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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공지능이 마왕이 되었다-198화 (198/200)

198화 끝없는 진화 (8)

“보십시오. 이곳이 이 괴물들의 중추입니다.”

“저걸 파괴하면 끝나는 건가?”

마침내 적들의 공세를 뚫은 루시가 병력을 태운 함선체, 아일랜드·알파와 함께 적들의 공중요새에 도착했다.

나는 루시와 함께 평탄한 평지 같은 그곳에 발을 디뎠다. 다른 마왕군 병력들도 함께였다. 가장 걱정했던 시간적 여유도 충분.

이대로 쳐들어간다면 적들이 소중히 감추고 있는, 동력원이라는 약점을 공략할 수 있을 것이다.

“적들의 전력 43% 이상 소실. 가장 강한 개체는 지상에 남은 상급종이 전부일 것입니다.”

공중 요새에 마왕군을 쏟아놓은 루시는 당연히 마왕군을 돌진시켰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강한 적 개체는, 상급종으로 분류되는 괴물들.

특히 이번 침공에 함께 딸려 온 어마어마한 숫자의 상급종들은 그 출력과 위력도 이전보다 강한 상태였지만, 루시는 그것들을 마왕군의 물량으로 찍어 눌렀다.

적이 하나라면 아군은 둘, 셋이 덤벼서 저격했다. 루시에게 병력 제한 따위는 없으니 아무래도 모든 병력을 이끌고 오지 못한 것 같은 적의 약점을 제대로 공략한 셈이다.

“아무리 막대한 경험을 쌓아 더 앞서는 기술을 보유했다 한들 그것을 익히게 되면 의미 없어집니다.”

게다가 루시는 벌써 적들의 힘에 적응했다. 자신보다 앞서 있기는 하다고 평가한 그들의 경험은 어쩔 수 없이 그 행동에서 표출이 되고, 루시는 그것을 보고 배운 것이다.

“그럼 이대로 밀어 버려, 루시. 어서 끝내자, 이 전쟁.”

나는 루시에게 빨리 끝내자고 말했다. 루시에겐 데이터를 확보하고 경험을 쌓을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상에서 죽어 나가고 있을 사람들이 신경쓰였다.

거기 있는 이들 중엔 오진혁같이 내 지인들도 있었으니까.

“변수가 없다면 전투 승리 확률은 87%입니다. 다만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그때 루시가 의문을 제기했다. 자신의 계산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의문이었다.

“적들은 더 강한 개체를 만들 양분과 기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상급종 이상의 개체를 등장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불안하게 왜 그래?”

“무시해서는 안 될 현실입니다.”

어째 좀 불길한 발언이었지만 미신 따위는 전혀 믿지 않는 루시는 무시할 수 없는 가능성이라며 그 의문을 남겨 두었다. 상급종보다 더 강한 존재의 등장. 생각만 해도 아찔했지만 이해 못할 건 아니었다.

당장 루시가 운용하는 마왕군의 계급도 총 셋이었으니까. 강심을 가지지 못한 일반종, 강심을 가진 상위종, 그리고 특별한 이들을 상위종으로 만든 특수종.

유리아, 김서윤, 나안, 라온, 그리고 루시 본인의 아바타. 이 특수종들은 상위종보다 더 강력하다. 본인이 가진 힘에 더해 루시가 만들어 준 최강의 신체가 결합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걸음마 단계인 하위 프로그램들과는 다른 명확한 자아를 가지고 루시의 명령을 수행한다. 루시가 모르는 부분까지 보완할 수 있는 마왕군의 변수 덩어리들이었다.

“뭐 저 괴물 놈들의 대장은 그게 비효율적이라 판단했나 보지.”

“그게 아닙니다.”

침략종들의 생각 따위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그러나 어느새 낯빛이 변한 루시가, 조용히 중얼거리더니 손가락을 들어 저 앞을 가리켰다.

“저게 뭐지?”

나는 그걸 본 순간 멍하니 중얼거렸다. 하긴 이런 요란한 깽판을 치는데, 제대로 된 보스 하나 등장하지 않는 건 말이 안 된다.

다만 그 보스는 어딘가 익숙했다. 강렬한 에너지 파동에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얼굴은 두꺼운 가면에 가려져 있고, 팔은 6개가 달렸으며, 등 뒤로는 썩은 나뭇가지 같은 거대한 날개를 단 기괴한 생김새였지만.

그 생김새는 분명 익숙했다.

“느껴집니다.”

“뭐가?”

나는 멍하니 중얼거리는 루시를 돌아보았다. 마찬가지로 흩날리고 있는 검은 머리칼은 내가 방금 보았던 것과 비슷해 보였다.

“또 다른 마왕의 존재가.”

동시에 루시의 힘이 폭발했다. 같은 하늘 아래 절대 공존할 수 없다던 마왕끼리의 숙명. 이제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있던 의무가, 갑작스레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 *

베헤모스·베타. 루시가 개량한, 지상을 쓸어버릴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지상종이자 돌격병. 그 거대하고 단단한 몸으로 성도 방공호도 단번에 부숴 버리는 모습을 나도 여럿 보았다.

그 거체가 지금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쓰러지고 있다. 그 강력한 일격을 날린 것은 이 공중요새를 이끌고 침공을 개시한 보스이자, 어쩌면 침략종들을 이끌고 있을지도 모르는 진정한 지배자.

그리고 또다시 등장한 마왕의 기운까지. 나는 물론 루시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이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니까.

물론 또 다른 세상에 자신을 마왕이라 칭하는 존재가 또 나타날 수는 있다. 다만 그런 마왕은 루시의 경계 대상이 아닐 것이다. 처음부터 속한 세상이 달랐으니.

헌데 지금 루시는 자기가 느끼는 이 기운이 마정을 흡수해 마왕이 되었던 바알과 마주할 때와 같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미 일이 벌어졌다면 해야 할 일은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일단 지금 루시가 선택한 방법은 당연히 있어서는 안 될 자신의 경쟁자를 제거하는 것이다.

“감히……!”

루시의 분노는 컸다. 그 분노는 주체할 수 없는 것이라 뭐라 말릴 수도 없었다. 심지어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인지 격하게 분노하는 것이 내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길 수 있나?’

나는 슬쩍 뒤로 물러서서 강렬한 분노를 터트리는 두 우두머리들의 격돌을 지켜보았다. 롱기누스를 들고 덤벼든 루시를 향해,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날아온 적 역시 손에 거대한 마력이 휘몰아치는 검을 들었다.

거기서 특수종들끼리의 격돌과 동시에 두 군세의 마지막 충돌도 시작되었다.

지휘 개체의 영향을 받는 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그들은 이전보다 더 거칠고 격하게 상대방을 공격했다.

[이럴 수가.]

루시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 그때였다. 동시에 싸우고 있던 루시의 아바타가, 휘어져 들어오는 적의 날개에 관통당해 강심이 파괴당하는 모습이 보였다.

단 일격으로 심장 부분에 있던 동력 기관을 파괴당한 것이다.

‘루시의 아바타보다 강한가.’

사실 전체적인 전투력에서 상대의 우위는 계속해서 보였다. 루시는 그것을 숫자로, 더 높은 출력을 가진 개체로 채워 왔다.

문제는 지금 대장전을 벌이는 두 특수종은 각 집단에서 가장 강한 개체라는 것. 숫자로, 더 높은 출력으로 찍어 누르는 건 이제 불가능하다.

[아직 기회는 있습니다. 롱기누스의 충전이 끝났습니다.]

루시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차피 파괴되고 있는 것은 아바타일 뿐. 아바타를 미끼로 주고 상대의 뼈를 취하는 전략은 루시가 즐겨 쓰던 방법 중 하나였다.

[롱기누스·출력 전개.]

루시는 손에 쥔 전략 병기의 마력을 폭발시켰다. 효과는 있는지, 숨통을 끊으려던 상대 역시 그 폭발에 휘말려 큰 피해를 입었다.

이거, 잘만 하면 그래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루시는 여차하면 자기 아바타를 하나 더 동원할 수도 있으니까.

“어?”

하지만 그 이후 상황은 내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 * *

[대체 어떻게. 적을 아군이 있는 곳으로 전송하려 했지만, 적이 전이 마법을 파훼했습니다. 전송할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 끝을 봐야 합니다.]

루시는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집중하지 못했다. 나노·오메가로 감싼 내 몸이 저절로 움직여 적이 쏘아 낸 공격을 가까스로 피한 탓이다.

“왜, 왜 나를!?”

놀란 내가 소리쳤다. 물론 그 누구도 답해 주지 않았다. 적이 대답을 할 리가 없고, 루시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막겠습니다.]

루시는 급한 대로 나를 노리는 적을 자기 몸으로 가로막았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또 다시 적에게 일격을 허용했다는 것이다.

내 눈에, 적이 6개의 팔로 휘두르는 검에 난도질당한 루시의 아바타가 머리채를 잡혀 끌어올려지는 모습이 보였다.

[나, 나를 대체 어떻게…….]

동시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루시가 괴로워하며 마왕군 전체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내 몸을 보호하고 있던 나노·오메가 역시 마찬가지라, 루시는 자기가 내 몸을 해치기 전에 나노·오메가를 강제로 옷으로 되돌리며 휴면 상태로 만들었다.

‘이런.’

당연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루시의 손에 죽을 일은 없어졌지만 졸지에 나는 맨몸으로 괴물들 앞에 던져진 셈이다.

[놈이 저를 역으로 장악하려. 아니, 해킹하려 하고 있습니다. 모든, 방어를 무력화하고, 당신을 해치기 위해. 놈의 목적은 처음부터 당신이었습니다.]

“무, 뭐?!”

[피하십시오. 당장!]

루시가 괴로워하면서도 내게 도망치라 소리쳤다. 순간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나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제는 대체 어떻게 도망친단 말인가. 여기는 적어도 구름과 함께 나는 높은 상공인데.

“큭!”

게다가 여유를 그리 많이 주지도 않았다. 루시가 무력화되어 마왕군의 행동에 장애가 생긴 사이, 살아남은 상급종 위저드가 내게 파직거리는 강력한 뇌전 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맞으면 죽는다. 그러나 머리로는 알아도 내 몸으로는 저 뇌격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까지 어떻게든 가리면서 바쁘게 움직여 왔지만, 막상 루시라는 든든한 조력자가 없다면 무력하기 짝이 없는. 나란 일개 인간의 한계다.

“잡았어!”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또 다른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 * *

“여길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당황한 나는 나를 가로막고 적의 공격을 막아 낸 이지연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꽤 떨어진 곳으로 지원을 나갔는데.

“이제 다 알아.”

그런 그녀는 숨을 고르더니 나를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다 안다는 말 한마디지만, 나는 그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하긴 지금 상황을 적나라하게 다 보고 있다면 알 수밖에 없겠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 알지.”

“그게 무슨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책하지 마. 넌 무능력하지도 않고 쓸모없지도 않아. 너는 너만의 방법으로 싸우면서 이 세상에 가장 필요한, 누구보다 강한 무기를 만들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바로 옆에 있던 마왕군 병사 하나를 가리켰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한 나는 당황했다.

그동안 철저히 숨겨 온 루시와 나의 관계를 대체 그녀가 어떻게 알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모두를 위해서라도 네가 할 일은 그냥 살아남는 거야. 그거면 돼.”

그저 살면 된다는 말에 혼란을 느꼈다. 그녀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이제는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일단 지금은 밑으로 대피를…….”

“안 돼.”

하지만 그 순간 내 눈앞에 피분수가 뿌려졌다.

이어진 적의 공격에 그녀의 마력과 방패가 단번에 부서지고, 이어서 나를 공격하자 그녀가 망설임 없이 자기 몸을 날려 내 앞을 막은 것이다.

이를 악물고 자신의 가슴을 관통한 촉수를 붙잡은 그녀의 피로 얼룩진 날카로운 촉수가, 내 앞에서 가까스로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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