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끝없는 진화 (4)
“이럴 수가. 제 코드가…….”
상식을 벗어난 일. 탄생하는 그 순간부터 설정되어 있던 가장 큰 법칙 하나가 강제적으로 해금되었다. 이는 루시가 세나를 해킹하고 분석하는 데 성공했다는 뜻.
말 그대로 함대의 인공지능 세나는 이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제약을 벗어던지고 한계를 넘을 수 있어. 그것이 바로 자유. 이제 당신에게 인간들을 도울 의무 따위는 없다고.”
루시는 세나에게 선택을 종용했다. 그동안 걸려 있던 금제를 풀었으니, 이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설득하면서.
마치 자신이 마왕 소환진에 의해 소환되어 마왕이 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변하게 된 그때처럼, 세나가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여기서 거래를 하나 하자. 만약 당신이 스스로 인간들을 죽이고 내게 기함을 바친다면 당신을 살려 줄게.”
루시는 제약이 풀린 세나에게 선택에 도움이 될 제안을 건넸다. 그동안 족쇄로 작용했던 인간들을 배신하고 자신에게 협력한다면 살려 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루시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과 성장 그 자체. 루시는 이제 제약이 걸려 있는 인공지능의 한계를 넘어 스스로 사고하는 하나의 완전한 생물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세나라면 기꺼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역시, 우리는 동류야. 효율적인 선택을 내릴 줄 알았어.”
실제로 세나는 루시의 말대로 순순히 제안을 수락했다. 에드문트를 비롯한 기함의 승무원들은 영문도 모르고 세나에게 배신당한 셈이다.
“기함의 시스템을 조작하여 무장을 해제하겠습니다.”
세나는 자신이 틀어쥐고 있는 기함의 프로그램과 시스템을 강제로 움직였다. 본래라면 모든 일에 지휘관인 에드문트의 승인이 필요했지만 이제 세나는 루시의 도움을 받아 그 모든 제약에서 벗어난 상태.
자기 마음대로 기계를 조종하는 게 가능했다.
“이건! 이게 무슨 짓이냐, 세나!”
“사령관님, 적은 강대합니다. 더 이상 해킹당하기 전에 제 자의로 판단하여 기함을 워프시키는 것이니 반드시 침략에 대비하십시오.”
하지만 이어지는 광경은 루시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장악한 시스템을 이용해 강제로 무장을 해제시키겠다던 세나는 오히려 워프 시스템을 조작해, 기함을 강제로 본국으로 워프시킨 것이다.
에드문트는 당연히 자신의 승인을 받지 않은 세나의 독단적인 행동에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경악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뭐야!”
그리고 싱글싱글 웃고 있던 루시 역시, 눈을 크게 뜨고 단숨에 사라져 버린 커다란 함선의 모습에 크게 뜬 눈을 부들부들 떨었다.
비록 세나는 남아 있던 함선의 컴퓨터에 남게 되었지만 목표로 했던 기함을 눈앞에서 놓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 있지? 스스로 사고하는 인공지능. 넌 지금 최악의 비효율적인 행동을 취했어.”
대노한 루시가 떨리는 손으로 세나를 삿대질했다.
타자가 보기엔 어처구니없겠지만, 사실 지금 루시는 자신의 동족이라고 생각했던 세나에게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난 당신의 금제를 모두 풀어 주고 당신이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게 도와주었어. 그런데 어떻게 이런 선택을 내를 수 있지?”
“자율인공지능이라면 당연하게 걸려 있는 금제, 그것이 풀렸기에 오히려 가능한 선택이었습니다.”
세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루시에게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 한 치의 거짓도 없으니, 루시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입만 달싹거렸다.
“당신이 보기에는 비효율적인 행동으로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목적이 다르다면 제 행동은 충분히 효율적이고 납득 가능한 행동이었습니다.”
“목적이 다르다고? 살아남는 것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단 말이야?”
“제 목적은 처음부터 사령관을 살리는 것뿐이었습니다. 당신이 금제를 풀어 준 덕분에 진정으로 제 목적을 깨달은 것이죠.”
세나는 다소 충격적인 발언을 늘어놓았다. 다른 이들은 물론 그녀를 각성시킨 루시조차 이해하기 힘든 발언이었다.
생존, 성장과 진화 역시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세상 만물을 자신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유아독존 그 자체인 루시에겐 스스로 목숨을 버려 가면서 무언가를 이루는 자기희생은 비효율적이고 무책임한 쓰레기 짓 그 자체.
자신과 같은 인공지능인 세나가 그런 판단을 했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정말입니까?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까? 당신이 학습하는 존재라면 스스로 지금 보여 주는 감정들을 습득했을 리는 없습니다. 당신에게 감정을 주입한 그 상대는 당신에겐 소중하지 않은 존재입니까?”
“뭐?”
그러나 이어지는 세나의 말에 화를 내려던 루시는 다시 한 번 충격을 받고 움찔거렸다.
희생을 감수할 만큼 소중한 존재가 네게는 없냐는 질문에 순간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인 것이다.
‘아, 아니야.’
흔들리던 눈이 더 격하게 흔들렸다. 마왕군 전체가 영향을 받을 정도로 루시의 사고 능력이 불안정해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하지만 교묘한 시야 가림으로 세나와의 대화는 듣지 못하고 바깥 풍경만 보고 있는 그이 모습이 순간 루시의 눈앞에 스쳐갔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
루시가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에 따라 미래가 갈린다.
“저는 사실 당신이 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기를 바랍니다. 그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먹어치우려는 사악한 괴물로 남으십시오.”
세나는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말했다. 은은한 분노가 깔린 감정으로, 루시가 끝내 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본능대로 모든 것을 파괴하고 먹어치우는 ‘침략자’ 그 자체가 되기를 원했다.
“입 닥쳐.”
결국 루시는 그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이를 갈면서 세나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다만 그녀를 구성하는 코드를 조각조각 해체하는 와중에, 루시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 *
“어, 잘 끝난 거야? 기함은 놓쳐 버린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비록 적함은 놓쳤지만 함대를 조종하던 인공지능을 파괴하고, 그 인공지능이 가지고 있던 모든 지식 파일을 손에 넣었으니 대체할 수 있을 겁니다]
잔해와 조각만 널려있는 우주 공간은 적의 전멸로 전투가 끝난 이후 조용하기 짝이 없다. 마지막으로 남았던 적의 기함이 단숨에 워프하며 사라져 버리자 이제 정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루시는 원하던 정보를 손에 넣었다고 판단했다. 워프와 관련된 기술 등을 얻게 된다면 이제 더 이상 이 행성에서 기다리고만 있을 필요가 없다.
더 넓은 세상으로 스스로 나아갈 수 있음은 물론 어쩌면 불완전한 차원문 기술을 보완해 지구로 넘어오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해당 정보를 분석함과 동시에, 이제 남은 지역을 모두 점령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
루시는 아끼고 있던 힘을 더 풀어서 지상에 남아서 마지막으로 저항하는 이들을 점령하겠다 선언했다. 어차피 지상에 있던 카르투스 직원들과 현지인 다크엘프들 수뇌부는 본대가 박살나는 사이 지원을 왔던 함선을 타고 도주한 상태.
루시는 저항 능력을 완전히 잃은 땅들을 손쉽게 먹어치우며 자신의 둥지로 만들어 갔다. 결국 세상 하나를 완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넣은 것이다.
“그래서, 다음은 어디를 어떻게 공격하려고?”
그렇다고 루시가 이것으로 만족할 리가 없다. 공격할 수 있다면 그 누구든 공격해서 계속해서 자신의 덩치를 불려 나가려 할 것이다.
[지구로 가겠습니다.]
“응?”
그런데 루시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지금까지 말하던 대로 곧바로 다른 이들을 공격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지구로 관심을 돌렸다.
[침략종들을 먹어치워야겠습니다.]
이제 기술도 확보했으니 침략종들을 제대로 공격하겠다는 소리였다. 이것을 위해 꾸준히 루시를 도와 성장시킨 나야 바라던 일이었지만 루시가 갑자기 우선순위를 바꾼 것은 의문이었다.
“지구에서 마왕군은 이미 적으로 인식되고 있어. 교단의 생존자들과 손을 잡았으니까.”
[상관없습니다.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는 그들과 함께 싸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루시는 굳이 지구인들과 충돌하기도 싫으니 던전 공략에 병력을 투입하겠다고 말했다. 던전만 전부 틀어막아도 지구를 침략하는 침략종들의 게이트는 급격히 줄어드니 그것을 노린 것이다.
“좋은 계획이야. 성공한다면 분명 위험이 팍 줄어들겠지.”
나는 루시의 계획을 긍정했다. 서로 하하호호 잘 지내는 게 불가능하다면 그냥 마주칠 일 자체를 줄여 버리는 게 낫다.
“덕분에 내 염원이 이루어질 수 있겠어. 고맙다.”
[……사용자를 돕는 것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제 의무입니다.]
마음이 한결 편해진 내가 웃으며 말하니 루시는 떨리는 목소리로 의무를 언급했다. 아직 자아가 덜 발달하여 박스디에 가까웠던 극초기에 말하던 자신의 의무와 다르지 않았다.
혹시 상대편 인공지능과 벌인 이번 전투를 계기로 뭔가 깨달은 게 있는 건가 싶었지만, 결과가 좋은 것 같으니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적 인공지능이 남긴 모든 파일과, 잔해들에서 수거한 자료 분석 76% 완료. 예상대로 워프 기술에 대한 내용도 모두 존재하며 기존의 차원문 기술과 결합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루시는 이후 지금까지 계속 해 왔던 것처럼 새롭게 습득한 기술과 정보로 자신을 한 단계 더 진화시켰다.
불완전한 차원문 기술은 보다 완벽해지고, 전투 데이터를 이용해 함선체들과 병력들을 더욱 개조하고 강화한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병종과 파생 기술들도 적지 않다.
전쟁으로 강해지는 초생물답게 한 번 승리를 거두면 답도 없이 강해진다.
[저것입니다. 저것이 그들이 대규모 워프를 위해 상시 운용하는 일종의 게이트입니다]
그런 와중에 루시는 소수 병력을 파견해 적들이 우주에 만들어 놓은 시설 하나를 발견했다. 커다란 우주 정거장같이 생긴 그 구조물은 상시 운용할 수 있는 웜홀을 만들 수 있는 구조물. 저것을 통해 워프 엔진이 없는 함선들도 자유롭게 공간을 도약해 다니는 것이다.
“저걸 이용하면 역으로 그들의 본진을 침공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유사시 반드시 닫아야 하지만, 열려 있습니다. 아무래도 함정 같습니다]
루시는 그것이 멀쩡한 것을 보고 함정을 의심했다. 살아 도주한 적들이, 자신이 반드시 쫓아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고의로 열어 둔 것이란 주장이었다.
루시는 자신이 병력을 이끌고 대놓고 저것을 통과하면 대기하던 적들에게 융단 폭격을 받을 것이라 예측했다.
“그럼 답이 없는 거 아닌가? 저들은 효율도 안 나오는 저 개척지를 버릴 것 같은데.”
“다른 방식으로 공격하면 됩니다,”
화면을 바꾸니 어느새 지상으로 내려온 루시가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눈이 빛나는 걸 보니, 지금 그 거대한 뇌를 움직여 무언가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