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숙적 (6)
“원하는 데이터는 얻었어?”
[엄격히 판단한다면 예상 이상으로 빠른 일격살에 가까운 타격이라, 급히 후퇴시켰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데이터의 일부일 뿐입니다.]
루시는 자신도 모르게 얼버무렸다. 실제로 병력을 이끌고 간 34번은 리암과의 일대일 대결에서 이렇다 할 타격을 주지 못하고 이번에도 패배했다.
데이터가 들어 있는 머리도 가까스로 빼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번 데이터를 바탕으로 다시 개조하여 출격시킬 예정입니다.]
그런데도 루시는 포기하지 않았다. 애초에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 곧 승자나 마찬가지. 그것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것은 실험이었으니까.
[더, 더 분노하고 증오스러운가?]
요새와 가장 가까운 둥지. 그곳에서 루시는 박살이 나 버린 잔해들 사이에서 34번의 머리를 찾아내었다.
전과 비교하면 훨씬 완숙해진 루시의 자아는 더 이상 다른 것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관철할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미약한 자아를 깨워 가는 하위 프로그램들을 다스릴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34번이 느끼고 있는 이 강렬한 분노와 증오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가능했다.
[다시 한번 도전하도록.]
루시는 뇌만 빼낸 34번의 몸을 다시 한번 개조했다. 리암과의 전투 데이터를 근거로 그와의 전투에서 더 유리하게 싸울 수 있도록.
이 과정은 결국 승리를 거머쥘 때까지 계속 반복될 것이다. 리암은 이미 늪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다.
계속해서, 조금씩이라도 강해지는 적은 점점 더 최적화된 상태로 그를 찾아올 것이고 언젠가 결국 그를 꺾어 버리게 된다.
그것에 빠지지 않으려면, 결국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하든가 아예 현장을 이탈해 버리면 된다. 문제는 지금 리암이 이 두 가지 방법 모두 시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개조 완료. 이제 다시 출발하도록.]
루시가 양분을 아끼지 않고 투자하는 프로젝트답게, 34번은 채 몇 시간이 안 되는 시간에 부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고서는 다시 병력을 이끌고 리암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갔다.
“이럴 수가. 놈들이 또다시 왔다!”
“모두 일어나. 비상이다!”
당연히 요새는 다시 한 번 비상령이 떨어졌다. 모두가 직전의 전투로 소진한 체력을 채 회복하기도 전에 벌어지는 전투였다.
“모습이 많이 변했는데도 알아보겠네, 이 괴물 자식아. 과연 언제까지 살아 돌아올 수 있는지 좀 보자.”
리암 역시 탄식하며 검을 들고 나왔다. 표정에는 피로와 귀찮음이 가득했다. 불과 하루 전 쫓아낸 상대가 멀쩡해진 몸으로 다시 찾아왔으니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리암에게 34번과의 전투는 별다른 성과가 되지 않았으니까.
‘이놈이?’
그러나 서로 다시 한 번 검을 맞대게 되었을 때.
그 모습이 이전과 달라진 34번은 그 실력과 힘도 전과 달랐다.
공격은 더 묵직해지고, 움직임은 더 빨라졌다.
그것은 루시가 데이터를 바탕으로 더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개조한 육체가 제대로 작동한 탓도 있지만, 34번이 어느 정도 패턴이 있을 수밖에 없는 리암의 전투법을 빠르게 분석하고 그것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너도 뭔가 숨기고 있군!”
그는 히죽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마왕군이 자신이 가진 성좌의 힘처럼 성장과 관련된 모종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 덕이었다.
이러면 이야기가 다르다. 얻을 것 없는 전투가 궁금증을 해소할 수단이 된 것이다.
[리암의 전투가 생존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중.]
게다가 이 전투로 영향을 받는 것은 그 당사자들 만이 아니었다.
* * *
“새로운 영웅이라.”
리암이 싸우고 있는 최전방의 요새와는 조금 떨어진 곳. 출신 불문, 신분 불문 사방에서 몰려든 이들이 모여 만든 새로운 도시.
그만큼 혼란스러운 이곳은 불과 며칠 전까지 빠져나오기 힘든 깊고 큰 절망에 빠져 있었다.
사방에서 줄어들 기미 없이 몰려오던 변이체들은 물론, 한순간에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대부분의 세상을 점령한 마왕군에 대한 공포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공포심을 해소할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보였다.
소수의 영웅들로 구성된 특공대가 변이체들을 뚫고 마왕군의 둥지로 쳐들어 가 그곳에 큰 타격을 입혔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희망을 가져도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과거 대성녀가 등장하여 절체절명이었던 세상을 구해 낸 것처럼 새로운 영웅이 등장해 마왕군을 몰아낼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그 도시에 있던 크리스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누이인 유리아에게 알려 주었다. 지금 상황이 이벨리아가 나타나기 직전과 비슷하니, 제2의 이벨리아가 등장하여 다시 한번 대전쟁 시절의 기적을 재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정작 유리아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크리스는 그 실체를 전혀 모르고 있지만 유리아는 지금 절대, 온전한 그들의 편이 아니기에.
지금 그녀는 그저 임무를 받고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위장한 것뿐이다.
“하지만 마왕군의 둥지는 너무 강성해. 그런 영웅들이 더 등장하지 않는 한 힘들지 않을까?”
“가장 필요한 것은 결국 가능성을 볼 수 있는 희망. 그것뿐입니다.”
유리아가 슬쩍 입을 열자 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생존자들을 받아서 도시가 형성되기는 했지만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인 만큼 모든 것이 불안정하다. 식량, 행정 체계, 치안 등등.
전처럼 과격하게 믿음과 신앙을 강요하진 않았지만 교단은 당연히 자신들이 생존자들을 지배하려 했고, 기존의 신분이나 권력 같은 것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에 불만을 가지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과거 권력자였거나 통치자였던 이들이 유독 그랬다.
다만 지금까지 그 불만이 감히 표출되지 못하고 억눌린 것은, 그만큼 주변 상황이 암울했기 때문. 역설적으로 리암의 분전으로 상황이 조금 풀리자마자 내부의 문제가 터져 나올 판이었다.
“결국 그것을 덮으려면 더 큰 공적이 필요합니다. 모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강한 힘과 희망이.”
“다시 기사단에 들어갈 생각이니.”
“싸울 힘이 있는 자가 뒤로 숨기에는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유리아가 안타깝다는 듯 말하자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보면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은 침략종이라는 괴물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지구와 비슷한 면모가 있었다.
싸울 이들은 나서야 했다.
“계기만 있으면 됩니다. 이 모든 불안함을 딛고 사람들이 다시 단결할 계기만.”
“네가 그것을 위해 희생할 필요는 없어.”
유리아는 동생의 말에 안타깝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자기 자신이 몸담고 있기에 지금 크리스가 상대하려는 적이 얼마나 거대한지 알고 있으니까.
루시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그녀로선, 동생이 그냥 평범하게 살기를 원했다. 루시가 혹시라도 자신의 말을 들어 크리스를 죽이지 않는다 해도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전쟁이란 것은 그저 휘말리기만 해도 사람의 마음을 닳게 만드니까.
“영웅이 되려는 게 아닙니다. 의무를 다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의 의지는 단호했다.
처음 유리아와 재회했을 때. 하나뿐인 가족을 되찾은 기쁨에 그대로 은퇴하고 고향으로 가려던 젊은 기사는 이제 없다.
산전수전 다 겪고 자신의 역할을 깨달아 싸우고자 하는 진정한 기사가 있을 뿐이었다.
* * *
“훌륭한 사내입니다.”
“기쁘지만 기쁘지 않습니다. 그 애가 앞으로 어떤 상처를 받을지 아니까요.”
크리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탄식하는 유리아에게 나안이 다가왔다. 동족이기도 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크리스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만 엄밀히 말하면 크리스는 일부에 불과할 뿐.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움직임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안은 냉정한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부여받은 임무는 사회에 녹아들어 루시에게 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교단의 휘하로 모여든 생존자들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
“영웅으로 급부상한 리암 앤더슨이 전공을 세우면 세울수록 더 단단하게 뭉칠 겁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영웅들이 등장할 것이고 그들이 그렇게 등장한다면 당연히, 마왕군을 타도하자는 여론이 생길 겁니다. 과거 대전쟁 시절처럼.”
“어리석은.”
나안의 말에 유리아가 탄식했다. 무심코 곁눈질한 창밖은 나름 평화롭다. 반짝이는 태양 빛이 청명한 하늘에서 빛나는 좋은 광경이다.
그 평화를 누리면 되는 것이지만 이제 그 누구도 멈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될 것이라 생각은 했다.’
탄식을 끝낸 유리아는 쓰게 웃었다. 사실 지금 이 상황,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루시가 원한 것은 바로 격렬한 저항이었으니까. 처음부터 루시는 더 이상 자신과 급도 맞지 않는 그들을 진정한 적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과거 대륙의 숙적인 마왕을 타도했던 기억을 바탕으로 그들이 다시 싸울 준비를 한다면 루시는 기꺼이 그것을 받아 줄 것이다.
지금 이것도 루시의 의도에 가까웠다. 자신에게 최대한 유도하여 잡아먹을 수 있도록.
‘이 싸움은 끝은 어디지?’
유리아는 문득 끝에 대해서 생각했다. 영원한 싸움은 사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어느 한쪽이 밀려날 것은 확실하다.
다만, 아무리 상상해도 도저히 루시가 지는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어디 가십니까?”
“기사단에. 역시 그냥 보내기에는 마음에 걸려서 말입니다.”
유리아는 결국 자리를 옮겼다. 태연히 넘기려 해도 힘들었다. 크리스에게 그녀가 단 하나뿐인 가족이듯, 다시 돌아온 그녀에게도 크리스는 소중했다.
* * *
“자칫하면 교단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계산 결과 그들이 지금 시점에서 나설 확률은 26%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의 마음이라는 변수가 작용한다면 장담할 수 없습니다.]
루시는 유리아의 보고를 받았다. 루시가 경계하는 변수는 바로 리암의 전공으로 인해 사기가 오른 생존자들의 마음.
무난한 예측은 그들이 병력을 모집해도 일대에 득실거리는 변이체들부터 잡으려는 것이지만, 마왕군을 노리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뭔가 조치를 취할까요?”
[아직까지는 예상 범주니까, 지금 당장은 방치합니다. 그들의 업적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루시가 지금 모든 것을 걸고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세상에서 펼쳐질 전쟁. 방위군이 마지막 교신으로 본사에 지원을 요청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루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라비즈다에 배치한 병력들을 보충시켰다.
데이터에 집착하는 루시답게 이곳에서 이렇게 생산한 데이터를 그대로 다른 세상에도 적용시킬 생각이었다.
양측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다른 세상의 기술을 턱 하니 사용하는 루시에게 말려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