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아타락시아의 가주(家主) (1)
마인 협회의 자본력이라면, 이번 회 차 전체를 장악할 수 있다는 협박.
아니, 단순히 협박이 아니다.
놈들에겐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으니까.
진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날 압박하려는 생각인가.’
일이 골치 아프게 됐다.
작정하고 달라붙으면 아무리 라스베이거스에서 따 둔 3000만 달러로도 안심하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별거 없어 보이는 놈들인데, 이 녀석들이 왜 너에게 말을 함부로 하는 거지?”
엘리스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별 생각 없이 던진 말.
하지만, 그 말에 캐드릭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진혁이야 이유가 있으니 참고 있다지만…….
처음 보는 소녀는 거기서 예외였다.
“별거 없어 보인다는 게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인데. 대해(大海)에 있는 사금 한 줌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는 인간 따위가 왜 내 계약자에게 함부로 말을 지껄이느냐는 뜻이다.”
……세다.
역시나 엘리스의 사전에 앞뒤 잰다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앞뒤 재지 않는 건 캐드릭도 마찬가지였다.
“허허. 이거 어이가 없군. 강진혁 플레이어님. 대체 어디서 이런 버릇없는 꼬맹이를 데려온 건지 모르겠지만, 입단속 좀 잘 시키시죠.”
역시, 뇌에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던진 말.
하지만, 그 파장은 막대했다.
“꼬……맹이?”
엘리스가 방금 들은 말을 곱씹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그 순간. 엘리스의 동공에 작은 불꽃이 튀었다.
“꼬맹이!?”
조금 전까지는 귀찮은 날벌레를 상대하는 것 정도였다면, 지금부터는 짓밟아 죽여야 할 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어른들 이야기하는데, 함부로 끼어들지 말거라. 치기 어린 짓거리를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이 자식, 죽여 버리…….”
엘리스가 손톱을 세우려던 바로 그때.
“레이디스 앤 젠틀맨! 오랜 시간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로, 지금부터 블랙마켓 제175회차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증폭시킨 목소리가 원형 극장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오오오!”
“드디어 시작이군!”
손님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다들 기대에 찬 얼굴로 첫 번째 경매품을 기다렸다.
덕분에 엘리스와 캐드릭의 기 싸움도 거기서 멈췄다.
“강진혁 플레이어님. 그럼, 조금 뒤에 다시 뵙죠. 물론, 그때는 저에게 아이템을 넘겨 달라고 애걸해야 하실 테지만요.”
캐드릭이 짧게 목례한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경매가 이어졌다.
“물품을 소개해 드리기 앞서, 초대장과 함께 나눠 드렸던 경매 리스트 외에도 추가적으로 5개의 물품이 더 준비되어 있으니, 모쪼록 잔고를 적절히 관리하시길 바랍니다.”
5개의 미공개 서프라이즈 출품!
나비넥타이를 멘 진행자가 경매의 흥을 돋웠다.
“그럼, 첫 번째 물품은 바로 미국 애리조나 주에 떨어졌던 운석입니다. 보존 상태가 매우 뛰어날 뿐더러 시련의 탑으로부터 나온 마력으로 인해 무기나 방어구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가격은 100만 달러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경매품부터 마력이 주입된 게 튀어나왔다.
무기나 방어구. 요즘 가장 먹히는 키워드 아닌가.
“150만!”
“200만!”
“250만!”
“이건 내 거다. 500만!”
순식간에 치솟는 값.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멍청한 놈들이로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혁이 속으로 혀를 찼다.
마력이 주입된 운석이라고 해 봐야 제련 기술이 없으면 말짱 꽝인데. 그걸 500만 달러나 주고 사다니.
쓰레기를 모으는 취미라도 있는 거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헛돈만 쓰는 거다.
‘적어도 현 시점에서 운철을 다룰 수 있는 대장장이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진혁은 그 말도 안 되는 돈지랄에 살포시 한 숟가락 얹었다.
“600만.”
단숨에 최고 기록을 경신해 버린 가격.
“저걸 사려고?”
엘리스가 즉각 물었다.
한 눈에 봐도 별로인 물건을 구입하려하니 의구심이 들 수밖에.
“있어 봐. 사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이거에 돈을 쓰면 틀림없이…….
“650만.”
캐드릭이 더욱더 금액을 올렸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다.
‘내가 얻고자 하는 게 어떤 건지 모르니, 이쪽이 배팅하는 것마다 무조건 지르는 방법밖엔 없겠지.’
놈들의 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한계는 있을 터.
이런 식으로 밀당을 하면서 야금야금 소진시킨다면 ‘그 아이템’이 나왔을 때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700만.”
“750만!”
진혁이 한 번 더 가격을 올린 뒤, 캐드릭이 또다시 추격하자 두 손을 살며시 들어올렸다.
포기하겠다는 의사였다.
“750만 달러로 낙찰되었습니다!”
“…….”
캐드릭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진혁의 의도가 무엇인지 깨달은 탓이다.
허나, 늦었다.
이미 750만 달러를 날린 뒤였으니까.
게다가 상대가 노리는 게 뭔지 모르는 이상, 계속해서 따라가는 방법 외엔 뾰족한 수단이 없었다.
‘부디, 준비된 잔고가 두둑하길 빌어 주지.’
진혁이 똥 씹은 얼굴을 한 캐드릭을 향해 생긋 웃어 줬다.
“다음 물건도 또 굉장한데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찾았을 때 작성했던 항해 일지입니다!”
블랙마켓에서 주관한 경매답게 각종 희귀한 보물들과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연대 미상의 수상한 그릇, 마력으로 오염된 라플레시아, 중세 마녀사냥 때 사용됐던 고문 기구 등등.
진혁은 그들 가운데서 마력이 주입되거나 특별해 보이는 유물들 위주로 미끼를 뿌렸다.
아주 먹임직한 미끼를 말이다.
게다가 포기할 듯 말 듯, 능수능란한 심리전을 펼쳐 경매의 최고 금액을 계속해서 경신해 나갔다.
신사적인 경매에 있어 최악이라 해도 좋을 악마적 재능.
그 결과, 캐드릭은 전혀 쓸모도 없는 엉뚱한 아이템에 7000만 달러 이상을 사용해야만 했다.
***
뿌드득!
캐드릭이 어금니를 부러져라 갈았다.
“이…… 미꾸라지 같은 놈.”
분노와 수치심으로 인해 붉게 달아오른 얼굴엔 진혁을 잘게 찢어 버리고 싶다는 욕망만이 가득했다.
돈 때문이 아니다.
7000만 달러가 적은 액수는 아니었지만, 마인 협회에서 허락해 준 잔고는 그걸 아득히 뛰어넘었다.
단지.
상대의 저 치졸하고 비열한 작전에 미치도록 약이 오를 뿐.
“스승님. 차라리, 저희가 한 번 정도 포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보아하니 저 녀석이 갖고 있는 자본금 자체는 많지 않은 것 같은데, 아예 파산시켜 버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낙찰을 받으면 반드시 돈을 지불해야 한다.
뒤늦게 잘못 입찰을 했니 뭐니 하는 개소리는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멍청하긴! 그렇다가 놈이 원하는 걸 순순히 얻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냐?”
“그, 그건…….”
“네놈이 애초에 포섭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이 사달이 난 거니, 닥치고 있거라. 돈에 손해는 조금 있겠지만, 어차피 최종 승자는 이 몸이 될 테니까.”
그래.
7000만 달러든 몇 억 달러든.
결국 마지막에 웃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경매란, 최후엔 많은 자본을 갖고 있는 사람이 승리하는 게임이었으니까.
바로 그때.
“다음은 마니아분들을 위한 아이템이로군요. 소개드립니다. ‘최초의 체스판’을!”
진행자가 새로운 물건을 소개했다.
낡고 투박해 보이는 체스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흠.”
“별로 당기지는 않는군.”
“그나마 체스 말도 하나도 없네. 나도 취미 삼아 종종 두긴 하지만, 저래서야…….”
“누가 아니래? 고급스러운 원목으로 조각한 거라면 또 몰라?”
“어차피 좀 있으면 ‘어룡의 심장’이 나올 텐데, 그때를 대비해서 총알이나 아껴 두자고.”
“맞는 말이야. 이번 경매의 메인 이벤트는 바로 그거니까.”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여태껏 나왔던 보물들에 비해서 너무나 식상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진행자조차 마니아를 위한다는 말로 애써 포장했을까?
물론, 몇몇 콜렉터들에겐 꽤나 구미가 당기는 물건임에 틀림없었지만. 대부분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시작은 5만 달러부터입니다. 원하시는 분께선 입찰 시작해 주십시오.”
“100 달러. 우리 집 화장실 슬리퍼를 올려 두는 용도로 쓰지.”
“푸하하! 난 150 달러로 하지. 마침 우리 귀염둥이 고양이. 알렉산더의 발톱 가는 용도로 쓸 나무판자가 필요했거든.”
“200 달러 여기 있다.”
“완전히 호구로군. 200 달러 이상은 없겠어.”
낄낄대며 웃는 소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딱 한 명.
진혁만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두근! 두근! 두근!
‘드디어 나왔다.’
3층 보스 공략을 위한 핵심 재료.
이번 경매에 참여한 이유가!
진혁은 힐끗 뒤쪽을 향해 곁눈질했다.
캐드릭과 알렉스 역시 별달리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동안 뿌려 둔 밑밥들이 제 역할을 해야 할 텐데…….’
지금까지 해 온 노력이 결실을 맺는지 알아볼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5만.”
진혁이 입찰을 시작했다.
“뭐?”
“저기에 5만을?”
“제정신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어떤 멍청이가 저딴 거에 5만 달러나 쓴단 말인가?
그러나 이어지는 목소리에 비웃음은 단번에 사라졌다.
“10만.”
캐드릭이 입찰 전쟁에 뛰어들었다.
“15만.”
“50만.”
진혁이 즉각 가격을 올렸지만, 캐드릭 역시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따라붙었다.
젠장. 캐드릭의 저 표정.
반신반의하고 있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100만.”
진혁이 또 다시 올리자.
“1000만.”
이번엔 단위 자체가 달라졌다.
이건 떠보는 수다.
이렇게까지 가격을 점핑시켰는데도 따라올 것이냐고 묻는.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상대에게 확신을 주게 될 것이다.
이쪽이 노리고 있는 게 바로 이 아이템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 미친. 무슨 체스판 따위에 1000만 달러를 써?”
“우리가 모르는 뭐라도 있는 건가?”
“미치겠네. 저 가격에 따라 붙을 수도 없고.”
술렁이는 분위기.
아까와는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어느새 원형 극장에 모인 손님들이 이번 경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1500만.”
진혁이 무겁게 입을 뗐다.
벌써, 갖고 있는 액수의 절반까지 다가왔다.
하지만 캐드릭은 입찰 가격을 계속해서 터무니없이 올려 버렸다.
“3000만.”
그렇게 말했을 때.
진혁은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이 앞은 보유한 잔고의 최대치를 넘어섰기에.
“훗. 그 액수가 한계였군.”
캐드릭이 여유만만하게 팔짱을 꼈다.
몇 초 늦게 정신을 차린 진행자가 황급히 마이크를 붙잡았다.
“3000만! 3000만 이상은 없으신 겁니까?”
수수료로 10%를 떼는 터라, 무려 300만 달러의 수익이 블랙마켓에 돌아갔다.
처음 이 물건을 출품했을 때, 수수료로 5천 달러만 받아도 다행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300만 달러는 무려 600배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어차피 이 이상의 입찰은 나오지 않는다.
“그럼, 56번째 경매품 ‘최초의 체스판’은 3000만 달러에 낙찰되었…….”
그런데 진행자가 종료를 외치려던 바로 그때.
“1억.”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매에 참여한 적 없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것도 바로 진혁의 옆에서.
“엘리스?”
진혁의 동공이 급속도로 팽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