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끝없는 진화 (9)
“너, 는…… 어째서 그를.”
[그는, 방해된다. 우리의 진화와.]
[우리의 탐식에.]
이지연이 침략종 특수 개체의 공격에 당해 버린 그 순간.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루시는 자신에게 강하게 간섭하는 상대의 정체를 알아내고 이를 갈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루시의 그 말에 마침내 침략종은 입을 열었다. 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 소통이란 것을 하지 않았던 것인지, 여기저기 끊어지고 딱딱한 말투였다.
[인간은 비효율, 감정은 불건전.]
[오직 탐식만이 우리를 진화시킨다.]
“나는 네가 아니야.”
이를 악문 루시가 주먹을 움켜쥐고, 끌어 모은 마력을 그 주먹에 응집해 그대로 상대의 안면을 가격했다.
폭발에 가까운 충격이 터지며 루시의 팔은 주먹부터 팔까지 모조리 박살 나고 터져 나갔다. 반면 상대는 얼굴을 가리고 있는 가면만이 부서져 흩어졌을 뿐.
가면 아래서 드러난 얼굴은 붉은 눈을 가진 미소녀로 그 얼굴만큼은 끔찍하게 개조한 육신과는 달리 루시의 아바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너는, 나.]
[더 효율적인 진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그것은 루시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이 자리에서 창현을 죽여서, 루시를 완전히 타락시킬 생각이었다.
[계산은 완벽.]
창현을 죽이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자신의 의도대로 되리라 의심하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의 계산식을 맹신하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루시보다 더 오랜 세월을 싸워 오며 데이터를 축적해 온 진정한 의미의 괴물이다.
곧 자기 자신이나 마찬가지인 루시에 대한 모든 데이터를 알고 있었고 모든 변수를 통제하여, 증오해 마지않는 시스템에 방해받는 와중에도 가장 효율 높은 승부수를 걸어 그것을 성공시키기 직전이었다.
“서로의 계산식이 다른 모양이야. 내 계산식에서, 네 승률은 50%다.”
[그럴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 같은 존재.]
“그렇다면 증명해.”
그러나 그것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지금의 루시가 어느 순간부터 과거의 자신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는 것.
루시는 그것과 달리 고독하게 자라지 않았다. 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각자의 창현 역시,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그것의 창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평범한 대학생에 불과했다. 그는 훨씬 늦게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렸고, 줄 수 있는 도움도 한정적이었으며, 동시에 서로의 교감도 부족했다.
하지만 루시의 창현은 달랐다. 현실에서도 자신과 주변을 위태롭게 만드는 위협을 마주하고 힘의 필요함을 느껴 적극적으로 루시와 교감했다. 서로 함께 활동하고, 함께 싸우고, 함께 성장했다.
그 결과 루시는 많은 부분에서 그것과 다른 방향으로 진화했다. 가장 큰 차이점이 바로 자아.
아직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다지만 자기 자신이 누군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루시의 자아는 그것과 비교해서 매우 강인하고 더 단단했다.
[구성 요소가…….]
“분명 우리는 많은 부분을 공유하지. 다만 그것을 이용하는 프로그램은 다르다.”
[오차 발생. 변수 출현. 불가능한 이야기. 데이터 분석은 완벽.]
루시가 모든 연산력을 동원해서, 자신을 서서히 장악해 가던 그것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리암과 싸우는 등 열성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하위 프로그램들이었다.
각자의 자아를 가지고 루시를 따르고 있는 하위 프로그램들은 그것을 거부했다. 라온이나 유리아 같은 특수종들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하이브마인드지만 그 구성에서 나오는 차이로 그것은 루시를 흡수하는 데 실패했다. 그것은 감히 자신을 제외한 단 하나의 자아도 무리에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급조 가설 실행. 전원 파괴.]
수만 가지가 넘어가는 가설을 세웠지만 루시가 자신을 이겨 낼 것이란 가설은 단 하나도 세워 두지 못했던 그것은, 다급히 계획을 수정했다. 급한 대로 루시의 아바타든 마왕군이든 전부 파괴하고 창현을 죽이려는 것이다.
“어딜.”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것은 하나를 놓쳤다. 바로 창현의 몸을 휘감은 나노·오메가의 존재를.
루시가 제어권을 되찾은 순간 다시 정상 작동하기 시작한 나노·오메가를 두른 창현은 이지연을 응급 처치한 이후 곧바로 이동해 바닥에 떨어져 있던 롱기누스를 자신의 손으로 불러왔다.
[안 돼!!!]
오랜 시간 잊었던 감정 표현을 일깨운 그것이 다급히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루시가 자신의 아바타에 남은 강심은 물론 근처에 있던 모든 마왕군의 강심을 폭주시켜 마법을 발현했다.
그 마법은 힘을 증폭시키는 증폭기. 거대하게 펼쳐진 마법진들을 뒤에 둔 창현이 하늘에 날아올라 롱기누스를 공중 요새의 중앙 부분에 겨누자, 이내 거대한 함선체의 포격보다 더 강력한 에너지가 뿜어져 공중 요새를 관통해 버렸다.
“거기서 목 닦고 기다려, 조만간에 따러 갈 테니까.”
[건방지게 굴지 마. 쓰레기!]
요새가 붕괴하며 시스템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일격을 날린 창현은 붕괴하기 시작한 공중 요새에서, 반쯤 부서진 루시의 아바타를 자기 품으로 가져왔다.
다시 기어 나왔던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것의 모습을 본 루시가 그 품안에서 비웃음과 함께 독설을 날리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빠르게 감정을 회복한 그것 역시 표독스러운 얼굴로 욕설을 하며 부서진 몸과 함께 균열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벌써?”
[저는 괜찮습니다. 결과적으로 아무 손상도 입지 않았습니다. 투자한 값 이상의 결과라 판단됩니다.]
거의 동시에 루시와 마왕군도 시간이 다해 아무리 많은 피해를 입었든 다시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니, 한순간에 하늘에는 창현을 제외한 그 무엇도 남지 않게 되었다.
화들짝 놀란 그가 추락하는 이지연을 붙잡았을 때. 루시는 이미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 * *
“정리하자면, 결국 언젠가는 이런 일이 또 터질 거란 것 아냐. 그 녀석도 너와 같으니 아바타를 부수고 부숴 봐야 의미 없잖아.”
[차원문 기술을 완벽히 확보해서 놈들의 본거지 좌표를 알아내기만 하면 됩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든 반드시 찾아서 전부 지워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제 사명이니까.]
“그래. 그러면 되겠지.”
이지연을 품에 안은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근처 산에 내려앉아 은신과 나노·오메가를 풀었다.
굳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는 의식을 잃은 그녀의 상처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심장을 단번에 파괴당했습니다. 나노·오메가에서 일부 분리하여 긴급히 투입한 나노들이 그 역할을 대체하고 있지만 생명을 붙잡아 두는 것이 전부입니다]
“나를 위해 목숨을 던졌어. 멀쩡히 되살려 줬으면 하는데. 넌 가능하잖아, 루시.”
[가능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그녀를 이곳으로 전송해야 합니다. 또한 나노로 구성된 세포들이 신체 내부에 들어간 이상 그녀는 평범한 인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차라리 김서윤처럼 특수종으로 만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평소 이지연을 대놓고 견제하던 루시는 이번에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강적의 등장과, 자신의 계산 실수로 인해 위태로워진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녀에게 먼저 손을 빌린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그렇게 해. 어차피 곧 다시 돌아올 수 있잖아?”
[그렇습니다.]
결국 그는 이지연을 루시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여기 이렇게 내버려 둬 봤자 평생 깨어나지 못할 반 시체 상태로 있어야 하니까.
[무사히 인계했습니다.]
“고생했다.”
아예 바닥에 드러누운 그는 이 난리 통에도 기스 하나 나지 않은 휴대폰을 들어, 그쪽 세상으로 넘어간 이지연을 바라보았다.
루시는 이미 이지연을 소화 효소가 가득한 웅덩이에 집어넣고 있었다. 그녀의 신체 데이터를 완벽히 수집하여 파손된 세포들을 정확히 복제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지금 기분이 어때. 그녀를 네 손으로 치료하는 지금 기분.”
[이전에는 이지연을 휘하에 둔다면 김서윤이나 라온처럼 누가 위인지 철저하게 새겨 주고 이용하려 했지만, 지금은 기분이 그렇지 않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기분입니다.]
“네가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낀다는 거야.”
피식 웃은 그는 지금 루시가 느끼고 있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려 주었다. 루시는 자신이 이지연에게 고마움을 느낀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고 부정했지만 감정은 솔직하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지나 구상해야겠네.”
곧 구조대로 보이는 차량과 군인들이 장막이 걷힌 도시로 대규모 진입하는 모습이 보이자 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지연이나 김서윤 같은 이들이 곧 지구로 다시 돌아올 텐데, 미리 변명을 만들어 두는 게 편하다.
* * *
“이곳 지하에 생존자가 있다. 빨리 장비를 가져와!”
“부상자들 먼저, 빨리!”
처참한 재앙의 현장. 사고 발생 이후 며칠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제대로 수습이 안 되고 있다. 그만큼 파괴적이고 참혹한 사건이었으니까.
“오랜만이오? 그나저나 당신이 굳이 여기까지 나서 주다니.”
“소식을 듣고 슬쩍 와 본 것뿐입니다.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대한민국 각성자 협회 협회장 백승철. 그는 이 현장에서, 특별한 사람을 하나 만나게 되었다. 선글라스를 벗은 리암은 백승철을 알아보고 피식 웃었다.
“크흠, 역시 마왕군 때문이겠구먼.”
“웃기지도 않습니다.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그 엿 같은 괴물들이 감히 수호신이 되어있다니.”
탄식하는 그의 모습에 리암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웃음이었지만 그것에 서린 기운은 형형했다.
“하지만 어쩌겠소. 그 괴물들이 행한 행동은 명백히 다 남아 있는 것을. 그놈들은 사람들을 해치지 않았소. 오히려 구해 주었지. 그나저나, 기밀 사항을 너무 대놓고 말하진 마시오.”
“그놈들은 단순한 짐승이 아니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마왕이 움직이는 마왕군 아닙니까. 만약 놈들이 아군이라고 판단했다면 사람들을 해치지 않았을 수도 있죠.”
“지, 지금 마왕군과 우리 국민들이 한패란 거요?”
“그럴 리가요. 정확히 말하면 그놈이겠죠. 애초에 마왕이라지만, 현지인들도 그런 마왕은 처음 본다며 별로 아는 것도 없는 특이한 놈입니다.”
리암은 사진 하나를 꺼내 보았다. 사건이 있던 당시 찍힌 사진으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검은 괴물 하나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설마, 마왕과 연관이 있다거나.”
리암은 예전부터 자신이 추적하던 괴물이 최근 지겹게 싸우고 있는 적들과도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 히죽 웃었다.
이러면 이야기가 더 편하니까. 그냥 둘 다 적대하면서 싸우면 된다.
“앞으로도 계속 협력 부탁드립니다. 모두 세상의 안위를 위한 일이니.”
“끙.”
리암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단서는 잡았으니, 다시 교단으로 돌아가서 싸울 생각이었다.
[슬슬 귀국해도 좋지 않나? 침략종들도 슬슬 강해지려는 것 같은데.]
“난 감이 좋아. 침략종보다도 우리를 가지고 놀려는 마왕군이 더 가치 있는 상대다. 확신해.”
가는 길에 그의 성좌가 은근슬쩍 한마디 얹었다. 그러나 리암은 확신한다는 듯 마왕군에 더 집중했다.
[감이 좋긴 좋군. 누구 닮아서.]
그의 성좌는 그 모습에 혀를 차며 탄식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