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끝없는 진화 (1)
‘방구석에서 이게 뭐하는 짓인지.’
루시의 성장은 곧 나의 성장. 루시는 화면 가득히 우주를 보여 주었다. 별이 있고, 태양이 있고, 어둠이 있는 그런 곳을.
이 풍경 자체가 증명이나 다름없었다. 우연찮은 계기로 마왕이 되어 버린 비서 인공지능이 여기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루시와 함께한 나 역시 변했다. 자그마한 살덩이 하나에서 시작해, 어느덧 강인한 우주 세력의 군대를 위협할 정도로 커진 루시의 성장에 비하면 사실 그리 크지 않은 변화지만 나 같은 천상 소시민에게 이 정도면 엄청난 격변이었다.
‘나도 노력했다.’
루시의 말도 안 되는 성장에 발맞춰 주기 위해, 그리고 그것에 어떻게든 도움이 되기 위해 나는 그동안 열심히 뛰었다.
아직 부모 치맛자락도 벗어나지 못하던, 졸업을 앞둔 일개 대학생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움직이며 여기저기 위험한 곳이란 곳은 다 찾아다니고 경험을 쌓은 베테랑이 되었다.
지금 연결점인 휴대폰을 통해 루시를 보고 있는 곳은 결국 좁은 방 안이라는 점에서 이전과 다를 바 없지만 나라는 존재는 과거와는 엄연히 달라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갑작스럽게 탄생한 내게 의지하던 자그마한 의지를 위해서.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
[염원하던 목적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이 드넓은 세상에서 우리는 고작 한 걸음 내디뎠을 뿐입니다.]
“그래. 너는 만족하지 못하겠지.”
물론 꽤 큰 감흥을 받은 것 같은 루시에게 이 모든 것은 과정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아니 과연 루시에게 끝이란 개념이 존재하긴 할까? 성장이 멈춘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데.
심지어 그것은 루시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싫어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잡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과연 앞으로 루시는 어떻게 될지, 나는 어떻게 될지, 시간이 더 많이 흘러서 내가 죽는다면 루시는 어떻게 될 것인지 등등.
혹시 하는 생각에 아직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다. 입이 근질거릴 때마다 억지로 생각을 지우고 눈앞의 현실에만 집중했다.
“아직 여유 부릴 때도 아니잖아. 상대는 아직 멀쩡해 보이는데.”
[바로 공략을 시도할 것입니다.]
대신 나는 화면에 보이는 다른 이들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목숨을 걸고 루시와 경쟁을 펼치는 경쟁자들.
지금까지 루시와 겨루었던 상대들은 모두 그 생존 경쟁을 이기지 못하고 패배하여 잡아먹히고 멸망당했다.
과연 그들은 어떨까. 그들 입장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모르겠지만, 루시에게 이 전쟁은 사실 너무나 당연한 행위였다.
자연에서 먹이와 서식지를 놓고 경쟁하는 것은 법칙 그 자체였으니까.
“좀 놀랐으려나? 설마하니 네가 우주까지 쫓아올 줄은 몰라서?”
혀를 찬 나는 굳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당연히 루시를 응원하고 할 수 있다면 돕는 입장. 그들은 희생당할 수밖에 없다.
이미 많이 봐왔다. 루시가 이룬 업적과 수많은 군대는 그 배 이상의 피를 흘려 만들어진 저주와 피의 군단.
기존의 상식대로 판단한다면 루시는 극악무도한 재앙 그 자체. 그러나 나는 차마 루시를 악마라 말할 수 없었다.
내 눈에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하나의 생명에 불과했다.
* * *
“놈, 놈들이 쫓아왔습니다. 놈들이 옵니다! 이곳까지!”
“이런, 미친.”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카르투스의 군대가 허겁지겁 고도를 올리며 우주권까지 피신한 이유는 마왕군이 그곳까지는 쫓아오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
실제로 마왕군은 그들이 고고도에서 폭격을 진행할 때는 굳이 나서지 않고 방어만 했다.
하지만 지금, 루시는 그런 그들의 허를 찔러서 그대로 우주권까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갔다.
우주라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마왕군은 이미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신체적 조건들을 달성해 둔 상태다. 함선체들의 추진력 역시 대기권을 벗어나는 데 충분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 빼곡하게 올라온 마왕군 함선체들이 앞뒤 재지 않고 대피한 카르투스의 함대를 다시 한번 포위했다.
[이번에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루시는 여기서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그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포위한 상태에서 압도적인 숫자를 이용한 화력전과 주특기인 근접전으로 일말의 여지를 주지 않고 몰살하는 것이 목표였다.
“버텨라……. 그리고 당장 본성에 연락해라. 이곳에 절대 풀려서는 안 될 재앙이 있다고!!”
사령관 에드문트는 소름이 돋은 상태로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서둘러 통신을 보내라고 재촉했다.
마왕군을 우주에 풀어 놓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본국의 정보가 마왕군에 넘어가면 안 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왜 하필.’
마왕군과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는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로서는 상상도 못 한 곳에서 상상도 못 한 존재와 싸우게 된 셈이었으니.
“사령관님, 예측 승률 20% 미만입니다. 더 떨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함은 지금이라도 워프하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가장 강한 기함이 혼자 빠지면 남은 이들은 어떻게 되겠나. 몰살이다. 절대 그렇게 둘 수는 없어. 저런 괴물들에게 질 수는 없단 말이다.”
함대를 통솔하고 있는 AI인 세나는 에드문트에게 그가 타고 있는 기함이라도 먼저 빠져나갈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눈이 흔들린 그는 그것을 거부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효율보다는 인정과 희망에 걸기로 결정한 것이다.
“여기서 버틴다. 우리가 보낸 자료를 보았다면, 본국에서 지원을 보내지 않을 리가 없다! 반드시 저 괴물들을 막아야 한다. 지상에 있는 이들, 그리고 우리 뒤에 있는 이들을 지키려면.”
그는 전 함대에 알려 이곳에서 버틴다고 선포했다. 어차피 모든 전함들이 한데 모여 싸우는 수밖에 없다. 외딴 우주에서 도망갈 방법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사령관님, 그렇다면 제 모든 권한을 해제해 주십시오. 모든 시스템을 제가 움직여 전투에 임하겠습니다. 대신 내부 인력들은 보나 마나 내부 침투를 시도할 적들을 막는 데 동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 내가 허락하지. 네 뜻대로 조종해서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어라.”
결국 결사항전을 선택한 그의 의지에 따라 세나는 차선책을 택했다.
자신이 여기 있는 모든 함대의 시스템을 틀어쥐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저 강한 적들에게 대항하겠다는 뜻이었다.
“잠깐만. 근데 용병단 출신 함선들은 우리 시스템과 전부 이어져 있는 게 아닌데?”
“상황이 급박하여 현재 각 함선 주 시스템 해킹 진행 중. 해킹 진행률 67%.”
“뭐?”
그러다 문득 걸리는 점을 발견한 그에게 세나는 태연히 답하며 그의 권위를 빌린 미친 짓을 시전했다.
* * *
“하, 함장님!”
“이게 무슨 짓이지!? 함선 시스템을 멋대로 해킹하다니! 사령관!”
안 그래도 상황이 급박한데 모든 통제권이 세나에게 넘어간 함선의 함장들은 크게 놀라 반발했다.
세나는 자신보다 하위 프로그램인 함선들의 중앙 통제 시스템 정도는 손쉽게 해킹하여 자신의 손에 틀어쥐었고, 곧 전 함대의 모든 것을 손에 넣게 되었다.
무기 시스템, 운행 시스템, 통신 시스템 등등.
이제 세나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세나의 사용자인 사령관 에드문트뿐이다.
“승리를, 아니, 생존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니 따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안 보이나!”
그는 세나의 판단을 나무라지 못하고 일단 반발하는 이들을 찍어 눌렀다. 후에 어떤 일이 있든 일단 지금 살아남는 게 우선이라는 계산에서였다.
“정말 가능성 있는 건가.”
“계산 불가. 아직 데이터가 부족한 미지의 영역입니다.”
진이 다 빠진 그가 세나를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푸른 홀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젊은 여인은 그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애매한 답을 내뱉을 뿐이었다.
[적 함대의 움직임이 극적으로 변화.]
그리고 이런 함대의 문제는 곧 외부에서 그들을 관찰하던 존재도 단번에 알아차렸다.
루시는 세나가 통제하게 된 함대의 움직임만을 보고 지휘하는 존재가 그 종족부터 바뀌었음을 확신했다.
[조금 더 재밌어질 것으로 추정.]
“재미?”
덜떨어진 인간들이 세나가 가진 가능성과 능력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한 루시는 당연히 이 상황에 강한 흥미를 느꼈다.
정작 루시의 명령대로 출격을 준비하는 라온이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거릴 정도였다.
[전군 돌격. 과연 적이 어떤 방식으로 받아칠지 분석할 차례입니다.]
세나의 존재와 그 한계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루시는 자신이 먼저 선공을 걸었다. 동시에 그 명령을 받은 마왕군의 함선체들이, 일제히 그 주둥이를 겨누고 카르투스의 함대에 달려들었다.
* * *
“사격 시스템이 파손된 함선으로 방어를, 멀쩡한 함선들로 화력을 지원. 모든 무인 장비 동시 사출.”
“이런 미친! 진짜 미쳤소! 우리를 고기 방패 삼는다니!!”
고작해야 십여 척의 함선으로 이루어진 함대의 몇 배에 달하는 마왕군의 움직임에 맞춰 함대도 대응에 나섰다. 세나는 오직 승리라는 목표를 위해 가장 효율적인 전술을 시도했다.
그 과정에 소수의 의견이나 사정 따위는 당연히 묵살당했다. 세나의 목적은 오직 전쟁의 승리. 희생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감수한다.
“후.”
세나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에드문트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떨궜다. 지금은 이게 유일한 희망이니 차마 막을 수 없었다.
“예상대로 적들이 방어를 위해 전면에 배치한 함선들로 내부 침투를 시도합니다. 내부 방어력 미달함선 총 다섯.”
“놈들의 근접 전투력이 상상 이상이다. 저걸 봐. 검을 쓴다고? 창을 쓰는 놈도 있다. 발차기로 격투술을 구사하는 놈들까지. 진짜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의 군대인가?”
그러나 아무리 세나가 통제해도 가진 자원의 차이가 컸다. 내부로 침투한 마왕군은 그동안 군체 단위로 습득해 온 어마어마한 경험을 바탕으로 최적 그 자체인 근접전을 구사했다.
어쭙잖은 화기로는 저지조차 불가능했다. 이대로 안에서부터 몰살당할 게 아니라면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적 행동 패턴 분석. 카피 실행.”
세나가 그 상황에서 최선의 수를 두었다. 강화 슈트와 외골격 기체들을 자신이 직접 조종하고, 루시의 마왕군이 보여 주는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그대로 카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워프함의 슈퍼컴을 연산력으로 사용하는, 자신의 주특기를 시전하는 세나의 모습에 루시가 작은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되는 건가?! 설마!”
“그들이 보여 주는 움직임의 수준이 대단합니다. 신체 구조 하나하나에 짜 맞춘 말도 안 되는 최적화라, 전혀 다른 육체로 완전히 카피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 사이 그들은 세나가 루시의 마왕군을 상대로 파훼법을 찾은 것 같아 희망을 가졌다. 안에 사람이 타지 않은 예비용 강화슈트들까지 일제히 뛰어나와 마왕군을 상대하니, 함선 내부에 침투한 마왕군은 하나하나 제압되어 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