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검은 까마귀 길드 (1)
약 3시간에 걸친, 길고 긴 고문이 끝났다.
결국.
[……딸꾹. 끅. 진짜 죽을 것…… 같……단 말이야.]
엘리스가 가늘게 흐느꼈다.
높았던 콧대가 꺾여 버리고만 것이다.
가속도를 붙인 720도 회전에 엇박자 역회전까지 섞어 줬으니…….
반지 속은 우주 비행사들의 중력 훈련에 버금가는 지옥이 펼쳐졌을 것이다.
흠.
‘내가 조금 심하긴 심했나?’
명색이 한 가문을 이끌었던 가주였는데, 너무 영혼까지 탈탈 털어 버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연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주고 나발이고 간에.
지금은 반지 속에 갇힌 한 마리의 모기일 뿐이었으니까.
“그만 울고 나와.”
진혁이 브라함의 반지에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우우웅!
갇혀 있던 엘리스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어?”
깜짝 놀란 엘리스가 탄성을 내뱉었다.
난데없이 자유를 주니 그럴 수밖에.
“드디어, 드디어…… 복수할 차례가!”
그동안의 수모를 갚아 줄 시간이다.
적어도 당한 것의 1000배 정도는 되돌려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응?”
……뭔가 시야가 낮다?
아니, 낮아도 너무 낮다.
고개를 완전히 치켜들어야 겨우 상대의 모습이 보였으니까.
‘왜 이런 거지?’
고개를 갸우뚱거린 엘리스가 자신의 몸을 훑었다.
그제야 비로소 시야가 바뀐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늘씬했던 키는 간데없고 30cm까지 줄어 버린 신장.
심지어 강력했던 마력도 모두 사라진 지 오래였다.
빨간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봉인이 유지된 상태에서 신체의 일부만 실체화시킨 거지.”
“일부만……?”
“그래. 극히 일부만.”
정확히 말하면 엘리스의 미니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발휘할 수 있는 힘은 본신의 1%도 채 되지 않았다.
물론, 이렇게 제약을 걸었어도 평범한 뱀파이어보단 강하긴 했으나.
자신을 이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까불었다간 박살이 난다는 뜻이다.
“그럴 수가…….”
엘리스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다.
근엄했던 첫 인상을 생각하면,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변해 버린 모습이었다.
진혁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슬슬…… 당근을 줄 타이밍이군.’
채찍은 실컷 썼으니 말라비틀어진 당근이라도 그 무엇보다 달콤하게 느껴질 것이다.
진혁이 엘리스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울지 말고 들어 봐.”
그리고 본격적으로 입을 털기 시작했다.
“……?”
“내가 유적에서 했던 말, 그거 되는 대로 내뱉은 거 아니야.”
유적에서 진혁은 한 가지 약속을 했었다.
엘리스와 그녀를 따르는 혈족에게 자유를 주겠노라고.
“자유를 원하긴 했지만, 이런 식의 자유를 원한 건 아니었다.”
“알아. 누가 이것 보고 자유래?”
진혁이 답답하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단순히 육체적인 자유 말고.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자유. 그걸 되찾아 줄게.”
“그게…… 무슨 뜻이지?”
엘리스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이미 무얼 말하는지 짐작했지만, 확인을 해 주길 바라는 것처럼.
그리고 진혁은.
그 기대에 부응해 줄 생각이었다.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 나를 도와준다면……. 너를 배신한 놈들을 제거하고, 잃어버린 아타락시아 가문의 가주 자리를 되찾게 해 주겠다.”
***
[명예의 전당에 새로운 영상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시련의 탑] 커뮤니티 최상단에 10분짜리 동영상 하나가 업로드 됐다.
험난했던 유적 레이드를 생각하면 지나치게 짧은 영상이다.
그나마도 전투신만 짜깁기해 만든 하이라이트였고.
하지만, 이를 본 시청자들은 시간 따위는 전혀 중요치 않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실패한 줄 알았던 레이드.
그러나 모든 예상을 뒤엎어 버린, 가면을 쓴 플레이어의 등장에 상황은 완전히 역전됐다.
-모찌모찌: 살다 살다 결말을 알고 나서 보는 건데도 손에 땀을 쥐는 건 처음이네.
-흙당라떼: ㅇㅈ. 혼자서 뱀파이어 앞에 섰을 때, 내가 다 쫄리더라.
마법과 물리력을 모두 다룰 줄 아는 밤의 귀족들이 벌레처럼 짓밟혔다.
현실감 따위는 결여된 장면들이 연이어 펼쳐졌다.
-김빠진 사이다: 미쳐 날뛰는 게. 강아지 죽고 자동차 도둑맞은 존윅 성님 보는 줄 알았음.
-토끼공듀: 그건 죽을 짓 하긴 했지.
-아이박슨: 닷씨는 은퇴한 킬러의 강아지를 죽이지 말라구.
-코리안 조커: 근데 진짜 움직임이나 연계가 고인 수준이 아니긴 하네.
-BBQ 뱀파이어 순한맛: ㅇㅇ. 어느 게 상극인지도 모조리 꾀고 있고. 마법이면 마법, 검술이면 검술 완전히 만능캐구만.
쏟아지는 찬사.
감탄과 경탄 외엔 사실 딱히 표현할 말이 없었다.
그 정도로 영상 속 플레이어는 압도적으로 뱀파이어들을 찍어 눌러버렸다.
그때였다.
-고인물 감별소: 역시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이 사람, 맹그로브랑 10강짜리 무기로 명예의 전당 올랐던 사람이잖아!
-흙당라떼: 3층 공략에 왜 안 보이나 했더니. 유적 간 거였어?
-여담충: 여담인데 송천화 머머리 만든 것도 저 사람이라고 함.
-흙당라떼: 엌ㅋㅋㅋㅋ 대머리가 세계 최강인 거 학계 정설 아니었음?
-여담충: 이 세계에선 그냥 못 먹는 타코야키임.ㅋㅋㅋ
-BBQ 뱀파이어 순한 맛: 와 암스테르담의 성녀가 인정할 정도면 다들 머리 박고 인정해야 할 듯.
-김빠진 사이다: 주모! 여기 국뽕 한 사발 추가요!
***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영상에 뺏겨 있는 사이.
당사자인 진혁은 고층 빌딩 앞에 도착해 있었다.
바로, 검은 까마귀 길드가 매입한 성북구의 본거지였다.
“길드들이 돈방석에 앉아 있다더니…… 그게 사실이긴 한 모양이네.”
한강이 보이는 뷰에 35층짜리 빌딩이면, 대체 가격이 얼마냐 가격이?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0억 단위로 호가가 널뛰기를 할 것 같은데?
가면 너머로 보이는 빌딩숲은 진혁이 살았던 원룸 촌과는 아예 다른 세상이었다.
그러나 왜일까?
기가 죽어 버릴 것만 같은 자본력에도 부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건물의 주인은 이제 곧 인생에서 가장 최악의 순간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건수! 그놈이 시킨 겁니다!
유적에서 박하진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내부자가 실토했으니 다른 증거 따위는 필요 없었다.
‘날…… 죽이려 했다 이거지?’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다.
대형 길드끼리 독과점을 하든, 비리를 저지르든.
하지만, 딱 하나. 나를 건드리는 건 예외다.
[냉혹한 심장의 특성으로 인해 인간성이 메마릅니다.]
아마, 성격이 더욱 차가워진 이유는 특전으로 주어진 이 특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진혁이 다리에 마력을 실었다.
그리고 냅다 유리문을 걷어차 버렸다.
콰콰콰콰!
굉음과 함께 5cm가 넘는 강화 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뭐야? 유리가 왜?”
“덤프트럭이라도 돌진한 건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내부.
진혁이 천천히 단검을 꺼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할게. 신건수 당장 데려와서 무릎 꿇려. 아니면 오늘 여기서 줄초상 치를 거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욕설을 내뱉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지금 뭐라고 씨부린 거냐? 이놈?”
“여기가 어느 길드의 소유인지는 알고 싸움을 건 거냐?”
물론, 알고서 왔지.
“여기, 숯불 까마귀 고기 파는 곳 아니야?”
사람 뒤통수나 치려하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제3자가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회사.
덕분에 단단히 화가 난 손님이 먼 길을 나섰다.
대표 면상 좀 보려고.
“진짜 제대로 미치긴 미쳤구나.”
“어이. 경호팀 애들 싹 다 불러. 오늘 푸닥거리 한번 제대로 해 보게.”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손바닥에 가래침을 탁 뱉었다.
먼저 불법 침입을 했으니…….
팔다리 몇 개 부러뜨려 놔도 정당방위다.
캉! 카앙!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쇠파이프를 쥔 채 진혁을 둘러쌌다.
대부분은 일반인이었지만, 마력을 다룰 줄 아는 플레이어들도 섞여 있었다.
“하……! 이 자식 봐라? 영상 속 고인물 콘셉트 그대로 따라했네?”
가장 앞에 있던 깍두기 머리의 남자가 진혁을 향해 손가락질 했다.
기가 막힌다는 한숨은 덤이다.
“마블이니 뭐니 하는 놈들이 애들 다 망쳐 놨어. 지가 스파이더맨인 줄 알고 벽 타다가 응급실 간 놈이 어디 한둘이야?”
“다 필요 없고, 일단 좀 맞자. 어차피 유리창값 물어낼 돈도 없지? 이거 비싼 거니까 만 원당 한 대씩 맞아.”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쇠파이프가 정확히 진혁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카가각!
적중이다.
하지만, 들려온 소리는 뼈를 치는 둔탁한 음이 아니었다.
쇠가 잘리면서 나오는, 고막을 긁는 파열음.
동시에 반으로 잘린 쇠파이프가 바닥에 떨어졌다.
분명, 만 원당 한 대라고 했지?
“이 단검, 돈으로는 못 사는 건데. 더러운 쇳가루가 묻었네?”
특별히 선심 써 준다.
“나는 10만 원당 한 대만 때려 줄게.”
생긋 웃은 진혁이 주먹을 휘둘렀다.
“쿠어억!”
주먹이 안면을 파고들자, 콧대가 완전히 주저앉으며 붉은 피가 뿜어졌다.
퍽! 퍼어억!
이어지는 공격에 검은 양복 사내의 몸이 활어처럼 튀어 올랐다.
“30만 원. 40만 원. 이건 아팠을 테니, 100만 원으로 쳐 줄게. 합이 170이야.”
주먹 4번 만에 남자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조금의 자비도 없는 무자비한 구타였다.
“광혁이가 펀치 몇 방에 뻗었다고?”
“맷집이라면 어디 가서 밀리는 놈이 아닌데…….”
그제야 검은 양복 사내들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것이다.
“그래서 말했잖아. 줄초상 치르기 싫으면 신건수 데려오라고.”
“그건 곤란하군. 길드장님이 너 같은 양아치 놈들 일일이 상대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으시거든.”
이번엔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다른 놈들과는 다르게 마력을 다루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이 녀석이 경호팀을 이끄는 놈인가?
진혁이 남자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흠…… 한 대여섯 대는 견디겠네.”
“뭐?”
“다른 놈보단 조금 튼튼하니까 한두 대 맞고 기절하진 않을 것 같다고.”
근육과 마력의 상태를 보고 내린 판단이다.
“이런 빌어먹을 새끼가…….”
남자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중견 길드의 경호팀장을 맡으며, 자신이 누군가를 무시하면 했지.
무시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딜 가도 대접받는 포지션.
때문에 이런 굴욕은 난생처음이었다.
“죽여 버리겠다!”
스릉!
허리춤에 차고 있던 일본도가 뽑혔다.
1.7m가 족히 넘는 칼이 예기를 뿌렸다.
호오.
이건 또 의외네.
“‘사무라이’에서 파견 나온 놈이었나?”
진혁이 이죽거렸다.
세계 7대 길드.
그중에서 하나인 일본의 ‘사무라이’.
저 칼은 녀석들이 상징적으로 사용하는 무기였다.
“알고 있나?”
“들어는 봤지.”
“그럼, 네놈이 얼마나 멍청한 도발을 했는지도 알겠구나.”
“글쎄……. 공격대에 소속되지 못하고 타국으로 파견이나 다니는 머저리도 그쪽 길드의 소속으로 쳐 줘야 하나?”
실력이 없으니까 임대로 팔려 다니는 거 아니야?
억울하면 메인 공격대에 들어가든가.
“우와아아악!”
결국, 남자가 폭발했다.
빠른 발로 단숨에 좁혀 온 거리.
칼이 진혁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카아아앙!
하지만, 검은 살을 가르지 못했다.
이마에서 약 1cm 떨어진 지점에서 우뚝 멈춘 칼.
전력을 다해 힘을 주었지만, 어떻게 된 건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런 장난감 같은 단검으로…….
아니, 그것보다 한 손으로 막았다고?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탱커 쪽이었나?
아니면 설마.
여러 가정으로 인해 머릿속이 터질 듯이 혼란스러웠다.
바로 그때.
“어금니 꽉 깨물어라. 혀 다친다.”
진혁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