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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190화 (190/200)

190화 숙적 (10)

“다를까 살짝 기대했는데, 생각이나 행동이 별로 다른 것 같지는 않네.”

루시는 분명 상대방에 자신과 비슷한 존재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상대의 기술력을 생각했을 때 훨씬 발달한 인공지능이 있어도 이상한 건 아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 인공지능이라면 혹시 지금까지 상대했던 적들과 다른 행동을 보여 줄까.

하지만 결국은 아니었다. 상대의 행동은 어째 내가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뻔했다.

[아무리 좋은 도구가 있어도, 아무리 뛰어난 마법 체계가 있어도 그것을 사용하는 이가 어리석다면 그 효율의 반도 채 내지 못합니다. 설령 뛰어난 계산력을 가진 존재가 그들을 보조한다 해도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존재가 인간이라면 결국 인간 수준에 불과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해 못 할 건 아니지. 인공지능에 지배당하려고 인공지능을 만드는 건 아닐 테니까.”

루시의 말에 쓰게 웃었다. 당장 루시의 근원이 되는 박스디 역시 본래 목적은 사람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도구일 뿐.

나는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온 루시의 성장을 그 옆에서 전부 지켜보았으니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당장 다른 사람들은 루시라는 존재를 거부할 확률이 높았다.

‘생각 좀 해 봐야겠는데.’

이것은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훗날 루시가 내 의도대로 지구로 와서 침략종들과 싸워 줄 때.

만약 루시가 자신의 정체를 공개하고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지구인들과 나는 같은 동족이지만, 나는 사실 사람들에게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루시가 지금까지 어떤 도움을 주었든, 앞으로 더 많은 도움을 주려 하든 루시가 자신들을 통제하거나 간섭하려 들면 배척당하거나 적대 당할 게 뻔하다. 그럴 바에 루시는 처음부터 정체를 숨기고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게 낫다.

루시 역시 타고난 지배자. 누군가에게 조종당할 존재가 아니니까.

[적들이 무인기 등을 동원하여 당해 버린 함선들을 구출하려 하고 있습니다. 예상 승률은 55%.]

“너무 낮은데?”

[무인기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물론 그 이야기는 지금 루시가 진행하는 모든 일이 다 잘 끝났을 때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

나는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밑으로 내려와서 포격하려던 일부 함선들을 성공적으로 잡아먹는 데 성공한 루시는, 결국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적 본대와도 싸우는 중이었다.

그 과정에서 상대방의 함선에서 사출된 무인기들의 어지러운 움직임이 아군에 상당한 방해가 되었다.

마치 기계같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움직임. 수많은 정보를 동시에 처리하며 최대한 효율적으로 움직여 사방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피해 내는 그 실력.

“인공지능이 조종하는 거네.”

그 모습이 마치 루시가 비행종을 조종하는 모습과 비슷했으니, 나는 단번에 그 정체를 알아보았다.

[적을 몰살하겠다는 계획은 힘들 것 같습니다. 최대한 타격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바꾸겠습니다.]

정체모를 인공지능을 필두로 한 적의 반격이 예상외로 거세다. 루시는 계획을 실시간으로 변경하여 바뀌는 상황에서도 가장 효율적인 답을 찾아내었다.

[일반종 몇을 내부에 투입했지만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휘둘리는 모습이 포착되었으니, 상위종을 내부에 투입하는 방법에 과연 상대가 정말로 대응하지 못하는지 실험해 보겠습니다.]

게다가 그런 와중에 루시는 아직 들고 있는 패가 많았다. 그 패들을 하나하나 시험해 보며 상대의 한계를 알아보고, 그 데이터를 모조리 빼 먹는 중이었다.

* * *

“함선을 포기하도록. 함선까지 구하는 건 무리다. 승무원들만 서둘러 탈출선에 탑승하라 전해.”

아비규환 그 자체인 전장. 사령관인 에드문트는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나름의 최선의 판단을 하는 중이었다.

이미 사방이 마왕군으로 뒤덮였다. 살아있는 거대한 오징어처럼 촉수를 이용해 함선에 달라붙는 함선체들부터, 빼곡하게 날아와 무인기들과 싸우는 비행종들까지.

자신감 충만하던 용병단의 함장이던 클로제의 함선은 이미 여기저기 폭발을 일으키며 반파되어 지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지옥인가?’

많은 경험을 쌓아 온 군인인 그 역시 이를 악물고 식은땀을 흘릴 정도였다.

“대체 왜 주도권을 못 잡는 거지, 세나? 함선과 비슷한 거체들은 모를까, 최소한 저 날짐승들 정도 잡을 화력은 충분하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현재 무인기들을 조종하고 있는, 인공지능 세나를 다그쳤다. 그의 상식으로 세나가 조종하는 무인기들이 밀릴 리가 없으니까.

무인기들이 가진 화력과 세나의 철저한 조종이라면 충분히 주도권을 잡고 적들을 밀어내는 게 정상이었다.

“적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군의 포격을 모두 따라왔듯 지금 아군의 움직임을 전부 마크하고 있습니다.”

“그, 그게 말이 된다고?”

그런 상황에서 세나는 덤덤하게 사실을 전했다. 굳이 말로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세나는 그에게 영상 하나를 보여 주었다.

자신이 조종하는 무인가가 발사한 미사일을,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완벽하게 산개하였다가 다시 뒤를 들이치는 마왕군 비행종들의 모습을.

개체 하나가 그런 민첩한 모습을 보이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마왕군이 보여 주는 움직임은 그런 게 아니었다.

“적들의 지휘 체계가 거대한 둥지를 넘어서, 저런 작은 병사 하나하나까지 미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잘 이해가 안 되는군. 그러니까, 적들 중에 너와 비슷한 존재가 있다?”

세나는 하이브마인드의 존재에 강한 확신을 가졌다. 그 하이브마인드를 세나와 비슷한 인공지능으로 인식한 에드문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탄식할 뿐이었다.

살아있는 생물체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단 하나의 존재에게 통솔되고 있고, 그 단 하나의 존재가 그 수많은 이들을 동시에 조작할 수 있을 만큼 막대한 연산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 믿기 힘든 일이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지적 생물체라는 것 아닌가?”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교신을 시도해 볼까요?”

그의 생각은 거기까지 미쳤다. 만약 세나가 추론한 하이브마인드가 실존한다면 그 존재는 대화가 통하는 수준의 지능을 가졌을 것이라고.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가능성은 충분했다.

“사령관님! 로튼함에 외부 침입이 발생했습니다!”

“뭐?!”

문제는 그들을 향한 루시의 적대가 이미 충만하다는 것. 그들의 추측대로 분명 루시는 그들과 대화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굳이 그러지도 않았다. 그들과 자신의 목적이 양립하는 게 불가능함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덕분에 그들은 연달아 몰아치는 루시의 공격에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 * *

“저, 저게 뭐야.”

“뭐기는 괴물이지. 전부 전투 준비!”

로튼함은 에드문트가 타고 있는 기함을 호위하는 두 번째로 큰 전함. 그곳에 루시가 파견시킨 상위종들이 나타났다.

보다 비행에 특화된 이 하피 타입 상위종들은 편대를 이루어, 함선에 둘러쳐진 에테르 방어막을 일부분 뚫고 마침내 함선 외벽에 착지하는 데 성공했다.

승무원들은 기겁을 하며 상위종들을 향해 화력을 퍼부었지만, 강심을 가진 상위종들은 일제히 마력을 끌어올려 그 일격들을 모두 방어해 냈다.

“아니, 뭐 이런 변종들이 이렇게 많이…….”

그들 입장에서는 상상도 못 한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들은 에테르라 부르는, 마력을 다루는 괴물의 존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특별한 이름이 붙을 정도의 변종에 불과했으니까.

더욱이 그런 괴물들이 하늘을 날아와 이렇게 함선에 붙어 버릴 것이라는 건 더 충격적인 일이다.

“별거 아닐 줄 알고 따라오겠다고 한 건데, 이거 참.”

그때 나타난 것이 바로 그였다. 평범한 사람처럼 생기긴 했지만, 결코 평범하지는 않은 사람. 그들이 속한 루브란은 꽤 많은 행성들이 속한 거대한 연합체. 당연히 그 주민들의 종류도 다양하다.

이곳의 원주민인 다크엘프들처럼 태생이 특별한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종족이 다르든 출생이 다르든 특출나게 강한 이들도 분명 존재했다.

[저 사내가 가디언이라 불리는 그들의 상위종인 모양입니다.]

함선에 침투시킨 상위종들의 눈으로 이것을 보고 있던 루시 역시 그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습득한 정보들에 이미 그들에 대한 내용도 있었으니까.

그들은 지구의 각성자들이나 대륙의 기사, 마법사들처럼 특별한 힘을 가지고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는 강자들이었다.

“그……래. 당장 다크엘프들이랑도 잘 어울려 살더만 없는 게 더 이상하지.”

루시와 함께 이것을 지켜보던 그 역시 머리를 긁적였다. 이미 알고 있던 만큼 굳이 놀랄 필요도 없었다.

[시험해 보겠습니다. 과투자인 것 같습니다만.]

루시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향한 공격을 시도했다. 하피 타입 상위종들이 일제히 사방에서 달려들어, 그를 향해 하나의 생각을 공유하는 마왕군만의 협공을 시도한 것이다.

“이, 이놈들이!?”

그는 당황하여 서둘러 자신의 힘을 끌어올렸다. 전신에서 타오르는 화염이 사방으로 폭사했으나 한발 늦었다.

그 정도 공격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상위종들이 날카롭게 세운 깃털과 강인한 발로, 그의 몸을 두들겨 산채로 찢어 버린 것이다.

애초에 이런 근접전 자체는 루시가 그 어떠한 형태의 전투보다 많은 경험을 쌓아 이골이 난 전투였다.

[그리 강하지 않았습니다. 계산해 보면, A급 끝자락 정도.]

“티어를 측정해 봤다고? 네가 본 S급은 누군데.”

[지금 이 순간에도 34번과 싸우고 있는 리암, 단신으로 둥지를 폭격하고 다니는 이벨리아 정도입니다. 이지연도 제 기준으로는 A급을 넘을 수 없습니다]

애초에 이런 식의 전투에서 루시가 인정한 진짜 강자들은 몇 없었다.

“피해를 감수하고 함포로 포격해야 합니다. 그것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

“예!? 하지만!”

그리고 이 처참한 결과를 지켜보던 이는 루시와 창현만이 아니었다. 믿고 있던 든든한 가디언이, 적들의 일격에 단번에 찢겨 나가자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절망과 불안함이 엄습해온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에드문트는 세나의 제안에 따라 기함의 함포로 상위종들이 탄 함선을 포격하라 지시했다.

“지금까지 다 봤으면서 아직도 놀랄 기색이 남아 있나? 당장 쏴! 그리고 빠르게 철수한다. 저 괴물들은 지금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적들이 아니다!”

에드문트는 화를 내며 부하들을 닦달했다.

당장이라도 몸을 빼야 최대한 전력을 온존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결국 실제로 그들은 아군 함선을 향해 함포를 발사했고, 그 압도적인 화력으로 상위종들을 방어막째 증발시키며 아군 함선 역시 함께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 버렸다.

“빨리, 최대한 빨리 후퇴한다. 세나, 네가 엄호해라.”

그러면서 전 함대에 고도를 높이라 명령했다. 이 과정에서 활약한 것도 세나가 조종하는 무인기들이었다.

몸을 던져 가며 명령을 수행한 무인기들 덕분에 함대는 일부 함선들만 잃은 채 어떻게든 고도를 올려 우주로 향해 도주할 수 있었다.

[우주로 가면…… 도망갈 수 있을 줄 알고.]

하지만 루시는 그들을 거기서 놔 줄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전멸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더 큰 먹이를, 더 많은 기술을 가지고 올 테니까.

루시는 자기 마음대로 정한 자신의 숙적들을 향해 자신의 병력들을 그대로 올려 보냈다. 땅을 넘어, 하늘을 넘어, 더 높고 더 넓은 그곳으로.

[우주.]

마침내 루시는 그곳에 닿았다. 한 단계 더 진화했음을 스스로 다시 한번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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