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얼어붙은 눈물
[‘타락한 회랑의 주인’이 당신들을 바라봅니다.]
이건!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틀림없다.
보스 몬스터의 간접 메시지다.
“봐, 봤어요, 이거? 지금 상태창에…….”
테레사도 깜짝 놀라 외쳤다.
“예. 저도 봤습니다.”
하지만 당장 공격받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지능형 보스 몬스터의 간접 메시지는 그저 심정이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일 뿐.
물리적으로 위협을 가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이 녀석이 플레이어한테 관심을 보인 적은 없을 텐데…?’
회랑의 주인은 언제나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침입자가 들어올 경우엔 당연히 처리했지만, 그 외에는 외부와의 접촉을 철저하게 끊었다.
그런데 그 녀석이 이런 식으로 관심을 표하다니.
……흥미롭다.
그 이유와 의도가.
“보스 몬스터 같은데, 바라봤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좋게 말하면 재미있는 적으로 보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절대 살려서 내보내지 않겠다. 뭐,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될 겁니다.”
“우리들을 인정했다는 건가요?”
“저를 인정했다는 뜻이죠. 당신 말고요.”
어디서 은근슬쩍 한 묶음으로 넘기려 하냐.
딱 봐도 나 때문에 간접 메시지 띄운 건데.
“…….”
테레사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진혁을 쳐다봤다.
유럽에서 내로라하는 랭커와 짐꾼으로 참여한 플레이어.
100명에게 묻는다면 100명 전부 테레사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그런데도.
대체 이 남자의 자신감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이쯤 되면 여러 의미에서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할 말은 많았지만, 테레사는 체념한 듯 이내 살포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 저한테 말했을 때, 함정을 전부 알고 있다고 하셨죠?”
“네. 좀 오래 되긴 했는데, 몸이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1층에 온 건 간만이긴 하지.
특히나 유적을 마지막으로 들어간 건 6년이 훌쩍 넘었다.
그래도 문제될 건 없다.
폼은 떨어져도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럼, 저는 뭘 하면 되나요?”
“언데드 몬스터들 시선만 끌어 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렇게 역할을 분담하면 레벨업도 하지 않고 원하는 아이템도 모두 얻을 수 있다.
진혁이 단검을 역수로 쥔 채 구덩이 아래로 내려갈 자세를 잡았다.
“준비됐습니다.”
“그럼, 시작할게요.”
테레사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우우우우웅!
[테레사가 Lv5 ‘전투의 노래’를 발동합니다!]
눈부신 빛과 함께 따스한 기운이 전신에 스며들었다.
[10분간 모든 스탯이 +3만큼 상승합니다!]
광역 버프형 스킬.
그것도 모든 스탯에 관여하는 효과를 지닌 사기적인 스킬이었다.
‘호오. 이건 꽤 쓸 만하네.’
진혁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사망 시 부활할 수 있는 테레사의 고유 능력 ‘별의 가호’만 아니었다면 이 스킬을 복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쿠웅!
그사이 테레사가 언데드 몬스터들 한복판에 도약했다.
“크르르…….”
“키에에에!”
구울과 스켈레톤들이 즉각 반응했다.
시독(屍毒)을 내뿜고 조악한 칼과 도끼를 휘둘렀다.
하지만…….
카카카칵!
저런 무기로는 테레사의 갑주에 흠집조차 내지 못할 거다.
그야 그럴 수밖에.
100인의 플레이어.
그중에서도 테레사는 가장 공수가 안정적이라 평가받는 랭커다.
게다가 레플리카 버전이긴 하나, ‘잔 다르크의 갑주’까지 갖추고 있는 상태.
양산형 몬스터는 아무리 많아 봤자 그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켁!”
“케에엑!”
방패가 자로 잰 듯 움직였다.
쾅! 콰아앙!
구울들의 머리가 일격에 으깨졌다.
저 정도면 거의 공성용 해머에 육박하는 위력이다.
서걱!
검이 호선을 그릴 때마다 스켈레톤의 몸이 반으로 토막 났다.
빠르고 정확한 공격.
겹겹이 둘러싸인 벽이 허물어진다.
길이 열린다.
……지금이다!
탓!
진혁이 지면을 박찼다.
가볍게.
동시에 빠르게.
스피드를 유지한 채 최소한의 동작으로 몬스터 사이를 가로질렀다.
대부분의 어그로는 테레사가 끌린 상태였으나, 워낙 수가 많았기에 진혁을 노리는 놈이 나왔다.
구울이 손톱을 세운 채 진혁의 목덜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키에에에에!”
일일이 상대했다간 끝이 없다.
푹!
관절을 노리는 것으로 무게 중심을 어긋나게 한다.
“켁?”
구울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갑자기 몸이 말을 안 들으니 그럴 수밖에.
진혁은 동일한 방법으로 구울과 스켈레톤들을 처리하며, 더욱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안개가 조금 더 짙어진 순간.
파츠츠츠.
검은색 스파크가 번개처럼 날아왔다.
“……!”
위험하다.
진혁이 본능적으로 방향을 꺾었다.
퍼어어엉!
1초 전까지만 해도 발을 딛고 있던 지면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겼다.
과연.
간담이 서늘해 지는 파괴력이다.
‘이 정도도 안 되면 유적이 아니지.’
진혁이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왼쪽.
정확히는 왼쪽에 있는 바위 사이.
그곳에서 주문을 외우고 있는 리치가 보였다.
살점 하나 없는 백골의 마법사.
허나, 두 눈에서 이글거리는 푸른 안광은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했다.
“이곳은 인간 따위가 올 곳이 아니다.”
쇠를 긁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하여간 멘트 하고는.
그럼, 시체들이 밤 마실 나오기엔 적절한 곳이라는 소리냐?
진혁은 온갖 가정으로 얼룩진 리치의 협박을 귓등으로 흘려 넘겼다.
‘호위로 붙어 있는 듀라한이 다섯이라…….’
가능하면 정면 싸움은 피하고 싶었는데. 하는 수 없다.
전부 처리하는 수밖에.
구울이나 스켈레톤들처럼 무시하고 넘겼다간 뒤를 잡힐 위험이 있었다.
“돌아가라. 한 발자국이라도 더 들어오면 아예 잿더미로 만들어 줄 터이니.”
리치가 손바닥 위에 검은색 번개를 만들었다.
최소 5서클은 넘어 보이는 마법이다.
슬쩍.
진혁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어이쿠. 실수.”
“기어이…….”
리치가 듀라한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크오오오!”
“크아아아!”
다섯 마리의 듀라한들이 거칠게 포효했다.
쿵! 쿵! 쿵! 쿵!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듀라한들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지능이 낮은 놈들답지 않게 포위망까지 갖추면서.
동시에.
리치의 손에 있던 번개가 사라졌다.
“후회하며 죽어라, 인간!”
빠르다.
그러나 직선으로 뻗은 검은 줄기가 진혁의 심장에 닿는 순간.
화르르륵!
거센 불길이 치솟았다.
번개가 화막(火膜)에 막혀 산산이 부서졌다.
“이, 인간 따위가 어떻게!”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다.
그런데. 저토록 가볍게 막다니.
마법만큼은 그 어느 인간에게도 밀리지 않을 거라 자신하던 리치였다.
하지만. 그 자부심은 완전히 박살났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기점으로.
쿠쿠쿠쿠쿠!
수천 개의 파편으로 흐드러진 불꽃.
그 속에서.
“시간 없으니까 최대한 빨리 끝낼게.”
짧게 고한 진혁이 가장 앞쪽에 있는 듀라한을 노렸다.
툭.
허벅지를 밟고.
투욱!
그 다음엔 어깨까지 밟은 뒤 높게 뛰었다.
지상에서 5m 가까이 치솟았을까?
진혁이 어깨를 크게 뒤로 젖혔다.
“내 거는 번개처럼 빠르지는 않지만…….”
하나는 장담하지.
“니 쉴드로는 절대 못 막아.”
마력을 실은 10강짜리 단검에, 간극 스탯과 적응형 능력치까지 중첩된 상태.
5서클로는 어림도 없다.
최소한 두 단계는 높은 쉴드면 모를까.
이번엔 진혁의 손에 있던 단검이 사라졌다.
붉은 섬광.
직선으로 쏘아진 한 줄기 빛이 리치를 향했다.
“……크읍!?”
[5서클 ‘에너지 실드’가 발동됩니다!]
반사적으로 끌어올린 마력.
쉴드가 펼쳐지며, 투명한 막이 리치의 전신을 감쌌다.
하지만.
콰득!
쉴드는 유리벽처럼 박살났다.
당연히 그 뒤에 있던 리치 역시 몸에 바람구멍이 생겼다.
“커……어억…….”
리치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상처와 진혁을 번갈아봤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시퍼렇게 타오르던 안광이 서서히 빛을 잃었다.
워낙에 큰 타격을 받은 탓에 모아 뒀던 마력이 모두 날아가 버린 것이다.
물론, 라이프 포스 베슬이 있는 이상 소멸하지는 않는다.
당분간 움직이지 못할 뿐.
‘이걸로 대충 정리는 끝났군.’
진혁이 바닥에 박혀 있는 단검을 회수했다.
“크르르…….”
“크으.”
리치의 지휘를 받던 듀라한들도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아마, 전의를 상실해 버린 탓이겠지.
진혁은 녀석들을 쫓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 온 목적은 레벨업이 아닌, 아이템을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후우.”
진혁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부터는 조금 긴장해야 한다.
엄청난 수의 함정을 통과해야 했으니까.
***
“무, 무슨 짐꾼이 저래?”
테레사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몰려있던 언데드를 정리하고 합류했을 땐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었다.
계속해서 자신을 무시하고 있는 상대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으니까.
내가 이 정도로 강하다고.
하지만 진혁의 전투를 본 순간, 한껏 올라갔던 어깨가 바닥까지 떨어졌다.
‘정말이었구나.’
혼자서 듀라한 넷을 처리했다는 말.
반신반의했었는데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다.
훨씬 상위급인 리치조차 완전히 가지고 놀았으니까.
‘자신감이 넘칠 만하네.’
저렇게 강하니 여유가 있을 수밖에.
그러나.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트랩 존에 들어간 순간.
테레사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
작은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
투쾅!
진혁이 바닥에서 솟구친 가시를 피했다.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찰나.
정면에서 화살 열다섯 개가 날아왔다.
위협적이지만, 이건 페이크다.
진짜는 투명하게 코팅된 와이어였으니까.
‘안개가 끼어 있으니 더욱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한다.’
카카카카캉!
진혁이 단검으로 화살을 쳐내면서, 발 디딜 곳을 연신 확인했다.
그러자.
[시각이 왜곡됩니다.]
불편한 가시감이 망막을 두드렸다.
‘이제부턴 간격이 32cm 정도 차이 나겠군.’
어떤 공격이 오든 체감보다 훨씬 더 빠르다는 뜻.
이 함정 구간을 까다롭게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외워 둔 타이밍을 한 단계 수정했다.
……가자.
진혁이 다시 앞으로 향했다.
스스슥.
무언가 지면을 스치는 소리.
이번엔 뒤다.
뱀처럼 생긴 밧줄이 발목을 낚아채려는 순간.
진혁이 앞으로 몸을 날렸다.
철컥! 철컥!
움직일 때마다 함정이 연이어 발동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곳에선 모든 게 함정을 발동시키는 트리거다.
‘여기서 세 걸음……. 그리고 오른쪽으로 두 걸음.’
계속해서 움직인다.
그저 조금이라도 덜 위험한 길을 택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상대적으로 쉬운 건 물리계열의 함정.
까다로운 건 정신계열 쪽에 작용하는 함정이었다.
후자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만 했다.
그쪽은 발동되는 즉시 사망이었으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이제 목표까지는 100m 정도 남았다.
[청각이 무뎌집니다.]
[촉각이 마비됩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오감의 기능이 둔화됐다.
반사 신경이 뛰어나단 장점마저 무색케 하는 환경.
규칙을 연구하는 것도.
패턴을 파악하려 하는 것도 소용없다.
그렇기에.
이 앞은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어지는 구간이다.
그저 수천, 수만 번 죽으며 모든 순서를 통째로 습득하는 것만이 이 함정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일 뿐.
콰아아앙!
진혁이 단검으로 단창(短槍)의 궤도를 틀었다.
오감이 제멋대로 날뛰었지만, 마지막까지 정신을 잃진 않았다.
쾅!
쳐내고.
콰아앙!
다시 한번.
쾅! 쾅! 콰아앙!
또 한 번 더.
‘이게…… 끝이다!’
부우우우웅!
진혁이 심장을 향해 쇄도하는 단창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쳐 버렸다.
[모든 감각이 되돌아옵니다.]
[구덩이에 깔려 있는 안개가 걷힙니다.]
[언데드들이 안식에 들어갑니다.]
쏟아지는 상태창을 보며, 진혁이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이것도 간만에 하려니 근육이 쑤시네.”
아니 진짜로.
오른쪽 손목이랑 어깨가 뻐근하다. 세 달만 젊었어도 거뜬했을 텐데 참.
‘그것도 이걸 보니 싹 나은 것 같지만…….’
진혁이 바위 위에 놓인 아이템들을 바라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긴 양피지에 적힌 고대 라틴어.
테레사가 원하던 ‘베드로의 서약서’였다.
그리고.
‘그래. 나도 다시 보니 반갑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빛을 뿜어내는 결정체.
‘얼어붙은 눈물’.
드디어 이걸 손에 넣게 됐다.
‘일단, 아공간 인벤토리 조합서와 마혼단부터 챙기고 얼어붙은 눈물은 테레사를 불러서 독과 냉기를 중화시켜야겠어.’
맨손으로 만졌다간 손에 심각한 동상을 입는다.
하지만 테레사를 부르려고 하던 바로 그때였다.
“그거…… 내려놔라. 천천히.”
진혁의 뒤에서 낮게 깔린 음성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