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각성 테스트 (3)
진혁의 말에, 김기태가 움찔했다.
“혼자서……. 길드 전체를 상대하겠다고?”
만용이자 오만이다.
애초에 길드는 단일 개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모인 집단이었으니까.
하물며 싸울아비는 국내 2위에 위치한 초대형 길드 아닌가?
“이제 와서 테스트를 보러 온 거면, 레벨도 낮을 텐데…….”
“낮지. 아직 1레벨이니까.”
“어이가 없군. 그런데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싸울아비 길드 상위권의 평균 레벨은 20 이상.
심지어 김기태보다 강한 플레이어도 열 명이 넘는다.
하지만.
“단순히 레벨만으로 모든 걸 판단하려 한다면, 너는 시련의 탑에 대해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거야.”
진혁의 목소리는 여전히 고저가 없었다.
‘진심이었나.’
김기태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저건 허언이 아니다.
자신이 있기에 할 수 있는 여유였다.
물론, 실제로 수백 명에 이르는 싸울아비 길드를 이길 순 없겠지만.
최소한.
‘나보다는 강해.’
그거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김기태가 말문을 열었다.
“교환 조건은…….”
“응?”
“교환 조건은 어떻게 되는 거지?”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거래를 하는 쪽으로.
“간단해. 만드라고라를 찾을 수 있는 위치를 말해 줄 테니, 싸울아비에서 보유하고 있는 독점 던전 중에서 10개를 넘겨.”
독점 던전.
누구나 입장이 가능한 일반 던전들과 달리, 각 길드에서 자체적으로 소유권을 갖고 있는 던전을 일컫는다.
위험도가 낮은 데 비해 보상은 짭짤한 노른자위.
때문에 각 길드들은 이 독점 던전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걸 10개나 내놓으라니.
싸울아비 길드가 보유하고 있는 전체 독점 던전 중 30%에 해당하는 양이다.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군.”
“마력 중독 증세를 해결해 주는 대가야. 당연히 비싸야 정상 아닐까?”
당장의 가격만 보고 툴툴대지 말고.
상대적으로 비교해.
던전 10개와 중국과의 관계.
둘 중에 어느 게 더 싸울아비에 중요한지를.
“…….”
김기태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감정을 걷어내고 차갑게 머리를 식혔다.
그리고 이득과 손실을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독점 던전 10개.
아깝긴 했지만, 만드라고라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다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바로 상대의 존재.
‘고작 1레벨로도 이토록 강하다면…….’
레벨이 올랐을 경우 대체 얼마나 강해진다는 걸까?
두렵다.
성장 속도와 잠재력,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까지.
전부.
하지만, 이 모든 걸 결정하는 건 김기태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고작 한 사람이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길드 간부들에게 말해 보겠다. 네가 말한 조건들에 대해 상의해 보고 대답해 주지.”
“현명한 결정이야.”
진혁이 생긋 웃었다.
그걸로 둘 사이의 대화는 끝났다.
[Lv3 ‘암막결계(暗幕結界)’가 해체됩니다.]
메시지와 함께 투명한 막이 사라졌다.
***
“나, 나왔다!”
“오오오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안에서 무슨 대화를 나누셨던 거죠?”
두 사람이 나타나자,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질문을 퍼부었다.
“거기, 카메라 내리세요. 어이. 안 들려? 카메라 치우라고!”
“언론의 자유를 부르짖다가 곡소리 나기 싫으면 찍은 거 반납하세요. 각성자 특례법 개정된 거 다들 알 거라고 믿습니다.”
검은 까마귀 길드와 싸울아비 길드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이 기자단을 막았다.
‘호오. 이건 꽤 편리하네.’
덕분에 귀찮은 일에 말려들 염려는 덜었다.
그렇게 조용히 끝나나 싶었는데.
콰아아앙!
“끄아아악!”
굉음과 함께 덩치 하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오우거한테 정통으로 맞기라도 한 건가?
콧대가 완전히 주저앉았다.
‘더럽게 아프겠네.’
진혁이 힐끗 덩치가 날아온 방향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곳엔 관절을 꺾고 있는 운동복 차림의 여자가 보였다.
“비켜. 전부. 죽기 싫으면.”
불광동핵주먹으로 이름을 날렸던 플레이어.
유연화였다.
그리고 그 뒤엔 이태민의 모습도 보였다.
“오빠! 괜찮아? 그쪽에서 뭐라고 한 거면 말만 해. 아주 싹 다 엎어 버릴 테니까.”
“김기태 씨. 실망입니다. 그렇게 안 봤는데. 결계까지 펼치고 뭐 하는 거죠?”
두 사람이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처음에 다른 길드랑 시비 붙는 걸 극도로 꺼렸으면서…….
막상 상황이 닥치자 앞뒤 재지 않고 나섰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나를 위해서. 내 편에 서 주겠다는 뜻이었으니까.
***
‘유연화에 이태민까지…….’
김기태의 얼굴이 한 층 더 딱딱하게 굳었다.
단순히 친분이 있다고만 생각했다.
이 바닥에서 꽤 유명인사인 두 사람이 함부로 인맥을 맺을 리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설마, 저렇게까지 나설 줄이야.
이 정도면 서로 안면이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만약 건드린다면…….
전면전까지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냥 대화를 좀 했을 뿐. 너희가 걱정하는 일은 없었다.”
“그 말, 사실인가요?”
“맞아.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시는 분이더라고.”
이번엔 진혁이 대답했다.
“오빠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일단, 알겠습니다.”
그제야 유연화와 이태민이 끌어올렸던 마력을 풀었다.
팽팽했던 공기가 가라앉았다.
몸을 돌리려던 김기태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유연화를 바라봤다.
“아, 참. 깜빡할 뻔했군. 유천영 어르신 몸은 괜찮으신 거냐?”
“할아버지야 훨훨 날아다니시니 그쪽이 신경 써주지 않아도 돼.”
“흐음. 뭐, 알겠다. 내부자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일그러진 미소와 함께 김기태가 가던 길을 재촉했다.
반면, 유연화는 분한 듯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서로가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안달이 난 이는 박하진이었다.
“자. 잠깐만요! 설마, 저놈들을 저대로 보내는 겁니까?”
개망신을 당할 대로 당한 터라 복수할 기회만을 기다렸는데.
갑자기 김빠진 분위기는 뭐란 말인가?
박하진은 납득할 수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방심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상대를 박살내야 체증이 가실 것 같았다.
“내버려둬라. 너 따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김기태가 선을 그었다.
“하, 하지만!”
“하지만?”
“아…닙니다. 저는 단지, 다시 한 번 기회를 얻고 싶어서…….”
“기회? 그래, 기회를 줬지. 네놈 머리통이 목 위에 붙어 있을 수 있는 기회를. 주제도 모르고 저 괴물에게 덤볐다가 죽지 않을 수 있는 행운을 말이다.”
“…….”
“또 다시 내 말에 토를 달면 그땐, 후회하게 될 줄 알아. 명심해. 우리랑 손잡고 싶어 하는 놈들은 쌔고 쌨다는 걸.”
“알……겠습니다.”
박하진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진혁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건 덤이었다.
그 순간.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스킬 ‘얕은 호흡(D)’를 복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복사된 스킬은 ‘세계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얕은 호흡(패시브)]
입수 난이도: D
내용: 호흡량과 심박수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스킬의 레벨에 따라 한계치가 달라집니다.)
적개심이 최대치로 올라간 모양이었다.
가장 잘 보이고 싶은 대상에게 버림받았으니 그럴 수밖에.
허나, 그건 저 녀석 사정이고.
‘이건 잘 쓰도록 하지.’
진혁이 새로 얻은 패시브 스킬을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
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리되자, 테스트가 재개되었다.
물론, 응시자는 확 줄었다.
워낙 살벌하게 실내를 휘저어 놨기에, 수험생들의 기가 꺾여 버린 탓이었다.
상당수가 눈치를 보거나 시험을 포기해 버린 탓에 기존의 차례가 뒤죽박죽되어 버렸고.
결국, 선착순으로 테스트를 받고 싶은 사람들만 진행하게 되었다.
[1위 박하나. 측정치: 1755. 등급 A]
[2위 한민희. 측정치: 989. 등급 B]
[3위 오정훈. 측정치: 845. 등급 B-]
[…….]
‘호오.’
전광판을 확인한 진혁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박하나가 1위에 위치해 있었다.
그것도 압도적인 수치로.
‘산삼이라도 먹고 들어간 건가?’
룸에서 시험관과 단둘이 진행되는 테스트의 특성상 그 방법까진 알 수 없었으나.
꽤나 재미난 장난질을 한 게 틀림없다.
그리고 때마침.
“다음 분 들어오세요.”
진혁의 차례가 됐다.
덜컹!
문을 열자 제법 넓은 방이 나타났다.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마정석.
그 옆에는 태블릿 PC를 들고 있는 각성자 협회 시험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진혁을 본 시험관이 흠칫 몸을 떨었다.
아마, 조금 전에 있었던 일들 때문일 거다.
이해는 한다.
이해는 하는데…….
이제 그만 굳어 있고 테스트 설명이나 좀 해 줬으면 좋겠다.
“제가 뭘 하면 되는 거죠?”
“아, 네. 테스트는 앞에 보이는 마정석을 가격하시기만 하면 돼요. 고유 능력을 사용하셔도 좋고. 아이템을 이용하셔도 좋습니다. 본질은 마정석에 타격을 가했을 때 나타나는 잠재력의 크기니까요.”
한 마디로 ‘있는 힘껏 마정석을 쥐어 패라.’ 이런 거잖아?
‘그거야 간단하지.’
어려울 것도 없었다.
진혁이 마정석 앞에 섰다.
그리고 강화한 단검을 꺼냈다.
“단검이군요. 고유 능력은 사용하지 않고 무기로만 하실 건가요?”
“예. 이거면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시작해 주시면 됩니다.”
시험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우우우웅!
검신을 따라 마력이 흐르기 시작했다.
칼끝이 떨렸다.
피처럼 새빨간 빛을 머금은 채.
바로 그 순간.
카가가각!
번개처럼 가로지른 검이 마정석의 표면을 긁었다.
마정석 표면에 가늘고 긴 흠집이 생겼다.
속도와 힘이 적절하게 배합된 일격이다.
그런데.
[589위 강진혁. 측정치: 91. 등급 F]
스크린에 표시된 측정치는 너무나 동떨어진 결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F……등급 나오셨어요.”
시험관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치를 읽었다.
반면.
진혁은 같은 결과를 보며 피식 웃었다.
놀랄 것도 없다.
그 왜.
소설 같은데서 흔히 있는 클리셰 있잖아.
재능 넘치는 주인공이 처음 각성 테스트를 봤지만, F등급이 떠 버리는 진부하디 진부한 클리셰가.
시스템 오류, 마정석 불량 등등 갖다 붙일 수 있는 이유야 트럭에 치일 정도로 많다.
“예전부터 궁금했어.”
진혁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왜 이상한 결과를 받고도 그냥 수긍하면서 넘어가는지 말이야.”
만약 제대로 된 등급을 받았다면.
소설 속 수많은 주인공들은 훨씬 더 빨리, 순탄하게 성장했을 것이다.
F급이어서 들어가지 못하는 지역과 던전, 정보 등을 모두 알 수 있었겠지.
처음부터 꼬여 버린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있는 현실에선 똑같은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
“저기, 시험관 선생님?”
“저, 절 부르신 겁니까?”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시험관이 깜짝 놀라 대답했다.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야 그럴 수밖에.
아직까지 진혁이 박하진을 가지고 놀았던 광경이 두 눈에 생생했다.
고작 테스트에서 숫자 체크나 하던 말단 공무원으로선 공포심을 느끼는 게 당연한 일이리라.
“여기 당신 말고 또 다른 시험관이 있나요?”
“예! 옙! 없죠. 안타깝지만, 저 하나뿐이네요. 그럼, 어떤 일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마정석, 이상한 것 같은데, 바꾸는 게 어때요? 하급 말고 최소한 중급 이상짜리로.”
“마정석을요? 갑자기 멀쩡한 마정석은 왜…….”
답답하네.
“여기 마정석에 금 간 것 보이죠?”
진혁이 마정석 표면을 가리켰다.
희미하지만, 그곳엔 분명 한 줄기 검상이 남아 있었다.
“보……입니다.”
“마정석은 어지간한 공격으론 꿈쩍도 안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상처를 입혔는데 F급?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다들 눈은 장식품으로 달고 사는 건가? 아니면 일부러 모른 척을 하는 건가?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답답하긴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나저나.
“아직도 여기 있네요?”
진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1분. 아니, 30초만 주십쇼.”
시험관이 꽁지가 빠져라 창고를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