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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혼자 만렙 뉴비-23화 (24/653)

23화 암스테르담의 성녀

목소리의 주인은 백색 갑주를 입은 성녀.

테레사였다.

숨을 헐떡이는 걸 보니, 앞쪽에 있는 듀라한들을 정리하고 뒤쪽을 돕기 위해 온 모양이다.

진혁이 살짝 놀랐다는 표정으로 테레사를 바라봤다.

‘길드에 소속된 놈들은 자기들끼리만 살겠다고 난리던데…….’

의외네.

성녀라는 이명을 거저 얻은 건 아닌 듯싶다.

“이분과 잠시 이야기 좀 해도 될까요?”

테레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김소미에게 물었다.

“예? 예, 예! 물론이죠.”

김소미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쪼르르 바위 뒤로 사라졌다.

단 둘이 남자, 테레사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듀라한을 전부 처리한 건가요?”

경계심이 묻어나는 말투다.

그야 그럴 수밖에.

짐꾼으로 참여한 플레이어의 평균 랭크는 E~F.

당연히 전투와는 동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B급 전투계열도 상대하기 힘든 듀라한을 단신으로 쓰러뜨렸다고?

우연이라는 말로 포장하기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일단, 듀라한을 처리한 건 제가 맞습니다.”

“정체를 숨긴 건가요? 왜죠?”

“누구에게나 개인적인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저도 그렇고…….”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동시에 끊어졌던 문장이 완성되었다.

“당신도 그렇고.”

“……그게 무슨.”

테레사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미미한 떨림이었다.

‘그래. 평범한 사람이라면 말이지.’

생긋 웃은 진혁이 말을 이었다.

“사실, 처음엔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당신 정도 되는 랭커가 왜 보스 공략을 포기하고 이곳에 왔는지. 제 상식선에선 납득하기 힘들었어요.”

막대한 보상과 명예가 보장된 탑 상층 공략.

테레사는 그 황금 같은 기회를 저버린 채 유적을 선택했다.

이유?

하나밖에 더 있겠나?

당연히 3층에 있는 보스몬스터를 공략했을 때 얻는 것보다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이 더욱 크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진혁은 그게 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을 선택한 건 직업 퀘스트를 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

이번에는 테레사도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뺨이라도 맞은 듯, 얼굴이 당혹감으로 얼룩졌다.

‘유적이 성기사의 전직 퀘스트를 위한 장소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극소수야…….’

정상적인 루트라면 성기사의 전직 퀘스트는 6층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남들보다 앞서나가고 싶었기에.

테레사는 시련의 탑을 10층 이상 올라간 이들로만 운영되는 ‘암시장’에서 정보를 구입했다.

순간, 테레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렇다면 설마…….’

이 남자도 암시장에 소속된 회원 중 하나란 건가?

확인해 봐야 한다.

어디서 주워들은 정보의 편린만으로 떠보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모든 걸 알고 있는지를.

“맞아요. 지금까지 숨기고 있던 이유는, 사도 요한의 서약서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그게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테레사가 목적과 이유에 대해 털어놓았다.

물론.

진혁의 눈앞엔 조금 다른 내용의 상태창이 떠 있었지만.

[‘진실의 눈’이 발동됩니다.]

[테레사의 발언은 ‘거짓’입니다.]

귀엽네.

‘나를 떠보려는 생각인 건가.’

진혁이 피식 웃었다.

“요한이 아니라, 사도 베드로의 서약서겠죠. 그리고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는 건 당연히 거짓말일 테고요.”

서약서가 있는 곳쯤이야 이미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찾아 뒀을 터.

아직까지 망설이고 있는 건 서약서가 있는 곳까지 가는 길이 너무나 험하기 때문이리라.

수천 종류의 함정들은 특정한 규칙이 있기보단 혼돈에 가까웠다.

게다가 천여 마리가 넘는 언데드 군단이 있는 건 덤이었고.

“정말로…… 모든 걸 알고 있는 거였군요.”

마침내 테레사가 인정했다.

좋아.

이제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군.

“사실, 저도 그 서약서가 있는 곳에 볼 일이 있습니다. 아, 물론 저는 서약서가 아닌 다른 걸 노리고 있지만요.”

“같이 가달라는 건가요?”

“같이 가주겠다는 겁니다.”

진혁이 선을 그었다.

“저는 함정의 위치도, 그 공략법도 완벽하게 알고 있습니다. 뭐, 그쪽이 기존의 계획대로 시온에서 온 플레이어들과 가도 상관없지만, 글쎄요. 아무리 운이 좋아 봤자 당신 빼곤 다 죽을 걸요?”

근데, 그럴 수는 없잖아?

명색이 성녀라는 고귀한 영웅이.

동료를 전부 잃고 혼자 살아남았다고 하면 이름에 먹칠을 하는 셈이니까.

설령 전직에 성공했다고 한들, 대중의 반응은 냉랭할 것이다.

“……생각을 좀 해 볼게요.”

“얼마든지요.”

하루 종일 고민해 봐라.

어차피 결론은 하나일 테니.

‘서약서 하나 던져 주고 나머지는 내가 몽땅 챙겨 주지.’

성기사 전직용인 베드로의 서약서야 관심 밖이었지만, 그곳에 있는 또 다른 아이템들은 꽤나 탐났다.

‘얼어붙은 눈물’과 ‘마혼단’

그래. 이 두개를 얻는 게 베스트다.

오히려 성유물보다 이쪽이 더 탐이 날 정도였으니까.

특히 ‘얼어붙은 눈물’은 마력의 정수라 불리는 결정체로, 흡수할 경우 마력의 절대치를 대폭 상승시켜 주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마력 상승은 내게 있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중 하나다.’

지금이야 자주 사용하는 스킬들의 마력 소모량이 크진 않지만.

스킬 레벨이 오르고 또 상위 스킬들을 융합할수록 마력의 총량이 갖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했다.

‘원래 냉기의 저주를 풀 방법이 없어 포기하려고 했었는데…….’

테레사의 존재를 확인한 이상 작전 변경이다.

신성계열을 다룰 줄 아는 테레사라면, 얼어붙은 눈물의 냉기를 완화시키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결정하기에 앞서 딱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고민하던 테레사가 입을 열었다.

“말해 보세요.”

“아까 전, 보초들을 죽이고 가디언을 깨운 사람이…… 당신인가요?”

호오.

이게 이렇게 이어지나.

‘하긴, 테레사 입장에선 현재 공격대 중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이 나일 수밖에 없겠지.’

숨기는 것도 많고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으니까.

뭐, 여기서 구구절절 설명할 순 있었지만.

그건 취향이 아니다.

무엇보다 귀찮기도 했고.

진혁은 그것보다는 좀 더 간편하고 직설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정황상 의심하는 건 이해합니다만, 저는 범인이 아닙니다.”

“말만으로 믿으라는 건가요?”

“예.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가 지금 눈앞에 있으니까요.”

“증거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만약, 제가 보초들을 죽이고 가디언을 깨운 범인이라면…….”

잘 생각해 봐라.

“이런 귀찮은 대화 따윈 하지 않고 당신을 죽였겠죠.”

세상엔 그럴듯한 변명보다 훨씬 더 간편한 방법이 있다는 걸.

***

테레사의 단독 행동은 역시나 거센 반대에 부딪쳤다.

공대장인 송천화가 기겁을 하며 반대했던 탓이다.

“절대 안 됩니다! 이제 전력을 수습하고 앞으로 가야 하는데, 단독 행동이라뇨!”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공격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테레사만큼은 안 된다.

하지만 테레사도 쉽게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유적 20km 지점까지 지도가 있잖아요. 다들 공략법도 숙지하고 있고. 제가 없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어요.”

과거 시련의 탑이 게임이었을 때부터 현실이 된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시도 끝에 플레이어들은 유적에 관한 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

적어도 입구에서부터 20km 지점까지는 큰 위험 없이 나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무엇보다 저희 계약, 보스와의 전투 전까진 각 길드의 공대장끼리 서로 동일한 권한을 유지하는 것 아니었나요?”

“그, 그거야…….”

조목조목 따지자, 송천화가 말을 더듬었다.

어느 것 하나 틀린 게 없기 때문이다.

결국.

긴 한숨을 쉰 송천화가 테레사의 단독 행동을 허락했다.

“후우. 알겠습니다. 그래도 지도가 끝나는 지점에 가기 전까진 복귀해 주셔야 합니다.”

“네. 그전까지는 다시 합류하도록 할게요.”

테레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짐꾼으로 도와줄 사람을 한 명만 데리고 가도 될까요?”

“그 정도야 뭐, 마음대로 하십쇼.”

설전으로 인해 기력이 빠졌는지 송천화가 대충 손을 휘저었다.

사소한 거야 아무래도 좋다는 듯, 무기력한 얼굴로.

테레사의 시선을 받은 짐꾼들이 몸을 가늘게 떨었다.

랭커와의 동행.

이건 행운이나 기연이 아니다.

오히려 지옥으로 가는 1등석 티켓이지.

-보나마나 더럽게 위험한 곳에 끌고 가려는 걸 텐데, 젠장. 우리 같은 놈들은 절대 못 돌아와.

-제발, 제발 나는 안 돼.

-눈 마주치지 말자. 눈 마주치면 아주 좆되는 거여.

-집구석에 먹여 살려야 할 마누라랑 처자식이 있다고.

다들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자신만은 아니길 바라면서.

바로 그때.

테레사의 손끝이 짐꾼들 사이를 가리켰다.

***

지목을 당한 건 진혁이었다.

그리고 진혁은 당연히 함께 가겠다고 말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50줄 가까이 산 경험자로서 말해 주자면, 사랑? 좋지. 근데 목숨보다 중한 건 아니여.”

“그래. 김 반장 말 들어.”

“아무리 성녀가 예뻐도 그렇지. 후우. 젊음이 문제야, 젊음이. 사람 정신을 홱 돌게 만들거든.”

짐꾼들이 진혁을 뜯어말렸다.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연애 같은 거 할 시간에 탑을 한 층을 더 오르고 말지. 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 게 아닙…….”

반박을 하던 진혁이 도중에 말끝을 흐렸다.

잠깐, 잠깐만.

어중간하게 둘러댔다간 씨알도 안 먹힐 분위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못 가게 할 분위기였으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사실, 저와 테레사 양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입니다.”

장르를 설정한다.

보자.

멜로에 유년기적 추억 팔이 좀 섞어 주고.

“유적에는 유럽에 있는 테레사의 가족들을 치료할 아이템이 있습니다. 처음엔 혼자서 가겠다고 했는데, 도저히 혼자 보낼 수 없었어요.”

마지막으로 눈물까지 첨가한다.

허벅지를 꼬집어 봤지만, 안타깝게도 눈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젠장, 감정이 너무 메말랐나.

“설령 제 실력이 부족하고, 또 그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저는 끝까지 그녀를 지킬 겁니다.”

사랑, 비극, 영웅담.

이것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폭풍의 언덕’ 등 세기에 걸쳐 흥행 코드로 인정받아 온 삼위일체가 완성되었다.

짐꾼들이 멍하니 진혁을 바라봤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던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강진혁이 자네…….”

“상남자구만. 젠장. 완전히 고구려 시대 상남자여.”

“그래. 가라고. 남자가 소꿉친구 하나 못 지켜서야 되겠나.”

“젊음이 좋은 거야. 젊음이.”

다들 진혁의 등을 한 대씩 쳤다.

***

간단하게 짐을 챙긴 진혁과 테레사는 곧장 얽히고설킨 길을 따라 유적 깊숙이 들어갔다.

그렇게 5시간 정도 흘렀을까?

공격대로부터 떨어진 두 사람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시 방비가 잘 되어 있군.’

진혁이 천천히 몬스터들의 진형을 살폈다.

구덩이 안에 있는 건 구울과 스켈레톤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군데군데 고위급 언데드들도 섞여 있었다.

듀라한…… 게다가 마법을 다루는 리치까지.

느껴지는 마력이 강하지 않은 걸 봐선, 서클이 높진 않을 테지만.

리치는 결코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놈들이다.

특히 디버프나 저주 계열에 적중한다면, 아무리 날고 기는 고인물이라도 치명상을 입을 확률이 높았다.

테레사가 손가락으로 진혁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저기! 서약서는 저 한가운데 있어요.”

“저도 확인했습니다.”

원의 중심.

저곳에 ‘베드로의 서약서’를 비롯해 ‘얼어붙은 눈물’과 ‘아공간 인벤토리 조합서’까지 놓여 있을 거다.

몬스터를 죽이면 레벨업을 하게 될 테니…….

그건 테레사에게 맡겨야겠군.

“준비하세요.”

진혁이 움직일 채비를 했다.

품안에 넣어 뒀던 단검이 붉은빛을 쏟아냈다.

“알겠어요.”

테레사도 검과 방패를 들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

띠링!

갑자기 두 사람 앞에 붉은색 상태창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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