놈들의 숫자라는 소리였다.
“게다가 놈들이 끝이 아니야.”
더 절망적인 것은 변이체들은 결국 폭주하는 짐승들일 뿐, 그런 앞뒤 없이 달려드는 괴물들조차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도주하게 만드는 진정한 괴물들이 대륙 대부분을 자신들의 둥지로 만들고 있다는 것.
그들 역시 이미 마왕군과 전투 경험이 있으니 대륙 정벌이라는 마왕의 숙명을 이루는 데 성공한 최초의 마왕에 대한 두려움은 이미 널리 퍼진지 오래였다.
“정말 답이 없는 건가? 이대로 버티는 게 전부라고?”
“어쩔 수 없습니다. 뭔가를 해 보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이 넘어가지 않았습니까.”
그 푸념을 지켜보던 리암이 혀를 찼다. 하지만 대사제는 반박하지 못하고 탄식할 뿐이었다.
이미 너무 많은 땅과 사람이 적들에게 넘어갔다. 이것을 타파하는 것은 이미 그들의 손을 떠났다. 기댈 수 있는 것은 말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주는 기적뿐이다.
‘이게 우리의 미래인가?’
리암은 그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하나로 단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외부에서 몰려오는 압도적인 적들에 의해 끝끝내 저항이 무너지고 땅과 사람을 내어 준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그의 고향인 지구 역시 지금 이것과 비슷한 위기에 처해 있다.
게이트와 던전을 통해 자꾸만 세상을 넘보려는 괴이하고 사악한 괴물들. 만약 이대로 가서 그것을 이겨 내지 못한다면 이곳의 상황이 곧 지구의 상황이 될 것이라는 건 자명하다.
“표정이 좋지 않군요. 무슨 일 있습니까?”
“좋으면 이상한 것 아닌가? 지금 같은 때에.”
그런 상황에서, 이벨리아가 하늘을 날아 요새에 도착한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그녀가 평소 이상으로 굳어 있는 그의 표정을 보고 피식 웃자, 리암은 왜 그렇게 웃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희망이라는 것이 있고 없고는 차이가 크지. 절망적일수록 자그마한 희망 하나에 사람들은 울고 웃는다. 그런데 지금, 그런 작은 희망 하나라도 있나?”
“물론 없지요. 여신께서 해 주시는 지원이 없다면 이렇게 버티는 것도 불가능할 정도로 이미 이 세상은 많이 망가졌습니다.”
“알고 있다는 게 놀랍군.”
이번엔 리암이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가 웃든 말든 이벨리아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온 세상도 지금 간당간당하다. 그곳에도 괴물들이 출몰해서 사람들을 해치고 잡아먹지. 원래는 그런 거, 내 알 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두 세상이 나란히 망할 것 같아서 걱정이군.”
“바꿔 말하면, 한쪽에서 희망을 본다면 반대쪽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가 진중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지만 이벨리아는 여전히 모호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 모습에 위화감을 느낀 리암은 자세를 고쳐 섰다. 그의 예상대로 이벨리아는 그에게 할 말이 있어 찾아온 것이었다.
“두 세상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당신이 그 희망이 되어 보는 게 어떻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여신께서 권능을 내려주실 수 있습니다. 일개 시골 소녀였던 제가 마왕군과 맞서는 대성녀가 될 수 있었던 그 권능을. 당신은 이미 훌륭한 전사이고 계속 성장하고 있으나, 분명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실제로 그녀는 꽤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마리사가 받은 특별 보상인 캐릭터 슬롯. 마리사는 그 중 하나를 리암에게 쓰려는 것이었다.
“이해가 잘 안 가는데.”
리암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곳이 다른 세상이라는 점은 알고 있어도 누군가의 모바일 게임 속이라는 사실은 아직 모르는 상태였으니까.
당연히 그는 마리사가 이벨리아가 말하는 여신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당신이 여신이 내려주는 성장의 권능과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새로운 힘을 더한다면 그 성장은 더 가파르게 상승하겠죠.”
“그건…….”
리암은 이벨리아의 말을 듣고 망설였다. 힘을 추구하는 그에게는 분명 끌리는 내용이었으니까.
“당신이 수락한다면 여신께서 당신에게 권능을 내릴 겁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그 힘은 당신의 노력만으로 이룬 힘이 아니니 당신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책임이라고?”
“당신이 말한 희망. 스스로 그 희망이 되어 주십시오. 소수의 결사대와 함께 앞에 놓인 험지를 뚫고 뚫어서 마왕군의 둥지에 도달해 보십시오. 그곳에 타격을 입혀서 우리의 힘이 아직 그들에게 먹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겁니다.”
이벨리아는 그에게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그가 더욱 성장하게 된다면 자신과 함께 결사대를 만들어 마왕군의 둥지를 공격해 보자는 계획이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변이체들을 상대하는 것만 해도 빠듯하니, 지금까지 마왕군의 둥지를 공격해서 제대로 된 성과를 낸 전과가 없다.
그 사실은 곧 공포가 되어 살아남은 사람들의 정신을 잠식하고 있었다. 마왕군처럼 철저한 데이터만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이들이 마음가짐부터 지고 들어간다면 백전백패.
이래서야 제대로 된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벨리아는 전력을 갖추는 즉시 마왕군을 공격해 희망의 불씨를 찾아 지필 생각이었다.
큰 공적이 아니어도 된다. 아군의 힘이 적들에게 먹힌다는 것만, 적들이 난공불락의 괴물들이 아니라는 것만 확인해서 사람들에게 알리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듣다 보니 틀린 말은 아니군.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도 거절할 이유는 없지.”
“역시 당신은 피하지 않고 싸움을 택할 줄 알았습니다.”
리암은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의 가장 큰 목적은 사실 사람들을 구하거나 돕는 것이 아닌, 힘을 추구하여 스스로의 성장을 이루는 것.
이 이름 모를 성좌의 힘으로 그는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진다. 거기에 공적을 이루면 그만큼 보상을 받는 여신의 권능까지 더해진다.
그로서는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자신의 성장을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싸움에 임하는 정신. 어찌 보면 루시가 가장 좋아하고 으뜸으로 치는 정신이었다.
“그래서, 이제 내가 뭘 하면 되는 거지?”
“여신의 권능을 받으시죠. 당신을 시작으로, 우리가 전례 없는 위기를 맞이한 이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영웅들이 탄생하게 되니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그때 알게 될 겁니다.”
이벨리아는 리암을 변경의 요새에서 본단의 대신전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루시라는 버그를 처치하기 위한 하나의 캐릭터가 되어 특별한 힘을 몰아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