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184화 (184/200)

184화 숙적 (4)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전보다 훨씬 강해졌어. 이거 네가 한 방 먹는 거 아니야, 루시?”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상을 벗어난 강함. 리암의 출력이 이전에 비해 급격히 상승했다는 것을 루시뿐만이 아니라, 지켜보고 있던 그가 알아차릴 정도였다.

실제로 리암은 강한 각성자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상태. 그에게 기적 같은 성장을 안겨 준 게임 시스템에 대해 알지 못하는 루시는 순간적으로 그에 대한 계산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조치 없이 내면의 힘을 저렇게 증폭시킬 수 있다는 데이터는 없습니다. 분명 모종의 수단이 동원된 것이 확실합니다. 만약 그것을 알아낼 수 있다면 아군에게도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루시는 이 와중에도 자신을 위한 성장의 각을 찾아내었다. 리암이 강해진 것은 사실이니, 그 방법을 알아내어 자신이 흡수하면 오히려 이득이라는 생각이었다.

[급한대로 가장 가까이 있던 수비 병력을 급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루시는 리암을 놓치기 싫었다. 비록 설치된 마도 폭탄과 기계 폭탄 등으로 둥지 일부가 큰 손상을 입어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터져 나갔지만 그것 정도는 내어 줄만 했다.

“넌 뭐냐.”

대신 그만큼 확실한 결과가 있어야만 루시 본인이 만족할 수 있었다. 다른 이들과 함께 후퇴하려던 리암은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새로운 적에 눈을 꿈틀거렸다.

분명 생김새 자체는 다른 상위종과 비슷하다. 몸에 박힌 강심이나, 무기를 든 손 등.

그러나 검은 투구 안에서 빛나는 붉은 안광들은 기존의 마왕군과 살짝 다르다는 것을 리암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34번째로 각성한 하위 프로그램.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그를 제압하도록.]

미셔너리라 불리는 존재. 다름 아닌 스스로 자아를 각성하여 조금씩이나마 성장하고 있던 루시의 하위 프로그램이다.

오직 정해진 명령어대로만 움직이는 다른 병사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뇌를 사용하여 스스로 명령을 생산하고 행동하는 것이 가능했다.

루시는 지금까지 그들을 제거하지 않고 쏠쏠히 써먹는 중이었다. 유리아나 라온처럼 확고한 자아를 가지고 활동하는 특수종들 같이 자신에게 없는 변수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이들이었으니까.

게다가 특수종들보다는 훨씬 루시에 가까워서, 루시 특유의 빠른 사고 능력 등 장점을 흡수해 사용하는 것도 가능했다.

[흥미].

처음에는 적을 막으라는 루시의 명령이었지만 리암을 실제로 본 34번의 감정은 어느새 흥미로 바뀌었다.

미약한 자아를 각성하긴 했어도 그 근본이 루시다 보니 호승심이나 성장에 대한 집착 등 루시의 성향을 많이 닮은 탓이다.

“시간 없으니 금방 끝내자.”

본능적으로 무언가 느끼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던 리암은 빠르게 해치우고 가려고 검을 들고 덤벼들었다.

그러자 34번 역시 리암의 검을 받아쳤고 출력에서 밀린 34번은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역시 빠르게 해치우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몰려드는 다른 적들을 상대하던 리암의 일행들은 그 전투를 보고 마음을 놓았다. 리암의 우세가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야. 이건.’

그러나 막상 싸우는 당사자인 리암은 이를 악물었다. 분명 출력에서는 이전처럼 자신이 앞선다. 즉 힘으로 밀어 버리면 밀어 버릴 수 있다는 뜻.

“너, 대체 뭐야.”

그럼에도 그가 이를 악문 이유는 적의 공격에서 지금까지 느낄 수 없었던 것을 느낀 탓이다.

루시가 직접 움직이지 않는, 입력된 명령어로만 움직이는 이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직접적인 살의와 적의.

[!!!!]

리암은 끝내 방어막을 부수고 34번의 몸을 베어 버렸다. 상반신과 하반신을 반으로 갈라 버린 것이다.

“시간 없습니다. 어서 가야 합니다!”

다만 다른 이들이 그 이상 시간을 끌며 버티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마무리는 짓지 않았다. 어차피 그대로 확실하게 처리해도 뇌에 저장된 데이터는 멀쩡히 남아있긴 하지만.

[화가 나나?]

결국 리암을 비롯한 특공대를 놓쳐버린 루시는 손해만 보았는데도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34번을 살폈다. 압도적인 격차로 패배.

일반적인 상위종이라면 그 패배에, 승리에 아무런 감정도 품지 않겠지만 34번은 달랐으니까.

그동안 압도적인 승리만을 거둬 오다 겪은 치욕스러운 패배다. 분노하고, 증오하는 것이 당연하다.

[임무를 주지. 네가 그를 잡는 거다.]

루시는 이것을 이용하고자 했다. 솔직히 이미 두 개 세상을 점령한 거대한 군세를 운용하게 된 루시에게 리암은 자그마한 방해자 하나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루시가 자신에 비하면 미물에 불과한 일개 인간인 리암의 행동에 분노하고 감정을 소모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

하지만 일개 하위 프로그램인 34번이라면 다르다. 자신을 단숨에 짓밟아 버린 리암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 모든 것을 쏟아 부울 수 있으니까.

[가라. 가서 철저하게 그들을 괴롭히고, 네가 원하는 것을 얻어 와.]

루시는 34번의 시체를 회수해 뇌를 꺼내었다. 34번에게 더 강력하고, 더 최적화된 육체를 맞춰 주기 위해서였다.

오직 리암과의 일전을 위해 탄생한 저격 병기의 탄생.

루시는 34번에게 설령 패하더라도 다시 도전할 수 있도록 머리만큼은 회수할 수 있게 명령해 두었기 때문에 이 싸움은 끝이 없을 것이다.

* * *

“이게 마왕이라고?”

“그렇게 추정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34번과의 충돌 이후 무언가 느낀 것은 리암도 마찬가지. 리암은 요새로 복귀하자마자, 이벨리아에게 정보를 하나 들었다.

목격담은 물론 아예 루시와 직접 충돌한 경험이 있는 이벨리아는 자신의 기억과 증언을 바탕으로 루시의 몽타주를 그리게 만들었었고, 그것을 리암에게 전달했다.

그 몸은 비록 거친 가죽과 갑각으로 이루어진 괴물의 몸이지만 목 위로는 붉은 눈과 긴 흑발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

리암은 처음으로 루시의 얼굴을 보았다.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묻죠? 당신이라면 이 전공에 크게 기뻐할 줄 알았는데 기분도 딱히 좋아 보이진 않는군요.”

이벨리아는 그런 리암의 태도에 의문을 가졌다. 시종일관 심각한 것이 자신이 아는 리암의 성격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마왕군에서 특이하다고 말할 만한 개체는 이 마왕이 전부란 건가?”

“아마 그렇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직전까지는. 그런데 내가 만난 그놈은 조금 달랐어.”

리암은 탄식하며 34번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마왕군이 진정한 공포로 자리 잡은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가진 차가움 때문이었다.

일말의 감정도, 망설임도 없이 자신들의 일을 추진하는 그 차가움. 동료의 시체를 짓밟고 앞으로 전진하는 무거움 등.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마치 언데드 군단을 상대하는 것처럼 상대해야 했다.

“감정을 가진 적이라. 물론 마왕도 존재하는 마당에 특별한 놈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죠. 이것은 일단 알아 두겠습니다.”

“있을 만한가.”

이벨리아는 놀라면서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라 판단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기존의 상식대로라면 마왕이 두려운 이유는 결국 휘하에 거느린 수많은 부하들 때문. 비록 루시가 그런 상식을 한참 벗어난 존재라지만 공통점이 없을 리는 없었다.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다.]

그러나 이벨리아가 자리를 떠나고 리암 혼자 남았을 때.

최근 잠잠하던 목소리가 그의 머리에 다시 울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이제 슬슬 분기점에 다다랐다고 생각한다. 너의 숙적은, 주적은 누구냐. 이곳에 온 이유는 그저 싸움을 통해 성장하기 위해서 온 것 아닌가?]

그의 성좌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숙적이 누구냐는 말에 리암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도 지구를 노리고 있을 이차원의 괴물들, 침략종들의 모습이 눈에 스친 탓이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상태창과 함께 나타난 존재지. 내가 마왕군이니 뭐니 하는 괴물들보다는 침략종들과 싸우길 원하겠군.”

[지금은 말해 봤자 모르겠지. 하지만 굳이 말해 주자면 사실 의미는 크게 없다. 싸움은 이미 세력전으로 들어갔고 너는 분명 손꼽을 만큼 강하지만 일개 개인일 뿐이다. 행성급으로 넘어가는 세력 단위 싸움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기 때문에.]

“그럼 왜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는 거지? 기분만 뒤숭숭하게.”

[그동안 함께한 업적과 공로로 네게 힌트를 하나 주려는 것이다. 조금 더 길게 보고, 안전하게 가고 싶다면 굳이 이곳에 남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지금처럼 빠르게 성장하여 네가 원하는 극의에 다다르고 싶다면 싸우면 된다. 마왕군과.]

“대체 뭘 알고 있는 거야?”

몇 마디 툭툭 던지거나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던 그의 성좌는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것을 그에게 말해 주었다.

혀를 찬 리암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깊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 싸워야 하는 적에 대해서.

“난 그 마왕이란 년의 얼굴을 보고 쓰러트리기 전까진 안 떠난다. 가뜩이나 새로운 힘도 손에 넣었는데 그걸 버리고 도망칠 수는 없지.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는지 실험할 수 있는 기회라고.”

다만 결국 내린 결론은 지극히 그다운 결정이었다. 싸우고 강해진다. 그 이유는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 처음부터 그것이 목적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 지금까지 겪은 일들로는 네 고집이 꺾일 리가 없지. 어디, 잘해 봐라. 무슨 일을 당해도 입은 살아있을 놈.]

“마치 나에 대해 잘 안다는 듯 구는군.”

[알지. 모를 수가 없지.]

리암이 코웃음을 치니 성좌는 피식 웃으며 사라졌다.

이쯤 되니 리암도 신경이 쓰여 마냥 웃을 수는 없었으나, 뭔가 물어봤자 상대는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저, 적이다! 마왕군이다!”

그러나 리암은 며칠 지나지 않아 그날의 일은 금방 잊어버렸다.

미쳐 날뛰는 괴물들인 변이체들이 아닌, 제대로 된 적들이 하늘을 가로질러 쳐들어 온 것이다.

* * *

[리암 앤더슨과 아군의 모든 기술이 집대성된 34번 중 누가 더 빠르게 성장하는지, 그것을 시험할 때입니다.]

“상대는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어. 아마 성좌의 힘이겠지. 그걸 뛰어넘을 수 있다고? 각성자들의 힘은 너도 분석하는 데 실패했잖아.”

[그간 쌓은 아군의 경험을 모두 이용하여 그 차이를 채우는 것이 열쇠가 될 것입니다.]

화력을 지원할 함선체 하나가 포함된 소수 병력을 파견한 루시는, 리암과 34번의 싸움을 집중적으로 지켜보았다.

이것 역시 일종의 실험에 가까웠다.

“네 목적은 그럼 리암을 뛰어넘는 병력을 육성할 체계를 만드는 건가? 리암을 아군으로 만들려 했다면 더 큰 병력을 동원했겠지.”

창현은 루시의 계획을 듣고 루시가 리암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일리 없는 예측은 아니었다. 루시는 자아가 강한 특수종에는 거부감을 느껴 왔으니까. ‘리암이 스스로’ 원하지 않는 이상 굳이 비효율을 감수하고 억지로 아군으로 만들 이유가 없었다.

[일단은 그렇습니다.]

병력을 통솔하여 요새를 급습하는 34번의 모습을 지켜본 루시는 의미심장하게 답했다. 이벨리아가 자리를 비운 사이, 요새에서 가장 강한 존재는 리암. 당연히 그는 34번과 싸우기 위해 검을 들고 나타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