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숙적 (5)
“성좌라.”
리암이 루시에게 타격을 입혔을 때.
그가 저쪽 세상으로 건너가서 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루시의 계산 범위를 초월할 정도로 강해진 모습을 확인했을 때는 살짝 놀랐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는 나도 기억하고 있으니까. 심지어 그는 그때 멋모르고 덤벼들어 나와 싸우기도 했다. 그때도 주목받는 강자였긴 하지만, 분명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지금 그와 싸우면 어떻게 될까.”
[지금 가지신 나노·오메가로는 채 10초도 버티지 못합니다. 전력을 다해 몸을 빼야 합니다]
혹시 몰라서 슬쩍 물어보니 루시는 단언했다. 과거 그를 압도적인 실력으로 찍어 눌렀던 루시는, 습득한 데이터에 기반한 판단으로 리암이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내면에 가진 힘에 비해 그것을 다루는 기술이 약하다고 평가받았으나 저쪽 세상에서 경험을 쌓은 것인지, 따로 수련을 받은 것인지 이제 그런 약점도 거의 사라졌다.
거기에 원래도 강했던 출력은 더 상승했으니 과연 상대하기 힘들 만하다.
“그래도 별로 걱정은 안 하지만 정말 이렇게 내버려 둬도 돼?”
[데이터를 추출하기 딱 좋은 개체라고 판단했습니다.]
루시는 그를 상위종, 정확히는 지금도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는 하위 프로그램들의 성장을 위해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지금의 마왕군은 일개 개인이 어떻게 해볼 대상이 아니니까.
내가 봐도 지금의 루시에게 진정한 위협이 될 이들은 아직 그 실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우주 세력뿐이다.
“성좌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제대로 밝혀진 게 없지. 그가 다른 각성자들에 비해 그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성좌의 영향이 큰데.”
자연스럽게 리암이 어떻게 그렇게 강해졌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루시 본인도 강심의 효율을 올리거나 개수를 늘리는 것을 제외하면 늘리기 굉장히 힘든 것이 바로 체내에 가진 마력량. 사실상 타고나는 것이 전부라는 그것을, 리암은 쭉쭉 늘려 왔다.
그 기적이 가능한 이유는 상태창과 함께 미지의 기적이라 불리는 도우미들 덕분일 것이다.
상태창의 일부로, 자격을 갖춘 이들에게 찾아와 힘을 빌려준다는 그들은, 이 업계에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데이터가 없어 그 성좌라는 존재들에 대해서는 추론이 불가능합니다.]
“그래. 그렇겠지. 애초에 데이터를 얻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고. 이제 끊을게.”
나는 이곳으로 다가오는 이지연을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성좌와 계약한 계약자. 당연히 그 성좌와 소통했을 것이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성좌에 대한 정체 같은 건 알지 못했다.
* * *
“당연히 궁금하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잘 말해 주지를 않아. 용건이 있을 때만 불쑥 나타나지. 그나마 밝혀진 것은 성좌마다 사람을 가린다는 것 정도.”
이지연은 성좌에 대한 내 물음에, 자기가 아는 것을 다 말해 주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수상하긴 하다. 대체 그들의 진짜 목적이 뭘까.
“그래도 나쁘게 볼 이유는 없지. 적들과 싸울 힘을 주는걸. 몇몇은 용납하기 힘든 가혹한 조건을 걸기도 한다지만.”
“적이라.”
그럼에도 성좌들이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이유는 간단했다. 더 큰 적, 공공의 적을 상대하기 위한 힘을 빌려 주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나 이 세상을 갉아 먹으려 드는 괴물들. 영문도 모르고 습격을 당한 우리는 영문도 모르는 힘을 손에 넣어 그것으로 적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
“그래도 어떻게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
처음 괴물들이 등장했을 때 분위기는 내 눈에 선하다. 종말론자들이 뛰쳐나오고 세상이 망할 것만 같았던 그 충격과 공포.
하지만 이어서 각성자들이 등장하고 대항하기 시작하면서 분위기는 또 바뀌었다. 비록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도, 많은 땅을 잃어버려도, 어쨌든 살아남은 사람들은 계속 살아가야 하니까.
침략종들은 마치 루시가 대륙의 생존자들을 구석에 몰아놓고 소수의 병력으로 흔들기만 계속하면서 긴장 상태를 유지시키듯,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지 않고 던전과 게이트를 통해 철저하게 그 규모와 수준을 유지했다.
우리가 강해지고 많아지면 놈들도 강해지고 많아진다. 마치 서로를 경쟁자 삼아 아등바등 진화하고 경쟁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하나의 시스템.
루시 같은 인공지능 출신이 설계했다고 해야 믿을 수 있는 거대하고 짜임새 있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안심할 수 없어. 언제 또 변수가 생길지 몰라.”
이지연은 마냥 웃지 못했다. 지금이야 평화를 되찾았다는 듯, 게이트나 던전이 일상 그 자체가 되어 버렸지만 직접 겪어 본 이들은 언제 또 극도의 혼란이 찾아올지 몰라 경계했다.
“……그것도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그런 모습을 보고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자세히는 말해 줄 수 없다. 아직 완벽한 방법을 찾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우리에겐 아지 믿을 구석이 있다는 것을 어필하고 싶었다. 루시가, 지금 자신의 몸을 거대하게 불리는 중이다.
미물 집단에서 시작한 거대한 군세를 이끌고 방법을 찾는 중이다. 만약 루시가 지구까지 온전히 손을 뻗을 수 있게 된다면 괴물들과의 싸움은 훨씬 편해질 것이다.
루시가 이끄는 마왕군의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 지겹게 보는 중이었으니까.
“너는 처음부터 그랬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뭔가를 많이 숨기고 있어.”
그녀가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눈에는 약간의 원망도 있었지만, 그녀는 굳이 그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을 위한 일이라니까, 굳이 묻지 않을게.”
“장담해.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그녀에게 계속 숨기는 것도 미안하니 나는 확신을 담아 말하기라도 해야 했다.
한때나마 루시를 의심한 적도 분명 있었다. 자아를 성장시켜 가며 불안정한 면을 가지게 된 루시가 혹시라도 다른 마음을 품을까 봐.
마음이라는 것은 나조차도 뭔지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루시가 나를 위한다면서, 모두를 위한 일이라면서 허튼짓을 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루시가 성장하는 모습을 전부 지켜본 나는 루시가 나를 위해서라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것이라고 믿었다.
“으, 으아.”
“왜, 왜 그래?”
그런데 그 순간. 웃고 있던 이지연이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더니 자기 머리를 움켜쥐었다.
당황한 나는 그녀를 근처에 있던 의자에 데려가 앉혔다.
* * *
[확신하냐고 물어보아라. 자신의 믿음이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굳건하냐고.]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양날의 검을, 세상 무엇보다 강력한 마검을 다룰 수 있냐고 물어보아라.]
이지연은 머리에 울리는 목소리에 당황했다. 평소 잡소리는 거의 하지 않는 그녀의 성좌가 냉소가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연 탓이다.
그녀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성좌가 대체 창현과의 대화 내용에 왜 신경을 쓰는 것인지, 물어보라는 말까지 쓸 만큼 관여하려는 것인지.
“화, 확신하냐고?”
결국 입을 연 이지연의 질문에 그는 당황해서 눈이 흔들렸다. 이런 상황 자체를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당연하지. 날 믿어.”
그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에 대한 믿음 자체는 굳건하고 지금 상황에서 갑자기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되었다고 전해라. 여기까지 왔다면 이미 안정권에 들어왔다지만 혹시라도 모를 타락을 경계하라 전하라. 부디 그 믿음이 헛된 믿음이 되어 그것에 배신당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건 대체.’
이지연은 눈을 크게 떴다. 머리에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시야가 암전하고, 그 어둠 속에서 어지러이 아른거리는 빛이 슬며시 보였다.
그녀는 분명 그 빛 속에서 무언가를 보았다. 자신을 보고 있는 한 사람의 형체. 날개와 같은 것을 달고 있는 그 형체는 분명 그녀의 머리에 울리는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이 분명했다.
이지연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도와주는 성좌의 모습을 편린이나마 잠시 본 것이다.
“정말 괜찮은 거야?”
“으응.”
성좌의 영향력은 왔을 때처럼 갈 때도 한순간에 사라졌다. 다시 돌아온 시야에 그녀는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오후에는 쉬는 게 좋겠어.”
“그렇게 해. 먼저 가 있어. 나머지는 내가 챙겨 갈 테니.”
이지연은 오후 일정을 취소했다. 아무래도 조용한 곳에서 안정을 취하면서 본인이 방금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 * *
“누군가 했네. 오랜만이다, 진혁아.”
“아직 일하고 계세요?”
“이제 퇴근하는 참이지만.”
갑작스럽게 발생한 예상치 못한 소란 이후. 이지연을 먼저 차로 보낸 창현이 대신 그녀의 짐을 챙겨 이동하던 때.
그는 길 한복판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한때 같은 팀으로 움직이며 던전도 함께 들어간 각성자인 오진혁.
한번 목숨이 위험한 위기에 처한 이후 끝내 팀에서 이탈한 그는 결국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각성자 활동을 하지 않기로 했지만.
“이랬다저랬다 한다니까요. 언제는 못하게 하려고 했으면서.”
“그만큼 갑자기 사정이 어려워서…… 그렇지. 살고 보는 게 맞으니까.”
이지연이 일하고 있는 이곳, 그들이 마주친 이곳. 이곳은 전국의 각성자들을 의무적으로 불러 모아 교육하고 유사시 전력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시설이다.
미성년자도 예외는 아니다. 미성년자라고 전력에서 제외되었던 오진혁도 금방 다시 이곳에 불려 와 힘을 써야만 했다.
과거라면 절대 불가능했을 일이 가능한 이유는 그만큼 위험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의무 교육 기간이 끝나면 싸우든 말든 자유지만.”
“넌 계속 싸울 거니? ‘헌터’가 되려고?”
“당연히요.”
각성자의 숫자가 늘어나고, 모든 각성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활용해 살아가는 건 아니게 되었다. 그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제로 싸우게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
대신 싸움을 선택한 이들을 헌터라 불렀다. 싸움의 이유는 다양하다. 막대한 보수, 강해지는 자신에 대한 성취감, 개인적 복수 등등.
오진혁 역시 그 길을 선택했다.
“기간이 끝나면 다시 시험 봐서 팀에 들어갈게요. 살아서.”
“넌 죽지 않아.”
피식 웃은 그가 고개를 떨궜다. 싸움이 있다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그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그러니 그것들을 지키려면 더 큰 힘이 있어야 한다.
‘정말 할 수 있겠지.’
일이 있던 오진혁과 헤어지고 혼자 남은 그는 다시 길을 걷기 전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그것에는 방위군을 격파한 이후 아직 카르투스 본사의 움직임이 관측되지 않고 있고, 개조한 34번이 리암에게 또다시 격파되었다고 소식을 전해 오는 루시의 보고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가 원하는 힘. 세상 사람들 그 누구도 모르고 오직 그 혼자서 지켜보고 가꿔 온 그것이 지금 계속해서 자신을 채찍질해 가며 자라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