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무한 증식 (1)
액체가 꼴깍꼴깍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마침내 한 생명을 살리는 헌혈(?)이 끝났다.
“하아. 맛있었다.”
엘리스는 만족한 듯, 입가에 묻은 핏방울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반면, 진혁은 복잡한 표정으로 목덜미에 난 두 개의 잇자국을 어루만졌다.
어우야.
머리가 다 어지럽네.
대체 피를 얼마나 빤 거냐, 이 녀석.
“진심으로, 밥값 못 하면 반지 속에 한 달간 가둬 버린다.”
“걱정하지 마. 이 정도 마력이면, 지하에 있는 벌레들을 전부 날려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하여간 말은.”
혀를 찬 진혁이 곧바로 [시련의 탑]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그리고 조금 전 찍어 뒀던 동영상을 등록했다.
[동영상이 업로드 되었습니다.]
명예의 전당에는 여러 번 올랐었지만, 직접 올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아무래도 신규 BJ로 시작할 테니, 상단 노출이나 배너 이벤트 같은 건 받을 수 없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될놈될이라고.
콘텐츠만 알차면, 결국엔 뜰 영상은 뜨게 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입소문을 타면, 조회수야 금방 오르는 게 이 바닥 생리였으니까.
‘좋아, 이건 됐고.’
다음은 ‘코인 거래소’에서 쇼핑을 할 차례다.
진혁이 동공이 빠르게 움직였다.
저 아래에서 원하는 걸 모두 달성하기 위해선 몇 가지 사야 할 아이템들이 있었다.
[거대화 알약(C): 11,500]
[알 수 없는 정육면체(D): 2,500]
[능력 촉진제(D): 5,000]
[끈끈이 풀(F)×4: 400]
[칼투리스 숲의 거미줄(F): 300]
[트윈헤드 오우거의 콧물 100mg(F): 300]
진혁은 순식간에 아이템을 구매했다.
이미 뭘 사야 할지 정해 뒀기 때문에,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쓸데없어 보이는 걸 잔뜩 샀네.”
엘리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많은 코인을 투자해서 왜 이런 쓰레기들을 사?’라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이다.
하긴, 모르는 사람이 볼 땐 완전히 코인 낭비로 보이겠지.
“있어 봐.”
피식 웃은 진혁이 심연의 가장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내려가려고?”
“그래, 지금부터는 정신없이 바빠질 거야.”
아주 보람찬 하루를 보내야 할 거다. 오늘 안에 지하 1층의 끝을 봐야 하니까.
말을 마친 진혁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
부우우우웅!
바람이 전신을 두드렸다.
‘불의 원소’ 조차 유지할 수 없는 돌풍.
때문에 눈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뭔가 대책은 있는 거야? 왜 말이 없어. 대답해! 서, 설마…… 자살할 생각은 아니지?”
엘리스가 진혁의 어깨를 붙잡은 채 비명을 질렀다.
진조인 자신이야 유성우에 매달려 지구에 떨어져도 멀쩡할 테지만.
인간의 신체는 그렇지 못했다.
운이 좋아도 전신 골절로 사망.
재수 없으면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는다.
‘중력 마법이나 비행 마법도 무리야.’
끝이 언제일 줄 알고 계속해서 마력을 쏟아 붓는단 말인가?
본래의 몸으로 현현한다면 모를까.
이런 몸으론 무리였다.
하지만 엘리스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카운팅을 계속할 뿐.
‘17분 13초…… 17분 20초…… 17분 44초.’
마치 정교한 시계처럼.
머릿속의 초침을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
침묵하던 진혁이 고함을 질렀다.
[엘리스가 Lv?? ‘리버스 그래비티’를 발동합니다!]
순간, 진혁의 몸이 중력을 거슬렀다.
중력 마법이 발동된 타이밍은 지면에서 1m 떨어진 남짓.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됐어. 이제 뛰어서 내릴 수 있는 높이니까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돼.”
“어? 어어…….”
엘리스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다시금 중력이 되돌아오며, 진혁이 땅 위에 안착했다.
‘우선 시야부터 밝혀야겠군.’
한 줌의 빛조차 들어오지 않았기에, 주위는 어두운 수준을 넘어선 상태였다.
화르르륵!
[Lv4 ‘불의 원소’가 발동됩니다.]
4개의 불덩이가 사방을 비췄다.
축축한 진흙과 절벽으로 이루어진 장소.
여기가 바로 시련의 탑의 최심부다.
그런데.
“뭐 해?”
어깨 위에 있어야 할 엘리스가 공중에서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뚱한 표정을 짓는 건 덤이었다.
“이번만큼은 숨기지 말고 꼭 말해 줘. 대체 어떻게 바닥의 위치를 알았던 거야?”
“그게 마음에 걸렸던 거였어?”
“그, 그거야…… 말이 안 되잖아, 이건! 무슨 수로 정확한 타이밍을 알려줄 수 있는 건데?”
“감이야.”
“응?”
“그냥 찍은 거라고.”
정확히는 암기하고 있던 거였지만.
한창 시련의 탑에 질렸을 때였나?
새로운 스릴을 찾는다고 미친 짓들을 시도했었다.
높이 3km가 넘는 설산 꼭대기에서 눈사태 일으킨 뒤, 눈썰매타고 내려오기라든가.
맨몸으로 드래곤 레어 들어가서 잠자는 드래곤 목에 방울 달고 나오기라든가.
외뿔 고래 배 속에서 일주일간 생존해 보기라든가.
기타 등등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일들을 했었다.
물론, 여기서 맨몸 다이빙 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한 200번 정도 다이빙을 시도했을 때쯤 되니까…….
싫어도 몸이 기억하게 되더라.
이 구덩이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
“아 진짜. 감이니, 찍은 거니 말고. 제대로 좀 말해 줘. 처음 만났을 때부터 숨기는 게 진짜 많은 것 같은데. 파트너끼리 이러면 안 되지!”
“너 하는 거 봐서 나중에 말해 줄게.”
엘리스가 계속해서 캐물었지만, 진혁은 귀찮은 듯 손사래를 쳤다.
바로 그때.
“…….”
“……이건!”
두 사람이 동시에 반응했다.
동시에.
“우우우웅!”
“끄륵! 끄르르!”
갑자기 진흙이 꿀렁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습하고 축축한 오물 속에서 쉬고 있던 이들이 반응한 것이다.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온 먹잇감들을 잡아먹기 위해서.
스릉.
진혁이 단검을 뽑았다.
‘자이언트 웜이라…….’
중형종답게 5m에 이르는 육중한 몸이 인상적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외피가 워낙 두꺼운 탓에, 어지간한 공격으론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특히나 면적이 작은 단검이라면 더욱더.
그렇다면.
[고유 능력 ‘검의 무덤’이 발동됩니다!]
파츠츠!
검신을 타고 푸른빛이 일렁였다.
모든 것을 베어 버리는 검강이라면, 아무리 두툼한 지방을 가지고 있어도 소용없을 터.
“앞에서 오는 순서대로 전부 묶어.”
“알겠어.”
엘리스와는 이미 수백 차례 호흡을 맞춰 봤다.
눈을 감고 있어도 상대가 어떤 식으로 공간을 장악하고 또 파고들지 훤히 꿰뚫고 있다는 뜻이다.
콰앙!
진혁이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달렸다.
“크오오오오!”
“우우웅!”
지렁이들의 아가리가 쩍하고 벌어졌다.
수십 개의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나며, 지저분한 침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먹잇감을 삼키기 직전.
놈들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또옥! 또옥!
붉은 핏방울로 이어진 수천 개의 가느다란 선들이 보였다.
엘리스의 속박 마법이 발동된 것이다.
진혁이 더더욱 속도를 높였다.
수십 마리 지렁이 사이를 누비며, 단검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서걱! 콰득!
묵직한 손맛이 느껴졌다.
지름 1m에 이르는 육편이 세로로 미끄러졌다.
움직임이 구속된 이상, 지렁이들은 그저 덩치만 큰 과녁에 불과하다.
이어진 것은 그야말로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콰콰콰콰콰콰!
구덩이가 잘린 살덩이들도 가득 찼다.
그렇게 절반을 넘게 쓰러뜨렸을 무렵.
“크아아아!”
“크오오!”
지렁이들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가는 실들로 묶여 있었지만, 상관없다는 듯이 온몸을 마구 뒤틀었다.
‘이것 참, 자학하는 것도 아니고.’
백날 날뛰어 봐야 벗어날 수 없을 텐데…….
설마, 몸의 일부를 희생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진조의 속박은 그리 간단히 풀 수 있는 게 아니다.
제살을 깎아먹는 지렁이들을 보며, 진혁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콰앙!
절벽 쪽에서 굉음이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전갈과 거미를 닮은 곤충들이 틈새 쪽으로 기어 나왔다.
“키에에엑!”
“케엑!”
엄청난 수다.
게다가 놈들 중에는 날개가 달린 비행종도 섞여 있었다.
순식간에 지상과 하늘을 빼곡히 덮은 곤충들.
“이야. 이 많은 걸 혼자서 감당할 수 있겠어?”
엘리스가 토끼눈을 떴다.
그러나.
“그걸 질문이라고 한 거야?”
어깨를 으쓱한 진혁이 단검에 마력을 주입했다.
파츠츠츠츠……!
푸른빛을 낸 검강이 어느새 검게 물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유형화된 기가 하나의 형(形)을 이루었다.
검은 달, 흑월야(黑月夜).
‘레이드의 꽃은 역시 광역기지.
콰콰콰콰콰콰콰!
천유성을 일격에 무너뜨린 최강의 스킬이 적들을 집어삼켰다.
***
검게 물드는 시야.
곤충들은 다가오는 죽음을 앞에 두고 더듬이 하나 꼼짝하지 못했다.
이곳, 지하에서 자신들은 언제나 최상위에 랭크된 포식자였다.
다른 종은 그저 배고플 때 잡아먹은 먹잇감에 불과했고.
하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들은 깨달았다.
필살을 자랑하던 이빨과 발톱 그리고 압도적인 수조차 저 인간 앞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
치이이익!
붉게 달아오른 지면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남아 있는 생명체 따위는 없다.
전멸이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워낙 많은 수의 몬스터를 쓸어 버린 덕에, 레벨도 2개나 올랐다.
욱씬!
큰 기술을 사용한 직후라 전신에 근육이 삐걱거렸다.
혈관도 타들어가는 듯 화끈거렸다.
하지만.
‘확실히 나아졌어.’
현재 보유한 마력은 41.
‘얼어붙은 눈물’을 흡수한 효과가 온몸으로 체감됐다.
이 정도라면 흑월야도 세 번까지는 충분히 사용할 수 있으리라.
후우.
들썩이던 가슴이 진정됐다.
진혁이 어둠속을 향해 한 마디 내뱉었다.
“이제 그만 직접 나오지 그래? 하급 수준의 벌레들로는 아무리 많아 봤자 소용없다는 거…… 슬슬 알 때도 되지 않았나?”
화려한 퍼포먼스를 보여 준 이유.
그것은 바로 이 지하의 주인을 불러오기 위해서였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호오.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냐?”
어둠 속에서 누군가 답했다.
저릿저릿!
단순히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피부에 압박이 느껴졌다.
엘리스를 처음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위압감이다.
‘과연, 신의 몸을 담았던 그릇답군.’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시시한 놈들하고만 싸우느라 지겨웠는데, 모처럼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대답해라. 나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목소리에 실린 마력이 더욱 짙어졌다.
“물론 알고 있지. 사막을 배회하는 사냥개에 대해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봤거든.”
사막의 사냥개.
그것이 이집트의 신격, 아누비스를 낮잡아 부를 때 쓰는 말이었다.
“이곳에 처음 온 인간이라 잠깐의 담소 정도는 나눈 뒤 죽이려 했건만,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구나.”
“수다나 떨 생각은 없고, 빨리 덤비기나 해. 네 녀석이 직접 모습을 보여야만 둥지도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거 아니야?”
무한대로 벌레들을 증식시킬 수 있는 특수 아이템, ‘하이브’.
지하 1층이 최고의 사냥터라 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놀랍군. 설마 그것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그것 외에도 더 많은 걸 알고 있지. 기왕이면, 서로의 시간 절약을 위해 벌레 뒤에 숨지 말고 직접 나서 줬으면 좋겠지만.”
“푸하하하! 고작 네까짓 거를 상대로 이 몸이 직접 나서란 말이냐?”
어림도 없다는 듯 광소가 터져 나왔다.
하긴, 이런 반응이 정상이겠지.
아직까지 저 녀석의 입장에서 나는 미물이나 마찬가지일 터.
결국, 녀석이 갖고 있는 능력을 복사하려면 더욱더 얄밉게 도발해야 한다.
[아누비스의 심판]
내용: 아누비스가 세 가지 질문을 하고 대상이 세 가지 질문에 답하면, ‘저주’가 발동됩니다. 저주가 걸린 자는 모든 스탯이 50%만큼 감소하며, 고유능력과 스킬이 1분간 봉인됩니다.]
절대 판정 효과를 갖고 있는 사기적인 고유 능력.
그리고 저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복사 조건: 아누비스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만들어 그의 의식을 담고 있는 그릇을 파괴하십시오.]
아무리 녀석이 본신이 아닌, 의식의 일부만 현현된 석상에 불과할지라도.
신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 극악의 확률을 뚫고 조건을 달성할 경우.
‘나는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질문을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