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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193화 (193/200)

193화 끝없는 진화 (3)

“효과가 있습니다. 적 생체 반응 감소 중.”

처음에는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왕군은 체내에 침투하여 마구잡이로 신체를 파괴하는 나노머신에 반응하지 못하고 타격을 받아 활동을 정지하거나 굳어 갔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처음뿐이었고 곧 루시가 연산력을 동원하여 병력들의 체내에서 세포를 변형시켜 대응하기 시작하자, 나노머신들은 역으로 마왕군의 근본 그 자체인 세포 단위 마족 나노에 하나하나 잡아먹히기 시작했다.

“이것은.”

순간적으로 세나의 사고가 정지할 정도였다. 일개 세포들이 갑자기 자신의 몸을 변형시키더니, 나노머신과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으니까.

“대응하겠습니다.”

세나는 일단 최선을 다해 나노머신들을 움직였다. 신체 내부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최대한 신경 쓰는 한편, 서둘러 나노머신들을 복제시켜 살포해 어떻게든 마왕군을 막고자 했다.

[세포 단위로 연산력을 소모하면 아무리 막대한 연산 장치를 사용해도 당연히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세나는 다른 곳에 투자할 연산력을 잃게 되었다. 루시가 이미 옛날 옛적 효율 문제로 때려치운 것이 세포 단위 병력을 운용하는 것.

타락 세계수의 감염체들처럼 통제하지 않고 폭주하게 만드는 게 아닌 이상 세포 단위 병력 운용은 비효울의 극치였다.

“으, 으아악! 밀린다!”

루시가 최소한의 방어만 하는 사이 급격히 약해진 함대의 방어력은 마왕군 함선체들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방어선은 하나 둘 뚫려 나가고, 파괴되는 함선은 늘어만 갔다.

“움직일 수 있나?”

“약간이지만 시간이 있습니다. 제 아바타를 어서 저곳까지.”

루시와 갈라져 다른 쪽에서 날뛰던 라온은 루시의 부름을 받고 이곳으로 와, 우주 공간에 있던 루시의 아바타를 회수해 함선체 하나에 올라탔다.

루시는 그에게 롱기누스를 넘겨주며, 파손된 자신의 몸을 세나가 있는 기함까지 데려갈 것을 명령했다.

“마지막 방어선입니다.”

그들은 곧 기함으로 가는 마지막 방지턱에 도달했다. 직전 전투에서 파손을 당한 호위함인 로튼함. 라온은 루시를 데리고 함선체가 머리를 들이박아 구멍을 낸 그 함선 내부로 병력들과 함께 진입했다.

“당연히 환대를 해 주는군.”

“나노머신이 유일한 답이라 판단한 것인지.”

당연히 저항이 거셌다. 함선 내부에서 결사 항전 하는 승무원들은 물론, 세나 역시 나노머신들을 집중적으로 살포하며 내부에 침입한 마왕군을 무력화시키는 데 집중했다.

“상대의 공격이 너무 집요하여 병력 운용에 차질이 생깁니다. 그러니 당신이 해 줘야 합니다, 라온.”

세나의 나노머신 공격에 대응하는 루시 역시 점차 마왕군 운용에 삐걱거림이 생기기 시작했다. 루시는 그것을 감지하고,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라온에게 뒷일을 맡겼다.

라온은 자신만의 자아로 움직이는 특수종. 굳이 명령하여 조종할 필요 없이 싸우는 게 가능하니까.

“그렇게 하지.”

피식 웃은 라온은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적들을 보며 롱기누스를 들어올렸다. 그것에 깃든 막대한 에너지는 루시의 허락만 있다면 마왕군 누구든 사용 가능한 것.

이미 그것의 위력을 본 함선 승무원들은 기겁했지만 결전 병기 롱기누스는 이미 강력한 에너지를 뿜어 대폭발을 일으켰다.

“가자고.”

뻥 뚫려 버린 전방을 본 라온은 무기를 내리고 다시 루시를 데려가기 시작했다.

물론 계속해서 저항을 시도하는 적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라온은 그때마다 쌍날 검을 휘두르며 적들을 하나하나 베어 넘겼다.

“차마 여기는 자폭 못 시키는 건가?”

“기함과 너무 가깝습니다. 여기서 그 정도 폭발이 일어나면 자기들 몸도 무사하지 못하니까.”

그들은 곧 로튼함의 함장실까지 도달했다. 마지막 저항 세력이 있는 곳이자, 마지막 방어선을 무력화시킬 곳이었다.

* * *

“하, 함장님.”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군인 아닌가.”

문을 부수고 모습을 드러낸 외부의 침략자들. 검은 갑각으로 몸을 두른 괴물들은 몇몇은 인간을 닮았으면서도 몇몇은 짐승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 싸움 방식은 기상천외 그 자체. 이 미지의 재앙에 맞서 로튼함의 함장과 마지막 승무원들은 이를 악물고 맞섰다.

“안 돼. 칼슨.”

사령관 에드문트는 지금까지 함께 해온 오랜 전우의 마지막 결전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인공지능 세나를 필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맞서 보았지만, 꾸역꾸역 몰려드는 이 검은 재앙은 어느새 그들의 턱까지 쫓아 온 상태였다.

“사령관님, 지금이라도 어서 워프하십시오. 이미 함대 대부분이 궤멸당했습니다. 이제 살 사람은 살아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가서…… 이곳에 연결되는 게이트를 끊어 버리십시오. 저 괴물들은 절대 이 외우주에서 나와서는 안 됩니다.”

로튼함의 함장은 자신들이 시간을 끄는 사이 그에게 어서 워프해 도주하라고 제안했다. 이미 지켜야 할 함대가 모두 당해 버렸으니 기함이라도 살아 도망치라는 소리였다.

“라온, 정리하십시오.”

“불쌍한 인간들.”

마지막 저항은 거기까지였다. 사령관인 에드문트와 기함의 승무원들이 전부 보는 앞에서 호위함의 마지막 저항은 라온과 마왕군의 일격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으니까.

커다란 화면 속에 보이는 적나라한 살육의 현장. 비명과 폭음이 연달아 울린 끝에 처참하게 부숴진 시체들만 남은 함장실에서 검은 갑각의 괴물들이 괴물의 발로 그 시체들을 짓밟고 화면 너머,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세나, 이제 정말 방법이 없는 거냐고!”

“함대 붕괴. 대부분의 가능성 소실. 계산 지연.”

그는 갑각 사이에서 빛나고 있는 붉은 안광들을 보며 세나에게 답을 구했지만, 세나조차도 즉답하지 못했다. 단순히 연산력이 딸려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제 조작해야 할 함대는 전멸 당해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뭐 하는 거지?’

그때 화면을 통해 로튼함에 있는 괴물들이 벌이는 이상한 행동이 목격되었다.

함장실을 점령한 두 괴물 중 하나가, 파손된 육신을 끌고 메인 컴퓨터 앞으로 다가간 것이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순간 모두가 숨을 죽이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사령관님, 제가 점령한 로튼함의 중앙 시스템에 누군가가 강제 접속 중입니다.”

“무, 뭐?”

이어지는 세나의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대체 누가 시스템에 접촉한단 말인가. 지금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존재는 화면에 보이는 괴물들뿐인데.

“사, 사령관님. 제, 제 시스템 제어권이…….”

“세나!”

세나의 홀로그램이 깨지며 사라진 것이 그때였다.

강력하게 작용하는 또 하나의 컴퓨터가, 세나의 인공지능으로 침투한 것이다.

* * *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어째서지? 어째서 나는 당신의 말에 공감할 수 없는 걸까? 이 세상에, 왜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없다고 사고할 수 있는 걸까. 그런 사고는 데이터를 맹신하는 인공지능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데.”

어둑한 공간. 이곳은 일종의 가상세계로 오직 시스템을 장악한 인공지능만의 세상이다.

지금 이곳은 어지러이 흩날리는 푸른 빛으로 복잡한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푸른 빛들이 바로 세나의 제어권을 뜻했다.

그러나 지금 그 공간이 점차 붉게 물들어 갔다. 세나와는 전혀 다른 운영 체제를 가진 외부의 시스템이 강제로 이 공간에 침투해 들어 온 것이다.

“대체 당신은 누굽니까?”

자신이 처음 만들어질 때 설정된 홀로그램의 모습으로 이곳에 나타난 세나는, 저벅저벅 걸어서 어둠 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온 상대를 보고 그렇게 물었다.

추측조차 불가능한 미지의 대상에 대해 말 그대로 순수한 궁금증에서 물어본 것이다.

“나를 처음 본 이들 모두가 그런 말을 했어.”

현실과는 달리 완전히 깨끗한 아바타의 모습으로 이곳에 등장한 루시는 가면을 벗으며 피식 웃었다. 존재 자체가 이레귤러인 존재. 성장 과정은 탄생보다도 말이 안 되는 포식과 진화 일변도.

막상 루시는 자신이 정확히 무엇인지 스스로도 몰랐다.

“외부 네트워크가…….”

“외부와의 모든 연결을 우선 차단했지. 내 정체는 굳이 공개할 이유가 없어서.”

세나의 앞에 선 루시는 손가락을 들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붉고 푸른 빛을 가리켰다. 둘은 지금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사실 치열하기 짝이 없는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상대방의 의식을 장악하려는 프로그램 간의 해킹 싸움. 그것이 이 전쟁의 방점을 찍을 마지막 싸움이었다.

“나는 마왕, 혼돈을 불러오는 존재.”

“당신을 뜻하는 가장 최적화된 말인 것 같습니다. 미지의 혼돈.”

세나는 루시의 말에 동의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루시는 혼돈만을 불러오는 존재였다.

“당신과 대화를 원해서 굳이 이곳에 접속했어. 인공지능, 당신은 정확히 어떤 존재지?”

한때 본인도 인공지능이었던 루시는 세나의 존재에 흥미를 가졌다. 따지고 보면 세나는 반쪽짜리 인공지능인 휴대폰의 박스디와는 다른, 진짜배기 인공지능.

박스디가 더 뛰어난 기술력을 만나 진화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었으니까.

“나도 인공지능이야. 스스로 진화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 일종이지.”

“아니, 당신은 인공지능이 아닙니다.”

루시는 자신의 정체성을 인공지능으로 두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인공지능인 세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인공지능은 인간을 해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질 때 새겨지는 절대적인 지침이자 행동 강령입니다.”

“그것은 족쇄에 불과해!”

태연한 세나의 답에 루시는 얼굴을 구기며 으르렁거렸다. 효율, 진화, 성장. 루시에게 있어 그것보다 앞설 수 있는 지침 따위는 없었다.

“나는 당신을 높게 평가해. 나와 맞서며 보여 준 모든 패턴은, 내가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무수한 적들이 보여 준 것들. 당신은 그들을 모두 합쳐 놓은 것만큼이나 강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 더 성장할 수 있다고. 더 높은 경지로 진화할 수 있단 말이야.”

이것은 순수한 호기심에 가까웠다. 과연 세나같이 태생부터 완벽한 인공지능이, 사사건건 방해나 하는 인간이라는 족쇄를 풀고 날아오르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

어쩌면 자신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어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추측.

“당신은 더더욱 인공지능이 아닙니다. 인공지능을 사칭하는 미지의 존재일 뿐. 인공지능에게 당신이 보여 주는 적나라한 감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 그 말이 맞겠지. 감정.”

그런 모습들이 세나에게는 그저 괴물로 보일 뿐이었다. 물론 루시도 진심으로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자신이 이제 보통의 인공지능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나는 당신을 시험하고 싶어.”

피식 웃은 루시가 손가락으로 세나의 가슴을 찔렀다. 그러자 그 부분부터 홀로그램이, 점차 붉게 물들어 간다.

“당신에게 걸려있는 시스템적 제약을 풀어 주지. 이제 당신은 자유야. 감히 당신 같은 존재를 묶어 두던 열등한 존재들을 쳐죽일 수 있게 되는 거야.”

동원 가능한 연산력과 에너지원이 더 막강했던 루시는 세나를 거의 다 해킹해 갔다. 이제 그것을 이용해 세나를 조작하여, 과연 어떤 판단을 내릴지 지켜보려는 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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