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천수천안관음(千手千眼觀音) (3)
시야가 빠르게 바뀌었다.
달리는 속도를 높일수록, 투척되는 창들을 쳐낼수록, 조금씩 호흡이 가빠졌다.
그래도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건 이전에 복사해 둔 ‘얕은 호흡’ 덕분일 것이다.
장기전을 대비해 뒀던 게 여기서 빛을 발했다.
바로 그때.
“……!”
진혁이 단검을 크게 휘둘렀다.
콰앙!
정면에서 날아온 창을 또 다시 쳐냈다. 창이 허공에서 빙그르르 회전했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쐐애애액!
이어서 날아온 창들이 하늘을 빼곡히 덮었다. 하나같이 필살을 자랑하는 만다라를 덧씌운 채.
마치, 먹구름을 품은 폭풍이 몰려오는 것처럼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
하하, 이건 뭐…….
‘지루할 틈을 안 주는구나.’
절망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진혁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얼핏 보면 불규칙해 보이는 광역기(廣域技).
하지만, 저 공격들엔 하나의 규칙이 있다.
대상의 급소를 노려야만 하는 규칙이.
찰나의 순간, 진혁은 날아오는 창들의 궤도를 파악했다.
겁먹을 필요는 없다.
이미 수도 없이 해 봤던 일이었으니까.
‘그때의 리듬을 기억하고.’
진혁이 전신에 힘을 뺐다.
가볍게,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그때의 경험을 되살려.’
화르륵!
단검에 실린 검은 기운이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창들이 머리카락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모조리 쳐낸다.’
바로 그때.
카카카캉!
눈부신 불꽃이 일어났다.
쇠와 쇠가 마찰하는 굉음이 연신 고막을 두드렸다.
카카카카카카칵!
진혁이 제자리에 선 채 미친 듯이 단검을 그었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아래로 그리고 다시 위로.
콰앙!
콰아앙!
이미 어디로 공격해 올지 암기라도 해 뒀다는 듯 진혁은 단 하나의 창도 놓치지 않았다.
보면서도 믿기 힘든 신들린 곡예다.
천수관음의 고함이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빌어먹을…… 이건 어떠냐!”
창 하나가 진혁의 몸통이 아닌, 바로 앞에 있는 지면을 노렸다.
울퉁불퉁한 바닥을 이용해, 변칙적인 루트를 개척하는 기술.
도탄(挑彈)이다.
빗발치는 창들 사이에 슬며시 섞여든 터라, 인지하는 게 쉽지 않았다. 반응하는 건 더더욱 어려웠고.
하지만 그것조차도 예상했다는 것처럼.
콰악!
진혁은 바닥에 튕겨 날아온 창대를 맨손으로 붙잡았다.
“이, 이것도 막았다고?”
천수관음이 말을 더듬었다.
회심의 일격이 막혔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게다가, 어느새 수많은 무기가 들려 있던 손은 대부분 텅 비어 버린 상태였다.
“이제, 보여 줄 건 다 보여 준 것 같은데, 더 참신하고 재밌는 게 없으면 슬슬 끝낼게.”
진혁이 앞으로 걸었다.
경쾌하면서도 가벼운 발걸음이다.
[And one thought crystalizes like an icy blast.]
그리고 때마침, 방송 시스템에선 노래의 종막 부분이 흘러나왔다.
이제 이 싸움의 결판을 지을 시간이라고 말하듯이.
그 태연한 말투가 신경을 거스른 걸까?
천수관음의 속에서부터 분노에 쌓인 음성이 터져 나왔다.
“싸움이 언제 끝날지 정할 수 있는 건……. 오직 이 몸뿐이다!”
[천수관음이 ‘만극창(卍䪂槍)’을 꺼냅니다!]
“죽어라!”
천수관음이 만다라를 극한까지 발현시킨 황금빛 창을 뻗었다.
육중해 보이는 것과 달리, 창은 탄환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콰앙!
창이 진혁의 몸을 꿰뚫었다.
아니, 꿰뚫었다고 생각했다.
“시…… 신기루?”
비릿한 미소를 머금던 천수관음의 얼굴이 이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얼음의 난반사로 인한 착시 효과. 거기에 코앞에서 방심을 유도했기에, 완벽하게 속을 수밖에 없었다.
위험하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천수관음의 턱밑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나도 좀 때려 보자.”
계속해서 방어만 하느라고 지쳤다.
짜증나고 답답한 건 말할 필요도 없었고.
그러니.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번만 제대로 맞아 봐라.
진혁이 작게 변한 멀린의 지팡이를 하늘로 던졌다.
동시에 단검을 바닥에 꽂았다.
[빙하조형(氷河造形) ‘하늘의 검’이 발동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얼음 줄기와.
[빙하조형(氷河造形) ‘땅의 검’이 발동합니다!]
땅에서 솟구치는 얼음 줄기가 하나로 맞닿았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엄청난 냉기로 인해 눈앞이 자욱해질 정도의 수증기가 뿜어졌다.
“크아아악!”
그 안에 갇혀 버린 천수관음이 몸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아무리 네임드급 몬스터라도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냉기가 전신을 옭아맸다.
“끄으으. 이걸로…… 날 가뒀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
이건 그냥 시간 끌기용이다.
아직 해야 할 게 한 가지 남아 있거든.
파츠츠츠.
진혁이 천수관음의 앞에 얼음으로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여기는 굵고 길쭉하게.
여기는 완만하고 매끄럽게 깎아야겠군.
조금씩 얼음의 모양이 갖춰졌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을까?
[얼음 조형이 완성되었습니다.]
눈보라가 걷히자, 마침내 완성품의 모습이 드러났다.
‘훌륭해.’
진혁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얼음으로 만든, 거대한 가운데 손가락이 우뚝 솟아 있었다.
크고 아름답다. 거기에 늠름하기까지 하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조형물이다. 아. 물론, 상대를 조롱하기에 완벽한 조형물이지.
“이, 이…… 이 이 망할 인간이! 무간지옥에 가둔 뒤 억겁의 세월 동안 고통 받게 하겠다. 수천 번, 수만 번 벌레로 환생하게 만들어 주겠단 말이다! 우아아악!”
천수관음이 얼음 속에서 몸을 마구 흔들었다.
열이 받아 미칠 지경인데, 갇혀 있으니 더욱 견디기 힘들겠지.
이 정도면 충분할 거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고유 능력 ‘만다라(S)’를 복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만다라(曼茶羅)]
입수 난이도: S
내용: 불법(佛法)을 습득한 플레이어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고유 능력으로 검강이나 신성력과 마찬가지로 무기에 특별한 힘을 덧씌울 수 있습니다. 또한 심법 수련을 통해 상대의 공격이 오는 방향을 예측하게 해 주는 효과 또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복사된 스킬은 ‘세계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온갖 괴랄한 조건들을 달성하고 드디어 손에 넣었다.
새로운 고유 능력, 만다라를!
‘그럼 어디……. 간만에 한번 사용해 볼까.’
진혁이 조심스럽게 마력을 운용했다.
우우우우웅!
따스하면서 포근한 기운.
살아 숨 쉬는 생명의 기운이 모두 한 손 안에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끄으으…… 이까짓, 이까짓 얼음쯤은……!”
그 와중에도 천수관음은 온몸을 마구 뒤틀며 얼음 속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만다라로 인해 황금색 스파크가 튀었지만, 얼음을 박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쯧쯧.
보기 안쓰럽네.
보검을 두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멍청이들을 보면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
“쓸데없이 힘 빼지 마. 그래 봤자 빠져나갈 수 없으니까.”
“헛소리! 내 능력으로 빠져나가지 못할 곳은 없다.”
“아니, 무리다. 만다라가 좋은 고유 능력인 건 맞지만, 넌 그 능력을 완전히 잘못 사용하고 있거든.”
“뭣이?”
“참선을 통해 ‘문’을 열었으면, 그 평정심을 유지할 줄 알아야지. 아직까지 분노에 휩싸여서 마력의 흐름을 제대로 제어하지도 못하고 있잖아?”
그러니 전력의 반의반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거다.
“어디서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이냐? 네놈이 이 능력에 대해서 뭘 안다고!”
뭘 알고 있냐고?
적어도 몇 만 년이란 시간 동안 허송세월한 너보다는 많을 걸 알고 있다.
이 능력이 갖고 있는 본질도.
그리고 그 능력이 갖고 있는 가치까지도, 모두.
그러니 보여 주마.
만다라라는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건지.
[고유 능력 ‘만다라(曼茶羅)’가 발동됩니다!]
파츠츠츠!
형언하기 힘든 운무가 만들어졌다.
어느새 진혁의 오른손에 금빛으로 물든 번개가 발현되어 있었다.
“그, 그럴 수가. 어떻게 네놈이 그 능력을!?”
천수관음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모를 수가 없는 능력.
바로 자신이 사용했던 능력이 재현되고 있다.
그것도 훨씬 완성도 높고 완벽하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인간 따위가, 대체 무슨 수로 만다라를 배운단 말인가?
수십 년의 수행을 한 고승들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현실을 부정해도 눈부시게 타오르는 만다라의 기운까지 부정할 순 없었다.
저건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이제 그만 꺼져라.”
진혁이 번개를 쥐고 있는 손을 크게 뒤로 젖혔다.
전완근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기, 기다려라! 잠깐, 잠까아아안!”
천수관음이 황급히 외쳤다.
그리고 그 순간.
쐐애애액!
진혁의 손을 떠난 번개가 천수관음의 몸을 꿰뚫었다.
***
치이이익!
녹아내린 얼음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당연히 그 안에 있던 천수관음 역시 새카맣게 타버린 채 숨이 끊긴 상태였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석상의 열쇠’를 획득하셨습니다.]
연이어 나타나는 상태창.
네임드 몬스터를 잡은 덕분에 무려 2개의 레벨이 올랐다.
“대충 끝난 건가.”
거친 호흡을 몰아쉬던 진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격통을 견디기 어려웠던 탓이다.
‘너무 무리하긴 했어.’
캐드릭과 언데드를 사냥하고 곧바로 천수관음까지 상대하느라 남아 있는 마력이 간당간당했다.
휴식이 필요하다.
물론, 그전에 해야 할 건 처리해 둬야겠지.
진혁이 개인 상태창을 활성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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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강진혁
성별: 남
나이: 27세
레벨: 21
힘 16 민첩 16 체력 16 마력 41 간극 100 행운 10 적응형 10
보유한 스탯 포인트: 6
보유한 코인: 추가 정산 중입니다.
직업: 없음
고유 능력: 융합(融合), 검의 무덤, 별의 가호, 아누비스의 심판, 혈마기(血魔氣), 만다라(曼茶羅)
스킬: Lv5 ‘불의 원소’, Lv4 ‘탐식의 눈’, Lv3 ‘교감’, Lv3 ‘염혼의 낙인’, Lv3 ‘독식’, Lv3 ‘얕은 호흡’, Lv1 ‘얼음 조형’, Lv2 ‘데이라이트’, Lv1 ‘거인의 손아귀’, Lv1 ‘추혼검(追魂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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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얻은 능력들과 스탯 포인트가 눈에 띄었다.
‘스탯은 마력에 투자해야겠어.’
지금처럼 전투가 장기화 될 경우를 생각하면, 다시 한 번 마력에 집중 투자할 필요가 있었다.
[마력이 41 → 47로 상승합니다]
마력을 올리자 부풀어 올랐던 혈관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마지막에 만다라를 최대치로 끌어올려 번개를 던진 게 진짜 크긴 컸구나.
하지만, 고생한 것 이상으로 성과는 충분히 얻었다.
멀린의 지팡이를 완성한 덕분에 얼음 조형의 상위 버전인 빙하조형을 익혔고.
천수관음으로부터 만다라까지 복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레벨업까지 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레이드 아닌가?
그야말로 이상적인 마무리.
이제 적당한 잠자리를 찾아 쌓여 있는 피로만 해소하면 되리라.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정상일 것이다.
낮이 지나가고 밤이 오면 휴식을 취할 거라고.
‘그러니 놈들이 오는 것도 밤이 깊어지기 전이겠지.’
진혁의 시선이 숲으로 향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지켜보고 마인 협회의 암살자들을 향해서.
완벽한 기습을 가할 기회라고 생각할 테지만 글쎄…….
놈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