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검성의 제안 (1)
[천유성님이 화상 통화를 요청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화면에는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진혁이 화면에 있는 통화 표시를 드래그 했다.
“이야. 살아 있었네?”
마인들이 꽤나 만만치 않았을 텐데…….
역시 검성이 한 수 위였던 모양이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네놈 때문에 내가 밤새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알고 있는 거냐! 그 찰거머리 같은 놈들을 처리하느라 잠도 한 숨 못 잤단 말이다!”
천유성이 목소리를 높였다.
“알지. 근데 그거 다 널 위해서 했던 거야. 넌 다른 건 다 좋은데 대인전 실전 경험이 부족하더라고.”
“그, 그걸 말이라고!”
“게다가 역지사지라는 단어 좀 알려주고 싶어서. 찰거머리한테 쫓기는 심정이 어떤지 이번에 제대로 배웠을 거라고 믿을게.”
“진심으로…. 네놈은 죽은 다음 반드시 지옥으로 갈 거다.”
“으음. 그건 부정하기 힘들 것 같네.”
선과 악으로 양분한다면 아마, 나는 악에 더 가까울 것이다.
천국과 지옥 둘 중에 고르라면 지옥이 좀 더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나한테 욕이나 하려고 연락한 것 같지는 않고. 원하는 게 뭐야?”
정말로 마인들에 관한 일로 보복을 하려고 했으면, 이렇게 대화나 나누지 않았을 거다.
직접 찾아와서 칼부터 휘둘렀겠지.
몇 년 동안 100번도 넘게 싸워 봤기에, 진혁은 천유성이란 인물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눈치는 더럽게 빠르군. 사실 너에게 제안할 게 한 가지 있다.”
“마인 이야기를 먼저 꺼낸 건 그 제안을 거절하지 못 하도록 밑밥을 깐 거였냐?”
“마음대로 생각해라.”
“알겠어. 일단 이야기나 들어볼게.”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천유성이 입을 열었다.
“1시간 뒤, 각성자 협회에서 행사가 열릴 거다. 나를 포함해 AA급 이상 판정을 받은 플레이어들이 모여 무도회(武道會)를 개최하기로 되어 있지.”
이것 참…….
무도회라니.
“세월도 좋네. 보스 공략도 계속 실패하고 있는 중인데, 협회에서 무도회를 연다고?”
“그래서 개최하는 거다.”
“뭐?”
“연이은 실패로 인해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협회와 길드의 공신력은 떨어지려 하고 있지. 때문에 이번 무도회를 통해 플레이어들이 얼마나 강하고 믿을 수 있는지 보여 주려는 생각인 거다.”
“흐음. 일리는 있네.”
화려하고 다양한 능력을 지닌 플레이어들의 대련.
몬스터를 사냥하는 레이드야 뷰튜브를 통해 자주 나왔지만, 플레이어와 플레이어간의 전투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드물었다.
확실히 팽창해 있는 긴장을 풀어 주기엔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과거 로마의 황제들이 콜로세움을 통해 대중들을 만족시켜 준 것처럼.
그래, 뭐.
의도야 알겠는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난 AA급 이상 판정을 받지 못 했는데?”
“무도회의 우승자에겐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 있는 성유물의 레플리카 중 하나를 고르거나…….”
천유성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뭔가 느낌이 쎄하다.
“혹은 무도회에 참여하지 않은 플레이어를 상대로 대련을 신청할 수 있는 지목권을 얻거나.”
젠장.
불길한 느낌은 왜 한 번도 틀리지 않는 걸까?
진혁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설마, 나랑 싸우겠다고 하려고?”
“널 쓰러뜨리는 것만이 내가 탑을 오르는 유일한 이유다. 그것이 모두가 지켜보는 앞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
와. 누가 전투광 아니랄까 봐.
소원 한번 골 때린다.
어쩌면 진정한 중2병은 저 녀석이 갖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근데, 내가 거절해 버리면 그만 아니냐? 그 지목권인지 뭔지 하는 거?”
“물론, 그래도 된다. 거절을 하면 겁쟁이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긴 하지만, 그걸 신경 쓰지 않는다면야 상관없겠지.”
“그럼, 나도 거절하면 되겠네. 낙인보다 귀찮은 게 더 싫거든.”
다행이다. 빠져나갈 수 있는 뒷구멍이 있어서.
진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였다.
“아니, 넌 거절하지 못할 거다.”
천유성이 안주머니에서 검은색 티켓 한 장을 꺼냈다.
황금색 글자와 홀로그램이 박혀 있는, 한 눈에 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티켓이었다.
“뭐냐 그건?”
“블랙마켓에서 온 초대장이다. 이게 있으면 내일 자정,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경매에 참여할 수 있지.”
“……!?”
천유성의 말에, 진혁이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야 그럴 수밖에.
블랙마켓에서 주최하는 경매의 초대장은 구하고 싶어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굉장히 까다로운 조건들을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소문만 있을 뿐.
정확한 입수 방법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구하다니.
‘미끼치고는 너무 먹음직스러운 걸 가져왔잖아?’
플레이어들이 사용할 수 있는 ‘코인 거래소’와는 달리 현금이 주요 화폐인 터라, 현금이 많은 이들에겐 꽤나 매력적인 기회였다.
경매품으로 나오는 것들도 하나같이 쓸 만하겠지.
3일 뒤, 4층을 공략하려면 필요한 아이템들이 있었는데.
경매장이라면 훨씬 더 좋은 것들로 구할 수 있으리라.
“대신, 네가 우승을 하지 못하면 티켓은 공짜로 넘기는 거다?”
“걱정마라.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천유성이 티켓을 다시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최고의 컨디션으로 와라. 피곤해서 졌다는 변명 따위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화상 통화는 거기서 끝났다.
마지막까지 녀석다운 말을 남긴 채.
***
지하 1층에서 나와 각성자 협회에 가는 길.
진혁은 지하에서 못 했던 일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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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강진혁
성별: 남
나이: 27세
레벨: 19
힘 8 민첩 8 체력 8 마력 41 간극 100 행운 10 적응형 10
보유한 스탯 포인트: 54
보유한 코인: 2740
직업: 없음.
고유 능력: 융합(融合), 검의 무덤, 별의 가호, 아누비스의 심판
스킬: Lv4 ‘불의 원소’, Lv3 ‘진실의 눈’, Lv3 ‘교감’, Lv3 ‘염혼의 낙인’, Lv3 ‘독식’, Lv3 ‘얕은 호흡’, Lv1 ‘얼음조형’, Lv1 ‘데이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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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포인트라…….’
이걸 보니 확실히 실감 난다.
하루 동안 얼마나 미친 듯이 사냥했었는지.
게다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고유 능력과 스킬들에, 진혁의 입꼬리가 연신 위로 향했다.
특히 지하에서 새로 얻은 ‘얼음조형’과 ‘데이라이트’ 그리고 ‘아누비스의 심판’은 앞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데가 무궁무진 할 터.
미쳤다.
남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장 속도에 미쳤다는 말밖엔 할 말이 없었다.
진혁의 시선이 다시 스탯으로 향했다.
‘스탯은 지금까지 투자하지 않았던 것 위주로 골고루 올려야겠군.’
특화형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다양한 환경에서 대처하려면 다른 스탯도 최소한의 기준치는 넘기는 편이 좋았다.
탑의 위로 갈수록 워낙 변칙적인 기후와 몬스터들이 등장했으니까.
[힘이 8 → 16으로 상승합니다.]
[민첩이 8 → 16으로 상승합니다.]
[체력이 8 → 16으로 상승합니다.]
3개의 스탯에 모두 8포인트씩 투자했다.
그럼 어디…….
진혁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돌멩이를 쥐었다.
그리고 가볍게 힘을 주었다.
우드득.
두 쪽으로 갈라진 돌멩이.
확실히 악력이 달라졌다. 민첩을 올린 덕에 전신의 감각 또한 더욱 예리하게 갈무리된 느낌이었다.
‘체력은 전투가 장기화됐을 때 체감할 수 있을 테니 좀 더 지켜봐야겠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축하드립니다! 당신이 올린 영상이 ‘HOT issue’ 동영상으로 선정되셨습니다.]
눈앞에 황금색 상태창이 나타났다.
오.
벌써, 입소문을 탄 건가?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퍼진 모양이다.
진혁이 재빨리 동영상을 클릭했다.
가면을 쓴 자신과 패트릭, 테레사를 비롯해 대형 길드의 랭커들이 보였다.
물론, 마인에 관해서 적당히 편집해 둔 상태였다.
이 영상의 목적은 길드의 이미지를 깎아 먹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식으로 어그로를 끌지 않아도 이미 반응은 폭발적이었으니까.
-헬린이 울어요: 무보수로, 그것도 혼자서 보스한테 가겠다니. 이거, 실화임?
-소리벗고 팬티질러: 와. 실력만 개쩌는 줄 알았는데, 인성까지 지리네.
-오른이 되세요: 개멋있다. 순수하게 사람들을 생각해서 위험을 무릅쓰겠다는 거잖아.
-kd1004: 랭커들 다 보고 있냐? 보고 좀 배워라. 이게 노블레스 오블리주지.
-야스오는 과학: 근데 솔플로 보스 공략이 가능하긴 한 거임?
-허언증 판독기: 다른 놈이 저렇게 말했으면 쌍욕부터 박았을 텐데, 저 플레이어가 지금까지 보여준 업적을 보면 진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듦.
-송가인2주 압수: ㅇㅈ.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감.
-Dimian Peter: 형. 얼굴 한 번만 공개해 주라. 진심 앞으론 형 영상 조회수만 올려줄게.
-헐크가헐크: 222222
-람쥐썬더: 33333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이었다.
베일에 싸여 모두가 궁금해 하던 화제 속 플레이어.
그런 실력자가 당당하게 보스 공략을 선언했으니 분위기가 달아오를 수밖에.
그 말을 뒷받침하듯, 이미 조회수도 지붕을 뚫고 하늘로 날아간 지 오래였다.
[조회수: 50,536,988]
탑 외 거주자들이 하루에 한 번만 동영상을 시청할 수 있는 걸 생각하면, 5천만 조회수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수치였다.
1만 조회수당 100코인을 주니 5천만이면 50만 코인.
거기에 수수료 명목으로 90%를 떼 갔으니 5만 코인을 정산 받을 수 있었다.
‘수수료를 90%나 떼어 가는 미친 조항만 아니었어도 50만 코인을 버는 건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건, 전 세계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5만 코인이면 눈이 돌아갈 만한 양이긴 하지.’
한국에서야 비교할 대상이 없을 테고.
해외에 인기 많은 랭커들도 5만은커녕 1만 코인도 모으지 못했을 것이다.
매일 같이 동영상을 업로드하는 헤비 유저들조차 영상 하나당 백에서 천 단위의 조회수를 올리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코인은 일단 잘 모아두도록 하고.’
수수료를 제외한 정산금을 받은 진혁이 이내 걸음을 멈췄다.
여러 일들을 처리하는 사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
각성자 협회 정문.
검은색 양복을 빼 입은 천유성이 보였다.
저 녀석은 오늘 대련한다는 놈이 복장이 저게 뭐냐?
설마, 싸우는 무도회랑 춤추는 무도회랑 착각한건 아닐 테고.
진혁이 고개를 가로젓는 사이 천유성도 진혁을 발견했다.
“늦었군.”
천유성이 한 쪽 눈을 치켜떴다.
꽤나 오랫동안 기다린 것처럼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늦긴. 아직 약속 시간까지 1분 남았어.”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동시에 눈으로 천유성의 위아래를 훑었다.
‘유적에서 만났을 때보다 훨씬 강해졌네.’
날카롭게 갈무리된 기운.
신체 또한 탄탄해졌다.
과연, 재도전을 하고 싶어 하는 게 이해간다.
눈부신 성장을 했으니, 이번에야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천유성의 바람과 달리, 격차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보다 더욱 벌어졌지.
‘이거, 안쓰러워서 어떡하나.’
똑같이 시간을 보내도……. 그리고 똑같이 죽어라 노력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둘 사이 갖고 있는 정보의 질이 너무나도 달랐으니까.
그런데 바로 그때.
“뭐야. 천유성인지 뭔지 하는 떨거지가 너였냐? 생각보다 너무 비쩍 곯았는데?”
양복이 불쌍하다 느낄 정도로 터질 듯한 근육질의 남자가 다가왔다.
남자의 목에 있는 문신.
알고 있는 문신이다.
‘호오.’
진혁이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거, 꽤나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길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