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천수천안관음(千手千眼觀音) (1)
“어, 어느새…….”
캐드릭의 동공에 검은 달이 맺혔다.
죽음의 순간.
캐드릭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걸 느꼈다.
다가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대체 어느 틈에 온 걸까?
아니, 애초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도망갈 수 있다는 선택지가 있기는 했던 걸까?
온갖 가능성과 가정들로 인해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서걱!
캐드릭이 이 세상에서 한 마지막 생각이었다.
쿠웅!
목을 잃은 시체가 바닥에 쓰러졌다.
“키에에에.”
“케엑!”
캐드릭이 죽자, 그가 부리던 모든 언데드들이 한 줌의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아직까지 살아 있는 네크로맨서들이 있었지만,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었다.
분노한 석상들이 곧바로 녀석들의 뒤를 쫓았으니까.
“으아아악!”
“사, 살려 줘!”
피로 물들기 시작한 전장.
일방적으로 사냥하던 네크로맨서들은 어느새 쫓기는 사냥감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해.
‘으음. 다들 뭔가 바쁜 거 같네.’
진혁은 경계가 허술해진 4층 석탑으로 다가갔다.
***
거대한 화강암을 깎아 만든 4층짜리 석탑.
내실로 가는 열쇠가 보관된 금고 앞엔, 창과 검으로 무장한 세 기의 석상이 있었다.
“그오오오!”
“그아아!”
본래, 이 규모의 10배가 넘는 병력이 있어야 하는 걸 생각하면, 세 마리는 빈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진혁이 관절을 우두둑 꺾었다.
“뇌가 없는 게 좋긴 하겠어.”
방금 그렇게 압도적인 실력 차를 보여 줬어도 겁먹지 않을 테니.
그저 보스 몬스터가 명령한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들.
어찌 보면 심장 없이 움직이는 군대야말로 최강의 군대인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진혁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창과 방패를 집었다.
‘이 무기로 싸우는 것도 간만이네.’
왼손에 든 둥근 원형 방패로 정면을 가린 뒤 그 사이로 창을 뻗는다.
한창 영화 ‘300’에 빠져 살았을 때 질리도록 연습해 둔 바로 그 자세였다.
비록 혼자여서 영화에서처럼 300명이 펼치는 합격전은 할 수 없었지만.
혼자서도 최대한의 효율을 낼 수 있도록 손에 물집이 잡힐 때까지 창과 방패를 다뤘었다.
아! 물론, 창술과 방패술 외에도 한 가지 더 연습해 뒀다.
이게 가장 중요한 거지.
“내가 갈까? 아니면 너희가 올래?”
진혁이 자세를 잡은 상태로 천천히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여기서 포인트는 슬쩍슬쩍 허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마치, 이렇게까지 해 주는데도 오지 않을 거냐고 묻는 것처럼.
그 도발이 먹힌 걸까?
석상들이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쾅!
콰앙!
온다.
진혁이 방패를 비스듬히 세웠다.
방패술의 묘미는 충격을 분산시키는 것.
카가가가각!
석상의 검과 창이 방패의 빗면을 긁고 지나갔다.
‘지금이다!’
충격을 흘려버린 진혁이 그대로 몸을 360도 가량 회전했다.
콰앙!
회전력이 가미된 창이 그대로 석상의 머리통을 꿰뚫어 버렸다.
거의 동시라도 해도 좋을 찰나.
진혁은 두 번째 석상의 다리를 향해 창을 내리쳤다.
“……그오?”
석상의 다리가 꺾이며, 무게중심이 무너졌다.
정확하게 관절 부위를 노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너는 얼어 죽을 관상이야.”
투욱.
창이 석상의 가슴에 닿았다.
[Lv2 ‘얼음 조형’이 발동됩니다!]
쩌저적!
창끝에서 뿜어진 냉기가 석상의 가슴팍에 달라붙었다.
순식간에 퍼져 나가는 냉기.
전신이 얼어버리는 데까진 채 3초가 넘지 않았다.
‘이걸로 두 마리째.’
이제 마지막 한 마리만 남았다.
진혁이 뒷걸음질 치는 석상을 향해 다시 기본자세를 취했다.
창과 방패가 완벽하게 공격과 수비를 분담했다.
그런데.
“그오오오오!”
괴성을 내지른 석상이 갑자기 석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석탑 내부에 있던 황금색 열쇠를 꺼냈다.
뭐지?
열쇠를 넘기고 목숨 구걸이라도 하려는 건가? 라고 생각했는데.
꿀꺽!
석상이 그대로 손에 쥐고 있던 열쇠를 삼켜 버렸다.
[내실(內室)로 가는 열쇠가 반응합니다.]
[게이트가 활성화됩니다!]
[게이트 너머의 존재가 부름에 응답합니다.]
연이어 나타나는 상태창들.
우우웅!
공기가 급변했다.
“이거, 생각보다 패기 있는 놈이었네.”
설마, 자신을 희생해 게이트를 열 줄이야.
진혁이 혀로 입술을 적셨다.
바로 그때.
쿠쿠쿠쿠쿠!
열쇠를 삼킨 석상의 배에서 녹색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자신을 희생해서, 내실에 있는 상위 몬스터를 불러오려는 것이다.
저릿저릿!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마력이 용솟음 쳤다.
피부에 타고 전해지는 살기에, 진혁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뜻밖의 상황에 두렵거나 당황해서가 아니다.
두근! 두근! 두근!
너무 싱겁게 끝나 버린 전투에 달아오른 몸을 주체할 수 없었는데…….
드디어 제대로 싸워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스로 유리한 고지를 버리고 나와 준다면야 나야 고맙지.’
어차피 상대해야 할 네임드 몬스터라면 내실에 있을 때보다 밖에서 상대하는 편이 좋았다.
잠시 뒤, 일렁이는 게이트 너머로 무언가 다가왔다.
저벅.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건, 수많은 팔을 갖고 있는 관음상이었다.
[네임드 몬스터 ‘천수천안관음(千手千眼觀音)’이 현현합니다!]
“흐음.”
천수관음이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자애로운 미소 너머에서 짙은 피 비린내가 풍겼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진혁에게 멈췄다.
“이건 의외로구나. 침입자 중에 석탑에 있는 열쇠까지 위협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다.”
“뭘 이 정도 가지고 놀라? 며칠 안으로 여기 보스 몬스터도 베어 버릴 건데.”
“하하하! 맹랑한 인간이로고. 다른 건 몰라도 그 배짱 하나만큼은 인정해 줘야겠구나.”
천수관음이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쪽은 진심인데 녀석에겐 농담으로 들리는 모양이다.
젠장.
이래서 지성체 몬스터랑 싸우는 게 성가시다.
‘교감’의 효과로 인해 의도하지 않아도 친근감을 느끼게 만들었으니까.
“무게는 그만 잡고, 덤벼. 빨리 끝내고 쉬고 싶으니까.”
“나는 너와의 문답을 좀 더 즐기고 싶다만, 너는 아닌 건가?”
“나도 수다 떠는 걸 싫어하진 않는데, 그 자리엔 칼이랑 피 대신 맥주랑 치킨이 있어야 하고. 얼굴이 각진 석상 말고 말랑말랑한 피부를 가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
“이 찰나 또한 소중하게 여기거라, 어린 인간아. 죽을 때가 되면 지금 이 시간조차 그립게 느껴질 터이니.”
스릉!
천수관음이 등에 있던 검 한 자루를 뽑았다.
그걸 시작으로.
스릉! 스릉! 스릉!
수없이 많은 손에 무기가 쥐어지기 시작했다.
검, 칼, 도를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창과 도끼 심지어 철퇴와 활까지 나타났다.
이건 뭐, 완전히 걸어 다니는 무기고 수준이다.
“건방지게 입을 놀린 대가로 우선 그 왼쪽 팔부터 잘라내 주마. 그 다음은 왼쪽 다리다. 그 다음은 오른쪽 팔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목을 치겠다.”
“미안하지만, 난 내 팔다리의 위치가 상당히 마음에 들어서 말이야. 그냥 원래 있던 자리에 붙어 있게 하려고.”
“베는 맛이 있을 것 같구나. 이래서 너희 인간들을 싫증 낼 수가 없어.”
천수관음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츠츠츠……!
유형화된 살기가 마력과 뒤섞였다.
녀석을 일반적인 석상들과 같은 선상에서 생각하면 안 된다.
진혁이 방패로 몸을 가린 채 최대한 자세를 낮췄다.
언제 어떤 공격이 오더라도 대비할 수 있도록.
“후우우.”
진혁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전신의 감각을 모조리 깨웠다.
한 자루의 칼처럼 예리해진 신경들.
지금부터는 눈 하나 깜빡해선 안 된다.
그때.
파앙!
공기가 찢어졌다.
추진체도 없이, 한 순간에 음속을 돌파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왼쪽 어깨.’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진혁은 방패를 이용해 검격을 빗겨냈다.
카카카칵!
철과 철이 부딪치자 눈부신 불꽃이 튀어 올랐다.
“호오.”
천수관음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이번엔 정말로 놀랐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왜 놀라? 공격 막는 거 처음 봐?”
“음속의 영역에 반응하다니…….”
보고 반응하는 게 아니다.
이미 수없이 상대해 봤기에 공격이 오는 궤도와 타이밍을 암기하고 있는 것뿐이지.
물론,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하하. 이거 점점 더 흥미가 돋는구나.”
천수관음이 재차 공격을 시도했다.
이번엔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를 동시에 노리는 공격이다.
‘방패로 둘 다 방어할 순 없다.’
그렇다면…….
[Lv2 ‘얼음 조형’이 발동됩니다!]
눈꽃 문양의 얼음 방패들이 새롭게 나타났다.
콰득!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정도로는 천수관음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
하지만, 공격의 궤도를 살짝 비트는 것쯤은…….
가능하다.
가능하고말고.
진혁이 완전히 만개한 눈꽃 사이로 몸을 감췄다.
물론, 그걸 두고 보고 있을 천수관음이 아니었다.
“어딜!”
곧바로 9개의 창이 투척됐다.
콰콰콰쾅!
모조리 박살나는 얼음 방패들.
그러나 정작 그중에 진혁에게 적중한 창은 단 하나도 없었다.
“……분명, 맞췄거늘?”
정확히 노렸고.
정확히 맞췄다.
그런데 어째서?
“이건, 시각을 왜곡시켜 주는 효과도 있거든.”
겹겹이 펼쳐진 얼음들이 빛을 반사하면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었다.
어느새 천수관음의 아래로 파고든 진혁이 창을 좁게 잡았다.
사거리를 줄인 대신 속도를 살릴 수 있는 간격.
그리고 창날에 발현시킨 ‘혈마기(血魔氣)’로부터 검붉은 마력을 꿈틀거렸다.
“크윽!”
천수관음이 재빨리 몸을 돌렸다.
어떻게든 방어하기 위해 천 개의 팔을 움직였다.
허나 너무 늦었다.
퍼퍽!
이미 진혁의 손을 떠난 창이 천수관음의 팔 속으로 파고들었으니까.
“크아아악!”
천수관음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각.
통증.
그 생소하고도 날카로운 경험은 천수관음의 이성을 날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인간을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팔을 따라 퍼져 가는 검붉은 마기를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독…… 같은 건가.”
“비슷해.”
혈마기는 검의 무덤보다 파괴력이 훨씬 떨어진다.
대신, 한 번 상처를 입히면 지속적인 피해를 줄 수 있었다.
뿌드득!
천수관음이 가차 없이 창이 꽂혀 있는 팔을 뽑아 버렸다.
이야.
“그래도 살고는 싶나 보네.”
적어도 몇 분은 고민할 거라 생각했는데.
스스로 팔을 뽑아 버릴 정도면, 삶에 대한 애착이 보통이 아니다.
“기고만장하지 마라. 노릴 거면 머리를 노렸어야지. 고작 팔 하나 가져간 걸로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
그거야…….
“머리를 노렸다고 해도 널 죽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
이곳에 존재하는 네임드급 몬스터를 죽이려면, 일반적인 무기로는 안 된다.
그래서 일부러 팔을 노렸다.
정확히는 수많은 무기 중에 ‘보옥’을 들고 있는 팔을 노렸지.
진혁이 잘린 팔에서 푸른색 보석을 빼냈다.
그리고 아공간 인벤토리에서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보관해 뒀던 아이템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