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숙적 (8)
“방어막이 뚫렸다!”
“피해!”
마침내 본사에서 제대로 된 지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한 그때, 라비즈다는 이미 지옥도였다. 정확히는 루시와의 힘 대결에서 완패한 개척지의 직원들과 현지인인 다크엘프들에게만.
루시는 생산을 늘린 병력으로 여러 개의 도시들을 동시에 공격했고, 이미 방위군이 밀려 버린 그들은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삶의 터전과 자신들의 목숨을 내어 줘야만 했다.
[설마 아직까지도 조치를 취하지 않다니,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이 세상 전체를 점령할 수 있을 겁니다]
이는 루시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사실 지금 루시는 전력을 다하는 것도 아니었다. 분명히 적들이 제대로 된 지원 병력을 보낼 것이라 예측하고 초 단위로 생산되는 막대한 에너지를 비축하며 정말 최적의 효율로만 공성을 진행하고 있었으니까.
“너무하긴 하네. 자기네 직원들인데 이렇게 헌신짝처럼 버리려 하다니.”
루시와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보던 창현도 그들이 라비즈다를 아예 포기한 줄 알고 혀를 찼다. 그만큼 상황은 압도적이었다.
[이 이상 시간이 끌린다면 다음 계획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이 쳐들어와 주지 않는다면 아군이 먼저 그들의 본거지로 쳐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아직 기술이 부족하다며.”
루시는 가만히 있을 생각은 절대 없었다. 그들이 자신을 공격해 주지 않는다면 자신이 먼저 그들을 공격할 작정이었다.
싸움, 혼돈. 루시는 마왕답게 오직 그것을 원했다. 그러나 다른 마왕들과는 달리 싸움과 혼돈은 루시의 목적 자체는 아니었다. 그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과정에 불과했다.
문제는 지금 루시에게는 아직 먼 우주를 가로질러 적을 타격할 기술이 부족하다는 것.
적들이 가진 워프 기술을 연구하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막상 워프 기술을 가진 기함은 분석할 기회조차 없었다.
[불완전한 차원문 기술. 그것을 이용하여 실마리를 찾는 방법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루시는 최후의 방법으로 차원문 마법을 언급했다. 시 간제한이 있는 불완전한 기술이지만, 어쨌든 다른 세상으로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 그것으로 어떻게든 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도시를 공격하던 일부 병력들이 타격을 받았습니다. 확인 결과 다량의 극초고음속 미사일 포격으로 추정. 미사일이 쏟아진 방향은…… 하늘입니다.]
다만 결과적으로 그럴 일은 없었다. 루시가 한창 차선책을 고민하고 있을 때.
도시를 공격하던 병력 일부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포격에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
지금 라비즈다 방위군은 그런 포격을 가할 여력 따위가 없으니 이것이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드디어 루시가 원하던 적들이 도착한 것이다.
* * *
“징그러운 놈들입니다, 함장님. 온통 새까만 것이.”
“징그러운 건 인정한다. 그래도 일개 벌레들일 뿐 아닌가?”
정해진 좌표로 대규모 워프 포탈을 여는 첨단 기술의 정수. 그 포탈을 통과한 하나의 함대가 단숨에 라비즈다 상공에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빗발치는 구조 요청과 지원 요청들. 사령관 에드문트는 당연히 지금 공격 받고 있는 도시들을 구원하기 위해 급히 함선들을 파견해, 가져 온 미사일 포격을 퍼부었다.
“많기도 하군. 계속 쏴!”
그의 지시를 받은 용병단의 단장이자, 자신의 함선을 가지고 이번 작전에 참전한 함장 발터는 마왕군의 모습을 보고 질색하며 계속해서 포격할 것을 명령했다.
[드디어.]
루시는 그들의 등장을 반겼다. 하지만 동시에, 병력들을 움직여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움직였다. 굳이 병력들을 생으로 던져 줄 이유는 없으니까. 이미 루시는 목적을 이루었다.
“함장님, 놈들이 몸을 피하고 있습니다. 거리가 멀어 살상 효율이 떨어집니다.”
“고도를 낮춰라. 적어도 우리 눈에 보이는 놈들은 다 처리해야 할 것 아니냐.”
“예? 하지만 사령관의 명령은 자리를 지키며 도시를 보호하라는…….”
“멍청한 놈아. 내려가서 좀 싸운다고 땅에 붙어 있는 저놈들에게 우리가 무슨 문제라도 생기겠느냐.”
발터는 마왕군이 도주하는 모습을 보고 비웃으며 마치 사냥하는 기분으로 더 내려가서 마왕군을 잡고자 했다. 사령관의 명령과는 조금 다른 그 명령에 놀란 부관의 눈이 커졌지만, 그는 오히려 부관을 타박했다.
“그렇지 않소?”
“도주하는 놈들을 놓치면 그게 더 아깝겠지.”
함께 움직이던 다른 함선의 함장들도 오히려 발터의 의견에 동조했다. 결국 에드문트가 파견한 함선들은 일제히 고도를 낮추며 포격과 미사일 사격을 계속했다.
[그들이 가진 화력이 강력하여, 기존 방식으로는 제압 불가능.]
아무리 일개 용병단이라지만 장비나 함선 자체는 군 용장비가 맞기에 방위군이 가지고 있던 낡아빠진 개조 함선과는 화력부터가 달랐다.
루시는 도시를 공략하던 소수 병력으로는 상대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일단 병력을 최대한 뒤로 물렸다.
애초에 지금 루시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은 그곳만이 아니었으니.
“세나, 폭격을 시작해라. 저 거대한 면적이 전부 놈들의 둥지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가장 효율적인 좌표 계산 완료. 포격 시작.”
소수 함선만 보내 도시들을 지키게 만든 에드문트가 기함을 포함한 모든 함선을 이끌고 루시의 본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과거 감염체들이 점령하고 있던 땅으로 다가와 공격을 시도한 탓이다.
* * *
“대공습이다.”
[무차별 폭격이 아닙니다. 가장 효율적인 파괴율을 계산해 실행하는 정밀한 폭격입니다.]
창현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무수한 폭탄들을 보고 기겁했다. 모르는 이가 보기에는 마치 무차별한 대공습으로 보일만한 폭격이다.
하지만 루시는 그것들의 패턴을 단숨에 역산하여, 그것이 잘 계산된 공격임을 파악했다.
[우선 방어하겠습니다.]
진정한 하이브마인드의 힘을 보여 주겠다는 듯, 루시는 그 거대한 둥지 전체를 즉각적으로 움직였다. 미리미리 둥지 사이사이에 심어 둔 타락 세계수는 둥지에 저장되어 있는 막대한 에너지를 마력으로 치환하여 방어막을 펼쳤다.
[다중 중첩 즉발식 방어막.]
그것도 단순한 방어막도 아니었다. 루시가 특유의 연산력을 동원하여 마법과 결합한 이 방어막은 여러 겹의 방어막을 겹쳐 그 방어력을 극대화한 것이다.
“폭격 결과 파괴율 12% 미만.”
“뭐?”
첫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당연히 에드문트를 비롯한 이들은 경악했다. 설마하니 반의반도 부수지 못할 줄은 짐작조차 못했으니까.
“사령관님, 적들이 에테르 에너지를 사용해 포격을 상쇄했습니다.”
“그게 말이 되나? 우주 괴물이다. 벌레들이라고. 그런 놈들이 에테르 에너지를 사용한다고?”
“그런 사례가 없는 건 아닙니다.”
“그, 그래. 분명 있기는 있었지. 에테르 에너지를 흡수해 변이를 일으킨 변종이라던가. 하지만 그놈들은 결국 돌연변이였고 개체 단위였어. 지금처럼 군체 단위가 아니었다고.”
AI인 세나는 당황한 이들에 비하면 데이터를 기반으로 더 냉철한 평가를 내렸다. 에드문트는 황당해하면서도, 입술을 깨물었다.
“세나! 좌표를 다시 계산해라. 놈들이 설령 에테르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해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설마 저 넓은 대륙급 면적을 전부 보호할 수 있을리 없어.”
“알겠습니다. 가능한 공격 지점이 겹치지 않도록 폭격을 유도하겠습니다.”
그는 지금 전 함대를 컨트롤하고 있는 중앙 AI가 된 세나에게 다시 좌표를 계산해 공격하라 지시했다.
[꽤 성능 좋은 프로그램을 쓰고 있는 모양입니다.]
루시는 그것을 감지하고 빠르고 신속하게 다시 한 번 자신의 방어 좌표를 바꾸었다.
그러면서 피식 웃는 여유까지 보였다. 아직 상대의 공격을 주도하고 있는 세나라는 AI의 존재를 모르는 루시는 자신을 공격해 온 원정군이 성능 좋은 프로그램을 쓰고 있다고 짐작했다.
“이번에도 적들이 반응했습니다. 곧바로 다음 좌표를 계산합니다.”
[계산 싸움이라도 하자는 것인지.]
초월적인 거대한 생체 뇌를 자신의 연산 장치로 쓰고 있는 하이브마인드 루시와 함선에 실린 초고성능의 컴퓨터를 자신의 두뇌로 사용하는 군용 AI 세나의 계산 싸움이 대륙급 면적에서 초 단위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세나는 함대를 빠르게 이동시키며 가장 방어하기 어려운 지점들을 계산하여 사방으로 포격을 유도했고, 루시는 그것을 가볍게 따라가며 모든 폭격들을 방어해 냈다.
양분만 충분하다면 루시는 이 싸움에서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적들이 또 다시 폭격을 방어해 냈습니다. 초월적인 속도의 유기적 반응을 볼 때, 저와 맞먹거나 그 이상의 계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적들 사이에 있는 것 같습니다. 추측기로 모든 둥지와 병력을 통솔하는 거대한 지휘 개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는 거냐?”
“지금까지 수집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세나는 이 싸움을 분석하여 에드문트에게 루시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아채 보고했다. 하지만 당연히 에드문트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세나는 AI였다. 바꿔 말하면 데이터를 너무 맹신하기에 그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에드문트의 상식에는, 세나 같은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그 근본을 두고 마왕이라는 특수한 존재로 각성했으며 탄생한 그 순간부터 이런 생존 경쟁을 무수하게 거쳐 오고 주변의 모든 것을 먹어치워 여기까지 생존해 온 초생물의 존재는 당연히 없었으니까.
[아무래도 적진에 저만큼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사고가 가능한 존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쓰더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뇌가 형편없는 이상 티가 나기 마련인데, 상대의 공격에는 그런 ‘인간스러움’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설마 AI인가?”
물론 루시 역시 세나의 존재를 알아채고 보고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처한 상황도 지위도 에드문트와는 달랐지만, 또 다른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는 루시의 말을 믿어 주었다는 것.
지금까지 매 순간순간을 증명하면서 성장해 온 루시의 성장을 모두 지켜본 입장에서는 당연히 루시를 믿었다.
“막는 데 어려움은 없잖아. 저들도 계속 저 위에서 폭탄만 떨어트릴 리는 없어. 폭탄에는 수량 제한이 있을 테니.”
[맞습니다. 적들은 결국 함선에 달린 주포로 포격을 시도할 것입니다. 그때가 반격의 기회입니다.]
루시는 언제까지고 맞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버티다 보면 결국 참지 못한 상대가 고도를 내려 더 다가올 것이니, 그때 일제히 포격함은 물론 대기시키던 함선체들을 동원해 일제히 덮쳐 공격할 계획이었다.
[꼭 한번 보고 싶습니다. 상대를.]
동시에 루시는 세나를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쩌면 세나는 처음으로 만난, 루시의 동족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