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숙적 (7)
지구에서도, 루시가 점령한 대륙에서도 각자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힘이 하나로 모인다. 그 과정에서 루시 본인도 타도하기 위한 그 대상이 되기도 했다.
루시는 그것을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보았다. 루시에게는 경쟁이야말로 모든 것. 앞서 나가기 위한 진화를 위해서 경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루시 본인이 쓰러트리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할 숙적은 좀처럼 나타나질 않고 있었다.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는 판단은 했었지만, 그 예상마저 벗어날 정도였다.
[설마 그들이 자신의 백성들을 버린 것인지.]
루시가 혼란스러워할 정도였다. 방위군을 격파한 이후, 이제 더 이상 그들에게는 루시의 병력을 막아 낼 수단이 없었다.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여러 도시들을 동시에 타격하고 카르투스 직원들은 물론 다크엘프들까지 수많은 이들을 잡아먹었으며 그 땅들을 둥지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고의로 난동을 부리며 방위군 결성을 이끌어 내고 그 방위군을 박살 낸 것도, 이후 방어 능력을 잃은 도시들을 천천히 습격하는 것도 모두 그들의 뒤에 있는 진정한 적을 이끌어 내어 잡아먹기 위한 계획이었을 뿐.
막상 그 적들이 잠잠하니 마주쳐서 소리를 낼 반대쪽 손뼉이 없어진 셈이다.
“버렸다는 건 조금 이해하기 힘든데. 중간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그들이 보낸 지원 요청을 그들이 듣지 못했다던가.”
[그것은 아닙니다. 이미 제대로 교신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아군이 자신들의 직원들을 공격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 보고를 받은 창현은 혹시 연락이 중간에 끊긴 것 아니냐고 말할 정도였으나 이미 루시는 그것과 관련해 증언을 확보해 둔 상태였다.
‘진짜 적’은 이미 루시의 존재를 알고 있다. 무슨 짓을 했는지도. 그런데도 이렇게 늦어지는 것이다.
* * *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곳에서 계속해서 지원 요청이 온단 말입니다! 의원님!”
“거 참.”
물론 늦어지고 싶어서 늦어지는 건 아니었다.
카르투스가 속한 세력 루브란. 그곳 휘하의 행성 하나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거대한 세력을 움직이는 의회의 의원을 움직이기 위한 설득이 계속되고 있었으니까.
“미지 행성 개발 및 탐사에서 사고가 생기는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잖소, 데니스.”
“물론 맞는 말이지만, 자료를 보여 드리지 않았습니까. 현지인들과의 단순한 마찰이나 사고가 아닙니다. 전쟁이란 말입니다.”
“최근 지분 다툼으로 많이 힘든 건 알지만 이 정도는 자체적으로 해결해야지. 그 변방 구석탱이 일에 연방군이 어떻게 움직인단 말이오.”
“지, 지분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닙니다, 의원님!”
의자에 앉아서 젊은 청년을 상대하고 있던 중년의 사내는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정작 데니스라 불린 청년은 지분 다툼이라는 말에 눈이 뒤집혔다. 분명 최근 들어 기업의 지분을 위해 후계자들의 알력 다툼이 심해지긴 했지만, 어쨌든 이건 그것과는 상관없는 진짜 위기 상황이었으니까.
“조치는 취해 주겠소. 어쨌든 기업의 재산과 직원들의 인명에도 피해가 발생한 바, 가만히 둘 수는 없겠지. 법적으로 문제없도록 해 줄 테니 카르투스의 이름으로 병기와 용병들을 모을 수 있을 것이오.”
“하, 일단 알겠습니다. 감사하군요.”
그는 마치 선심을 쓴다는 듯 데니스가 할 수 있는 일을 알려 주었다. 군대를 파견하는 건 안 되고 대신 그가 돈을 지출하여 용병을 모집해 파견하는 건 허락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데니스는 화가 났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이게 최선이었다. 굳이 정밀하게 계산하지 않고 머릿속으로 잠깐 생각만 해 봐도, 용병들을 긁어모으는 것이 개척지 하나를 통으로 날려 버리는 것보다 싸게 먹혔으니까.
게다가 단순히 돈만 걸린 것도 아니었다. 이번 개척지 사업은 그가 언급했듯 지분 싸움과도 큰 연관이 있었다.
“지금 당장 용병들을 모아 주십시오.”
사무실을 나온 데니스는 그 길로 통신을 걸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 지시했다. 카르투스가 직접 고용한 회사의 병력들에 더해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용병들을 더한다면 그 구색 정도는 충분히 군대 비스무리하게 만들 수 있었다.
* * *
“함선 24척, 그중 2척이 기함급 대형 함선입니다. 나머지 22척도 제각각에 개조를 거친 것들이긴 합니다만, 모두 전함이라고 부를 정도는 됩니다.”
“그건 안 중요합니다. 이길 수 있겠지요?”
“……세상 그 어떤 생물체가 전함을 이길 수 있단 말입니까.”
데니스는 급조한 군을 이끌게 된 사령관을 만났다.
데니스가 마왕군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영상 자료를 보여 주며 이길 수 있냐고 물었지만, 퇴역 군인 출신인 그는 승리를 자신했다.
생물체의 한계는 당연하다. 유기물로 이루어진 일개 생물체가 아무리 강해도 아무리 단단해도 강철과 화약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강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에테르를 자기 몸으로 다루는 초인들도 있는 마당에.”
“하지만 그 가디언들조차 단신으로 함대를 이기진 못합니다. 그럼 승전 소식으로 다시 뵙죠.”
사령관 에드문트는 걱정 말라며 이 젊은 고용주를 안심시키고 자리를 벗어났다. 급한 건 데니스만이 아니었으니, 그도 실적을 올릴 수 있는 전공이 필요하기는 했다.
“세나, 함대 출격 준비는 끝났나.”
[그렇습니다, 사령관님. 약속된 시간 안에 모든 이들이 모일 것입니다.]
“만남 이후 바로 출격한다.”
그는 걸어가는 와중에 통신기를 통해 누군가와 통신했다. 그의 물음에 답해 주는 목소리의 주인은 젊은 여성의 목소리.
그러나 다른 곳에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연결된 네트워크 통신망을 통해 어디에든 존재할 수 있는, 그가 신뢰하는 군용 AI 세나.
이번 작전에서 함께 할 그의 부관이었다.
[제공해 주신 자료를 전부 분석하였습니다.]
“그래? 어떻게 결과가 나왔지? 뭐, 흔하디흔한 우주 괴물 무리인가?”
함선에 실린 슈퍼 컴퓨터를 자신의 두뇌로 사용하는 세나는 에드문트가 미처 보지 못한 자료들을 찰나의 순간 전부 분석해 냈다.
다름 아닌 데니스가 제공한 루시와, 마왕군에 관련된 모든 자료들이었다.
[분석 결과 위험 등급 10등급. 세부 내용은 분석 불가능. 말 그대로 미지의 생명체들입니다.]
“음?”
그리고 인공지능답게 인간들보다 더 냉철하고 명확하게 분석한 결과를 제시하였다. 그 결과를 들은 그가 걸음을 멈출 정도였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지?”
[계산 결과는 명확합니다. 비록 자료의 양이 많지 않아 정확도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들이 보여 주는 전투 패턴과 습성, 위력 등을 분석하면 그들의 규격을 정확히 정할 수가 없습니다.]
세나는 마왕군을 측정 불가의 위험 세력으로 평가했다. 이런 경우가 없었기에 군인으로서 무수한 경험을 쌓아온 에드문트도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
“그 검은 괴물들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자료로 본 마왕군은 그냥 짐승 무리 그 자체였으니까.
초거대종과 하늘을 나는 함선체? 사실 그는 그런 거대한 괴수들과도 전투를 벌여 보았던 경험이 있었다.
“자세히 듣고 싶은데.”
그는 일단 자신의 함선으로 복귀했다. 부하들의 경례도 대충 받은 그는 서둘러 세나가 있는 지휘실로 향했고, 그곳에는 푸른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진 세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보여 주는 패턴은 결코 개체 단위로 이루어지는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목소리에 맞는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세나는, 손을 움직이며 허공에 화면을 띄웠다.
그곳에 나오는 영상은 바로 마왕군의 모습을 분석한 영상. 프레임 단위로 잘린 영상을 통해 세나는 마왕군의 행동 패턴을 단숨에 분석했고 그 과정에서 미묘한 통일성을 발견한 것이다.
“개체 단위로 이루어진 행동이 아니란 것이 뭔지 모르겠는데.”
“최소 지휘 개체가 있어 그것에 복종하거나, 각각의 개체가 한 몸처럼 움직이는 군체 생물일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군체 생물이라고? 이렇게 많고 거대한 놈들이?”
그 분석 결과는 상당히 정확했다. 에드문트는 마왕군이 무수한 이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군체 생물일 가능성이 있다는 세나의 보고에 눈을 크게 떴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다가가지 못했던 마왕군의 진실을, 발달한 AI인 세나는 약간의 영상만 보고 그 편린이나마 분석해 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따라서 적의 그러한 특성에 맞는 전술이 필요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단순한 괴물 무리라고 판단해서 전투를 벌였다가는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95% 이상입니다.”
“일단 알았다. 회의를 소집해 줘.”
침음한 그는 그 상태로 회의를 소집했다. 회사에 소속된 부대야 그의 명령에 따르는 충직한 이들이지만, 데니스가 모아 온 용병들을 자신의 휘하에 넣어 지휘를 듣게 만드는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령관님, 모두 모였습니다.”
곧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진 여러 사람의 얼굴들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각자의 함선을 이끌고 합류할 각 함선의 함장이자 지휘관들이었다.
* * *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이지만,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들이 단순한 우주 괴물이 아님을 알아 줬으면 하는군.”
“단순한 적이 아니라니요? 뭐, 위험 등급 8등급의 팔라스 같은 놈들입니까? 제가 봤던 놈들 중 그 기생충들만큼 끔찍한 놈들이 없었는데.”
직전에 세나에게서 마왕군의 정체에 대해 조금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에드문트가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신중하게 꺼낼 때. 거친 인상의 사내 하나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신의 함선을 이끌고 합류한, 모집된 용병단의 단장 중 하나였다.
“자료가 부족해 정확하게 판단하기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측정된 등급은 추정 등급 10등급이다.”
“……예?”
그는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차며 세나가 분석한 결과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아무리 뛰어난 인공지능이라도 군용으로 만들어진 최신형이자 군함 전체를 자신의 두뇌로 쓰고 있는 세나에는 미치지 못하니 부정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 하지만 사령관님. 10등급이라니요. 8등급인 팔라스만 해도 연방군이 동원되어 행성 반절과 정거장 여럿을 소각하고서야 진압하는 데 성공했는데.”
“추정일 뿐이니 적어도 그 실체가 어떤지는 확인해야지. 우리 목적은 그 개척지의 시설을 지키고 현지인들을 포함한 인명을 보호하는 것이니.”
함장들은 당황해서 이게 맞냐고 물었다. 회사에서 고용한 보안대에 용병들을 끌어모아 급조한 군대로 맞서는 게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불안해하는 이들에게 세나의 분석도 정확한 것은 아니며 더 많은 자료와 결과를 위해서라도 직접 가서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시간을 끌면 끌수록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위험해진다. 최대한 빠르게 그곳으로 가도록 하지.”
그는 함대 전체를 발진시켰다. 우주 공간을 가로지르기 시작한 그들이 공간을 뛰어넘어 향하는 곳은, 마왕군이 점령한 행성 다크엘프들의 행성 라비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바로, 루시가 그토록 기다리던 ‘진짜’ 적들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