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탑의 고인물들 (2)
커피 속 얼음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서로의 소개가 이어졌다.
인간대머리남의 본명은 이태민.
한국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아니, 뭐야 그럼. 고딩 때 그렇게 게임을 해 놓곤 한국대학교에 들어갔다고?’
남들은 하루에 10시간씩 공부만 해도 들어가기 힘든 곳을?
이 녀석도 참 대단하다.
여러 의미에서.
‘어디, 머리 좋은 공돌이께선 어떤 능력을 얻었는지 한번 볼까?’
혀를 차던 진혁이 ‘진실의 눈’을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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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태민
성별: 남
나이: 23세
레벨: 11
힘 13 민첩 15 체력 16 마력 21
보유한 스탯 포인트: 0
보유한 코인: 2,500
직업: 없음
고유 능력: 기계군주(機械君主)
스킬: Lv2 ‘모래상자모드’, Lv2 ‘통솔’, Lv2 ‘해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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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걸 얻었군.’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기계군주.
대인(對人)보다는 대군(對軍)에 특화된 고유 능력이다.
과거 시련의 탑에서도 인간대머리남 아니, 이태민은 이걸 사용해 광역 몰이사냥을 즐겨했었다.
공수가 모두 탄탄한 밸런스형.
마력 소모가 크다는 걸 제외한다면 나무랄 데가 없는 능력이다.
그럼 다음은…….
진혁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였다.
불광동핵주먹으로 활동했던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본명, 유연화.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땐 몰랐었다.
유연화가 어느 가문에 소속되어 있는지를.
하지만, 소개가 이어지자 비로소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유천영.
완벽하게 실전화시킨 태권도로 세계를 놀라게 한 무도계의 살아 있는 전설.
유연화는 바로 그 기인의 손녀딸이었다.
‘그것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외손녀지.’
시련의 탑에서도 7m가 넘는 거인들을 맨손으로 때려잡곤 했었는데.
이렇게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혈관엔 유천영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었으니까.
진혁이 다시 한번 ‘진실의 눈’을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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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유연화
성별: 여
나이: 25세
레벨: 12
힘 25 민첩 22 체력 17 마력 5
보유한 스탯 포인트: 0
보유한 코인: 4,775
직업: 없음
고유 능력: 극진태권도(劇震跆拳道)
스킬: Lv3 ‘태청화랑심법(太淸花郞心法)’, Lv2 ‘임전무퇴(臨戰無退)’, Lv2 ‘마력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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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도 꽤 흥미롭네.’
초근접형 탱커 겸 딜러.
불광동핵주먹이란 닉값을 제대로 하는 고유 능력과 스킬 구성이다.
레벨도 비슷하게 올린 걸 보면, 두 사람이 함께 사냥을 해 왔을 터였다.
하긴, 예전에도 둘이서 합이 잘 맞았으니까.
[복사 조건: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함께해 온 동료입니다. 세 사람이 탑의 20층에 도달했을 때, 플레이어 이태민과 유연화의 능력을 복사할 수 있습니다.]
복사조건을 읽은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인물 중에 고인물들의 능력인 만큼 쉽게 복사할 수 없다는 건가.
‘당분간은 힘들겠군.’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여기 있는 셋은 어떤 방식으로든 20층에 도달할 테니까.
그때였다.
“형. 뭐 해요? 형 차례예요.”
앞자리에 있던 이태민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진실의 눈’의 존재를 몰랐기에, 허공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진혁이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강진혁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27살이고 파프리카TV BJ를 했었어요.”
“오! 형 BJ였어요? 파프리카면 저도 가끔 보긴 했는데! 게임? 먹방? 아, 형은 잘생겼으니 남캠이었을 수도 있겠네요.”
이태민이 생긋 웃으며 다가왔다.
아무리 게임 상에서 같이 활동했다곤 하나, 실제로 만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경계심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예. 지금은 관뒀지만요.”
“에이. 말 편하게 하세요, 형. 겜에서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닌데.”
“맞아. 그 편이 우리도 더 편해.”
유연화도 한 술 거들었다.
둘 다 친화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나도 BJ 생활 하느라 친화력은 어디 가서 안 밀린다고 생각했건만.’
아니, 어쩌면 그동안 계속 뒤통수만 치려는 놈들하고만 어울려서 더 벽을 세운 건지도 모르겠다.
이득을 저울질하고.
필요 여하에 따라 가차 없이 목에 칼을 꽂았던 한 달.
그걸 당연히 여겼기에, 이런 친근감이 어색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동료라……. 꽤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네.’
피식 웃은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말 편하게 할게.”
***
어색함이 가시자 세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이건 진혁이 적극적으로 주장한 결과였다.
향긋한 커피도 나쁘진 않지만…….
뭐랄까?
그것보다는 먹고 싶은 것들이 훨씬 많았다.
그렇게 찾은 곳은 삼겹살과 된장찌개로 유명한 맛집.
노릇노릇하게 익은 두툼한 고기와 두부를 가득 넣은 찌개를 보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끼와 버섯하고는 아예 차원이 다르구나.’
소설에서.
흔히 수백 년 혹은 수천 년간 이계에 있다가 돌아온 귀환자들이 한국 음식을 먹으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들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한 달만 산골에 박아 놓고 풀만 먹이면, 초코파이 하나로 영혼까지 파는 게 사람의 본능이었으니까.
문득, 훈련소 때 생각이 났다.
초코파이냐 몽쉘이냐에 따라서 종교가 바뀌었던 일요일의 추억이.
아! 그러고 보니…….
또 먹고 싶은 게 하나 떠올랐다.
“요 아래 베라 있던데, 후식으로 아이스크림 사 오는 거 어때?”
“아이스크림 콜!”
“형이랑 누나는 여기 있어요. 제가 사 올게요. 근데, 어떤 맛으로요?”
이태민이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
“민트초코.”
진혁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두 사람이 얼굴을 찌푸렸다.
“윽, 그 치약맛 아이스크림을요?”
“오빠, 그거 호불호 엄청 갈리던데. 먹으면서 양치하는 그런 느낌이라고.”
이 자식들이…….
상큼한 민트와 달달한 초콜릿의 조합을 몰라보다니.
다른 건 몰라도 이건 흘려 넘길 수 없다.
“다시는 민트초코를 욕하지 마.”
그 어느 맛보다 단단한 콘크리트 지지층을 갖고 있는 게 민초였으니까.
***
식사를 하며, 진혁은 두 사람으로부터 한 달간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들었다.
각종 길드의 탄생과 탑의 자원을 둘러싼 이해관계.
각 나라의 정책과 코인에 관한 동향 등등.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정보들이었다.
“형도 아시겠지만, [시련의 탑]을 플레이했을 당시 길드들이 대부분 다시 결집했어요.”
이태민이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였다.
그러자.
우우우웅!
[이태민이 Lv2 ‘모래상자모드’를 발동합니다.]
허공에 7개의 문양이 나타났다.
모두 본 적 있는 것들이다.
미국의 ‘타이탄’, 유럽의 ‘올림포스’, 중국의 ‘중화’ 그리고 일본의 ‘사무라이’와 인도의 ‘간다라’.
마지막으로 한국의 ‘단군’과 ‘싸울아비’까지.
세계를 대표했던 길드들의 심벌이었다.
유연화도 문양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알고 있는 거겠지. 기존 멤버들끼리 정보를 독식하는 게 유리하다는 걸.”
그렇겠지. 최소한 저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은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함부로 추가 멤버를 받지도, 알고 있는 고급 정보를 풀지도 않을 것이다.
“BJ들 쪽은 어때? 프리로 활동하면서 코인을 긁어모으는 놈들도 있을 텐데?”
진혁의 질문에 이태민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네. 주로 기존에 활동했던 유명인들이 네임드 앞세워서 시청자들한테 조회수 뜯어내고 있어요. 게다가 이건 어디까지나 소문이긴 한데, 저희 때 했던 코인 공장 가동하려는 놈도 있는 것 같고요. ‘마인’이라고 불리는 집단이라던데. 요즘 뉴스에서도 한창 난리에요. ”
“……제정신이 아니군.”
“그렇죠. 걸렸다간 무기징역감이니까요.”
코인 공장.
한 마디로 조회수를 뽑기 위해 강제로 특정인의 동영상을 시청하게 만드는 작업실이다.
과거, 게임에선 NPC가 그 역할을 대신했기에 상관없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사람들을 공장 같은 데 가둬 놓고 매달 코인만 뽑아냈다간 정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허나 진혁은 이태민의 말이 마냥 헛소문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세상은 바뀌었고.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들은 무너졌다.
결코 과거의 잣대로 미래를 판단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고를 해 줘야겠군.
그 녀석에 대해서, 두 사람도 알고 있어야 한다.
“둘이서 같이 다닌다면 당할 확률은 적겠지만, 일단 이야기는 해 둘게.”
진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달 전쯤에 칼잡이 녀석 만났다.”
“헉!?”
“그 거머리를?”
이번엔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거, 살살 좀 말해라.
식당 안에 있는 손님들이 다 쳐다보잖아.
그러나 그런 것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어디, 어디서요?”
“오빠. 그 사람, 현실에서도 다짜고짜 칼부터 꺼내?”
검성(劍成).
지독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퍼붓는 검술에 결계까지 쓰는 랭커다.
[시련의 탑]을 할 때도 종종 만나곤 했었는데.
대화 따위는 일절 없이 공격부터 하고 보는 막가파였다.
물론, 그때마다 찍어눌러 줬다. 다시는 덤비지 못할 정도로 처절하게.
백번은 넘게 죽였던가?
보통 사람이면 포기할 법도 한데.
문제는 이 녀석이 목표 의식인지 라이벌 의식인지…….
별 이상한 망상에 빠져서 죽어라고 우리의 뒤만 밟았다.
‘정확히는 내 뒤를.’
농담이 아니라, 밥 먹거나 잠잘 때는 물론, 화장실 갈 때도 노렸으니, 당연히 치가 떨릴 수밖에.
“얼굴을 맞댄 건 아니고. 내가 갔을 땐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건륭(乾隆)이 새겨진 철기검’을 가지고 사라진 뒤였어.”
“그 녀석도 레플리카를 노렸던 거군요…… 아니, 잠깐. 그럼 형도 그곳에 갔었어요? 거기 완전 지옥이었다던데?”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오빤 진짜 강심장이네. 어떻게 거길 갈 생각을 다 한 거야?”
“나도 챙길 게 있어서 갔었어. 아무튼 너희들도 조심해. 생김새만으론 너희인지 눈치 채지 못하겠지만, 고유 능력이나 스킬을 보면 바로 알아볼 테니.”
과거에 썼던 능력을 그대로 가져오는 게 이래서 양날의 검이다.
익숙하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동시에 그 플레이어를 나타내는 지문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후우. 조심해야지. 오빠는 몰라도 우리 둘은 솔직히 좀 무서워서…….”
이태민과 유연화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과거의 끔찍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일단 이 정도면 정보 교환은 대충 다 된 것 같고,
“오늘은 이만하고 슬슬 일어날까?”
진혁이 의자를 뒤로 젖혔다.
1분 1초가 아쉬운 상황.
먹고 마시는 건 이쯤이면 충분하리라.
“어? 벌써요?”
“벌써가 아니라 지금 9시야.”
내일부터는 다시 탑을 올라야 한다.
게다가 한 달 만에 뜨거운 물에 목욕도 하고 제대로 된 침대에서 푹 자고 싶었다.
두 사람이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근데. 한 달이나 어디 가 있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지.”
“그럼, 테스트도 안 받은 거 아니에요?”
“테……스트?”
뭔 테스트?
진혁의 반응에 두 사람이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2층부터는 사망자 수가 급증해서, 각성자 협회에서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만 위로 올라갈 수 있거든요.”
“인증코드를 주는 방식인데……, 이런 식이야.”
유연화가 손목을 보여 줬다.
아주 희미하게 바코드 비슷한 문신이 박혀 있다.
호오. 이것 봐라?
그러니까, 어중이떠중이들까지 들어오는 건 막겠다. 뭐, 이런 취지라는 거잖아?
겉으로 그런 명분을 걸어 두면 확실히 테스트를 치르는 거부감을 줄일 수 있긴 할 거다.
희생자를 줄이기 위해서라니.
이보다 더 고귀한 목적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위에서 바라는 진짜 목적은 그런 게 아니다.
테스트를 치르는 이유는 단 하나.
숨어 있는 실력자들을 파악하기 위해서.
‘정확히는 그 실력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겠지.’
문득, 시련의 탑이 처음 나타났던 날이 기억났다.
‘한상진이었나? 자신을 각성자 협회 회장이라고 소개하던 남자의 이름이?’
TV를 통해 각성한 플레이어들을 모으려 하던 그 얄팍한 수작질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그 테스트 보는 곳. 거기 어디야?”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아니.
‘오히려 바라던 바다.’
두근! 두근!
진혁의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각성자 협회가 만든 이 시스템.
이용해 먹을 방법이 있었다.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