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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혼자 만렙 뉴비-38화 (39/653)

38화 고인물이 성장하는 법 (5)

진혁의 음성이 너무 컸던 탓일까?

노인도 그 말을 듣고 말았다.

곧바로 분노로 얼룩진 고함이 터져 나왔다.

“뭐, 뭐라고? 골…… 골다공증? 지금 그 말. 감히 내 소환수들한테 한 것이냐!”

흠.

초면에 너무 심했나?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걸 어떡해?

어중간한 놈들에겐 막강해 보이질 몰라도, 고인물의 눈엔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화면 뒤에서 목소리만 내지 말고 당장 모습을 보여라!”

화상 통화는 친구한테만 얼굴이 보이는 특성 탓에 제3자는 목소리밖에 들을 수 없다.

물론, 당사자가 동의한다면 전체 통화로 전환이 가능했다.

“괜찮겠어요?”

테레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습니다. 보아하니 꽤 골치 아픈 순간에 연락드린 모양인데, 재밌겠네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상 통화가 전체 통화로 전환됩니다.]

짧은 메시지와 함께, 기묘한 문양의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가 나타났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이어진 것은 거대한 동요였다.

“저, 저 가면은!”

“유적! 유적을 공략했던 그 장본인이잖아요!”

“세상에나. 접점이 있는 사람이 아예 없는 줄 알았는데, 테레사 씨랑 개인적으로도 알고 지냈던 겁니까?”

모두가 고함을 지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가면 뒤에서 완전히 정체를 감춘 플레이어.

그토록 많은 이들이 찾고자 했지만, 단서조차 없던 이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그럴 수밖에.

잡아야 한다. 누구보다 빨리.

그것이 여기 있는 모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테레사 씨는 솔로로 활동하고 있으니, 저 사람도 길드에 소속되어 있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먼저 낚아채는 게 임자라는 뜻.’

‘코인이든 아이템이든 돈이든 아끼지 말고 쏟아 부어야 해.’

‘당연하지. 길드의 수준 자체가 완전히 바뀔 텐데 뭐든 안 아깝겠어?’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어.’

각 길드의 대표들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조건을 제시할 타이밍만을 기다렸다.

바로 그때.

“웃기는군.”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래. 나도 들어는 봤다. 1층 유적에서 활약한 플레이어인지 어쩌고 하는. 하지만, 이번 보스 공략은 그곳과는 다르다.”

유적에선 몬스터 하나하나의 힘이 강력한 대신 수가 많지 않았다.

반면, 3층에 있는 보스 몬스터에게 가는 길은 각 몬스터의 전투력이 낮은 대신 압도적인 물량을 자랑했다.

아예 분야가 다르다는 뜻이다.

“흠. 당신은 가능하다는 말이야? 적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진혁이 검지로 가면 위를 긁적였다.

“그래. 다수의 소환수를 거느리는 것이야말로 나의 특기니까.”

다수의 소환수를 거느린다라…….

소환수란 여기 있는 해골들을 지칭하는 말이겠지?

수가 제법 되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글쎄.

“그 짝퉁 지팡이로는 힘들 텐데.”

“뭐, 뭐라고?”

“반쪽짜리잖아, 그거? 보니까 ‘성인의 심장’이랑 ‘성유에 적신 수의’를 빠뜨리고 합성했구만.”

“그,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어떻게 알긴.

“그거야 진짜 탐욕의 지팡이랑 생김새가 다르니까. 재료를 전부 갖춘 완제품은 오른쪽 해골 아래에 붉은 보석이 박혀 있거든. 무엇보다 해골병사들의 질이 너무 낮아.”

“완성품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고?”

노인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턱이 덜덜 떨리는 걸 보니, 충격이 꽤나 큰 모양이었다.

“궁금해? 원한다면 나머지 재료를 찾는 장소를 알려줄 수도 있는데.”

“정말인가? 대체 어디에서… 크읍!”

노인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알려달라고 말할 뻔했다.

거의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말을 가까스로 집어삼켰다.

여기서 한 마디라도 내뱉었다간 그거야말로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진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역시나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라니까.

‘보나마나 그럴듯한 말로 길드한테 한 몫 뜯어낼 생각이었겠지.’

반쪽짜리 지팡이로 허세를 부리는 것만 봐도 놈의 의도가 훤히 보였다.

계약금 명목으로 코인이나 아이템을 챙긴 뒤 잠적해 버리려는 그 얄팍한 의도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자 결국 노인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좋다. 일단 오늘은 물러나도록 하지. 그리고 너. 누군지 몰라도 이 수모는 반드시 갚아 주겠다.”

“와…… 그 대사. 실제로 하는 놈은 처음 봐.”

“……뭐?”

“아니, 말하면서도 안 창피해? ‘이 수모는 반드시 갚아주겠다니.’ 90년대 애니메이션에서도 그런 대사 썼다간 방송사 사장한테 귓방망이 맞을 수준이잖아.”

그냥 조용히 사라졌으면 흑역사 찍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여간 저놈의 알량한 자존심이랑 입이 문제다.

“네놈…!”

노인이 진혁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꿀렁!

그림자가 솟구쳤다.

“다음에 직접 만났을 때도 지금처럼 여유를 부릴 수 있는지 지켜보지. 그리고…… 여기 있는 분들도 명심하십쇼. 군단급 병력을 보유한 세력은 우리뿐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노인의 모습이 어둠속으로 삼켜졌다.

***

적막에 잠긴 연회장 내부.

짧은 기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기에, 다들 현실을 직시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저런 어설픈 사람한테 맡겨서 또다시 실패하겠다면야 상관없지만, 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은 선택지는 아닌 것 같아 보이네요.”

진혁이 패트릭을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알고 있습니다. 허나, 저희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다른 선택지가 없긴 왜 없어?

진혁이 재차 입을 열었다.

“저한테 맡겨 주세죠. 마인들과 손잡지 않아도 되는 명분도, 탑을 공략해야 하는 실리도 모두 챙겨 드리겠습니다.”

“서, 설마 가능하시다는 말씀입니까?”

패트릭의 동공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혼자서 공략이 가능하다니.

만약, 상대가 유적을 공략한 그 플레이어가 아니었다면 농담으로라도 걸러들었을 것이다.

진혁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가능하고말고.

그걸 위해서 지금 지하 1층에 와 있는 거였으니까.

“그, 그럼 계약금과 보수는 어느 정도를 드려야 할지…….”

“안 주셔도 돼요.”

“예?”

“저 혼자서만 들어가게 해 주시고. 다른 플레이어들이 얼씬도 못 하게 구역 전체를 봉쇄해 준다면, 보수는 받지 않겠습니다.”

진혁의 말에, 패트릭이 금붕어처럼 입을 뻥긋거렸다.

마치, ‘고작 그런 조건으로?’라고 되묻는 듯이.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해 주시는 거죠?”

“그거야.”

진혁이 힐끗 테레사 쪽을 바라봤다.

“인류를 위해, 그리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동료를 위해서 당연한 일을 하려는 것뿐입니다.”

말을 하자마자 진혁은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 젠장.

‘내가 말하고도 손발이 오그라드네.’

‘조금 전에 그 노인의 심정이 이랬겠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소스라치는 진혁과 달리 이 발언을 들은 사람들의 얼굴은 형언할 수 없는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

테레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동료라는 말에 보조개가 연신 씰룩였다.

“허허. 이것 참…… 길드의 대표로서 할 말이 없구만.”

“멋지네요.”

“진정한 영웅이로군. 우리도 반성 좀 해야겠어.”

“하. 나도 저런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어쩌다가 이리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감탄과 탄성.

대형 길드를 대표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반성하기까지 했다.

한 마디 했을 뿐인데, 알아서들 착각해 준다.

‘겉치장은 이 정도 해 두면 되겠지.’

계약금을 안 받겠다고 한 이유는 인류애를 위해서가 아니다.

대형 길드의 편의를 봐 주겠다는 이유는 더더욱 아니고.

진혁이 힐끗 어깨 위에 있는 카메라를 바라봤다.

[현재 모든 화면과 대화 내용이 녹음 중입니다.]

인류를 위해 보상까지 포기하는 플레이어.

이 문구 하나로 얻을 수 있는 혜택이 얼마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길드들이 제시하는 보상보다는 몇 곱절은 많을 것이다.

바보들이야 넙죽 계약금을 받아먹겠지만.

‘나는 작은 것을 쫓으려다 큰 걸 놓치는 머저리가 아니다.’

생각해 보라.

초반부의 길드들이 줄 수 있는 계약금이라고 해 봤자 얼마나 되겠는가?

기껏해야 등급 낮은 성유물 하나?

아니면 코인이나 현금 조금?

‘그런 것 따위는 시간만 있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하지만, 대중에게 비치는 탄탄한 입지와 거기서부터 파생되는 혜택은…… 이후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첫 방송 기능. 만약 첫 데뷔전에서 모두가 실패한 레이드를 솔플로 성공한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하다.

두근! 두근! 두근!

다음 주 로또 번호가 뭐가 나올지 미리 아는 것처럼, 진혁의 심장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 제가 성공하면 언제 다 같이 뵙고 식사라도 한번 하고 싶네요.”

“무, 물론이죠.”

“저희 역시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꼭 그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다들 기대에 찬 얼굴로 한 마디씩 덧붙였다.

진심으로 즐거워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즐거워도…….

‘……나만 할까?’

진혁이 군침을 삼키며, 입맛을 다셨다.

영계가 인삼과 대추를 물고 끓는 물 앞에서 탭댄스를 추고 있는 게 이런 느낌일까?

‘와! 저기 있는 랭커들 중 두 세 명 정도의 능력만 복사할 수 있어도…….’

대박이다 이건.

***

[화상 통화가 종료되었습니다.]

진혁이 사라지자, 모두의 시선이 테레사에게 향했다.

양떼를 노리는 늑대의 눈빛을 한 건 덤이었다.

“테레사 씨, 혹시 방금 그 남자에 대해서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이름, 나이, 국적. 사소한 거라도 상관없습니다.”

“허허, 유럽 쪽은 이번에 새로운 유망주를 영입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엔 저희한테 양보 좀 하시죠.”

“A급 간당간당하게 넘은 것도 유망주라고 해야 하나요? 원한다면 한 트럭으로 드릴 테니, 대신 그쪽이 이번엔 한 발 물러서세요.”

“뭐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어머나. 왜 발끈하세요? 아…… 하긴. 꼭 말에서 지는 사람이 언성부터 높이더라고요.”

“우와아아악!”

또 다른 주제로 순식간에 달아오른 자리.

그 한가운데서.

테레사가 곤란한 듯 울상을 지었다.

‘진혁 씨…… 바보.’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더 잘 풀렸군.’

진혁은 만족한 듯 기지개를 켰다.

마인들이 설쳐 준 덕분에 대형 길드들의 눈도장을 제대로 찍었다.

지금쯤 쟁탈전을 펼치며, 김칫국을 아주 한 사발씩 마시고 있겠지.

‘흠. 테레사한테 뒷감당을 맡긴 게 살짝 미안하긴 한데…….’

나중에 맛있는 거라도 한 끼 사 주든가 해야겠다.

그때였다.

“하아. 하아. 하아. 날, 날 죽일 셈이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엘리스가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 맞다.

이 녀석을 깜빡했네.

테레사와 화상 통화를 하는 동안, 올라오는 벌레들을 상대하기 위해 살짝 무리를 좀 시켰다.

혼자서 놈들을 모조리 막으라고.

그 결과, 남아 있던 마력을 전부 사용해 버린 엘리스는 실신하기 바로 직전이었다.

“불평할 수 있는 걸 보면 괜찮아. 진짜 죽을 것 같으면 말할 힘도 없거든.”

“그,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한 거야? 우리…… 협력 관계가 아니라 노예 계약인 거였어?”

엘리스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뭐야?

갑자기 왜 진지하게 말하고 그래.

양심에 가책 느껴지게.

“쯧! 나를 뭐로 보고! 내가 그렇게 부려먹기만 하는 줄 알아? 안 그래도 코인 거래소에서 ‘마력 보충제’를 구입해서 줄 생각이었어.”

가장 싸구려를 구입해두긴 했지만, 어차피 엘리스는 코인 거래소를 볼 수 없으니 상관없다.

이게 가장 비싼 거라고 우기면 뭐 어쩔 텐가? 플레이어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미안하지만, 나한테는 그런 보충제 따위는 통하지 않아.”

엘리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부려먹기만 하지는 않는다고 했지?”

“그, 그렇게 말하기는 했는데…….”

“후후. 걱정 마. 소모한 마력은 확실히 받아낼 테니.”

엘리스가 생긋 웃었다.

입가에 있는 뾰족한 어금니가 빛났다.

어째 느낌이 좋지 않다.

분명.

이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이…….

‘먹음직스러운’, ‘맛있는 냄새가 나는 피’. 그래, 두 개의 키워드가 들어간 문장이었다.

젠장. 이건 위험하다.

진혁이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인가 뒤로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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