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산제물의 의식 (3)
전신을 따라 퍼지는 마력.
기분 좋은 고양감에 심장이 빠르게 고동쳤다.
‘그래, 이 맛이지.’
당장이라도 날뛰고 싶은 기분이랄까?
이토록 좋은 걸 지난 몇 시간 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다.
진혁이 만족스럽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좋아.’
완벽하다.
능력이 모두 부활한 이상, 이제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
바로 그때.
“이제 너희 차례다. 부디, 화려하게 죽길 바라지.”
간수장이 플레이어들을 향해 킬킬댔다.
동시에.
쿠쿠쿠쿵!
생과 사를 나누던 문이 개방되었다.
***
후욱하고.
모래에 섞인 피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도합 일곱의 브레이커들이 새로운 제물들을 바라봤다.
“크오오오!”
“오오오!”
거대한 흉기를 든 채 흥분하는 모습.
붉게 덧칠해진 몸에선 아직까지 열기가 피어올랐다.
“크르르…….”
그리고 그 한가운데는 등에 검은색 가시가 잔뜩 달린 대형 마수도 있었다.
브레어커와는 차원이 다른, 규격 외의 크기를 자랑하는 괴물이다.
‘포식자로군.’
엄청난 양의 먹이를 먹어치우는 탑의 청소부.
침이 뚝뚝 떨어지는 놈의 아가리엔 아직까지 먹다 남은 인간의 찌꺼기가 있었다.
“다, 당장 도망쳐야 돼.”
“빌어먹을. 어디로 도망치란 거야? 우린 완전히 독 안에 든 쥐라고!”
“흐윽. 어, 엄마…….”
도망칠 곳 따위는 없다.
아무리 달려 봤자 사방이 10m가 넘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니까.
모두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서 뒷걸음질 쳤다.
절망만이 감도는 바로 그 순간.
저벅.
사람들 앞으로 누군가 나섰다.
진혁이었다.
“뭐야? 저 멍청한 놈은?”
“푸하하! 먼저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군.”
“깔깔깔! 하긴, 뒤에서 공포에 떠느니 먼저 신께 가는 게 나을 수도 있겠죠.”
관중석에 있던 광신도들이 조소 어린 말들을 쏟아냈다.
어이가 없는 거겠지.
무기도 없는 맨몸으로, 그것도 너무나 무방비하게 거리를 좁혔으니까.
그런데.
“헉!?”
“어떻게……?”
진혁이 브레이커의 코앞까지 다가갔음에도, 브레이커는 진혁을 공격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존재 자체를 눈치 채지 못하기라도 한 것처럼 눈길조차 주질 않았다.
‘역시, 쓸 만한 스킬이라니까.’
진혁이 느긋하게 마수들의 한복판으로 이동했다.
하루에 세 번 사용할 수 있는 ‘흐릿한 체취’.
한 번 사용할 경우 상대의 기감을 흐트러뜨릴 수 있었지만.
세 번을 동시에 사용할 경우엔 아예 존재감을 무(無)로 만들 수 있었다.
‘보통은 한 번씩, 세 번의 목숨을 얻는 데 만족하겠지.’
그러나 고인물의 경우엔 다르다.
단 한 번의 기회를 살려…… 승부 그 자체를 뒤엎는 방법을 모색할 테니까.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어느새 중앙에 도착한 진혁이 발로 땅을 두드렸다.
쿵! 쿵!
두 번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붉은 단약 ‘염(炎)’이 발동됩니다!]
콰콰콰콰콰콰콰!
지면에서 거대한 불줄기가 치솟았다.
‘불꽃놀이는 화려한 게 제 맛이라니까.’
정확하게 하수도의 위치와 물이 흐르는 속도를 계산해 발동시킨 단약이다.
실수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이미 수십 번도 더 해 봤던 거였으니.
“크아아아!”
“케에엑!”
불꽃에 휩싸인 브레이커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죽지 않는다곤 하나, 산 채로 타들어 가는데 당연히 고통스러울 수밖에.
“왜 그리 엄살을 피우고 그러냐?”
너희들, 불태우는 거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지, 진정하십시오! 신의 대리자들이시여.”
간수장이 어떻게든 브레이커들의 몸에 붙은 불씨를 끄려고 했다.
하지만, 물동이를 들고 가까이 다가간 게 실수였다.
잔뜩 날카로워진 브레이커의 눈엔 지금 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망치를 횡으로 가로질렀다.
콰아앙!
“쿠워억!”
일격에 머리통이 수박처럼 박살났다.
멍청한 짓을 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악인의 죽음에 관여했습니다.]
[적응형 스탯 0.1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현재 보유중인 적응형 스탯: 10.1]
뜻밖의 상태창이 나타났다.
호오?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가 직접 죽이지 않아도 스탯을 얻는다는 건가?’
붉은 단약을 발동해 간접적으로 죽음에 관여하는 것만으로도 조건이 충족될 줄이야.
이건 꽤나 흥미롭다.
진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본 광신도들은 크게 기함했다.
“뭐, 뭐야? 저 불줄기는!”
“설……마. 스킬을 쓴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곳에선 신께서 모든 것을 관장하신다. 신의 법칙과 신의 율법만이 이 층을 지탱하는 유일한 규칙이란 말이다!”
고유 능력과 스킬이 봉인된 이상, 그 누구도 사악한 능력을 사용할 순 없다.
분명, 무언가 속임수를 쓴 것이리라.
그러나, 이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말로 놀랄 만한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었으니까.
“미안하지만, 10분밖에 없으니 빨리 끝낼게.”
정확히 말하면, 이제 8분쯤 남았다.
진혁이 쌍룡검을 꺼냈다.
‘검의 무덤’이 발동되자 검신을 타고 검은 기운이 일렁였다.
검은 초승달이 드리웠다.
“크르르?”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는지 포식자가 가시를 잔뜩 세웠다.
바로 그 순간.
서걱!
어떠한 미사여구도 필요 없는, 오직 적을 죽이기 위한 검격이 공간을 가로질렀다.
일검(一劍).
단 한 번의 칼놀림에 태산 같던 포식자의 몸이 무너졌다.
그 흔한 비명 소리조차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엔 분수처럼 솟구치는 피가 있을 뿐이었다.
“도망쳐주는 건 이제 끝이야.”
아무리 이곳에서 강력하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그건, 능력이 봉인되어 있을 때 이야기고.
본래 실력은 1층의 네임드 수준에 불과한 놈들이다.
제대로 싸운다면 상대가 되질 않는다는 뜻이다.
믿었던 마수들이 모조리 전투 불능이 되자 공기가 급변했다.
“히이익!”
“괴, 괴물이다!”
“무슨 저런 인간이……!”
여유와 광기는 공포로 변했고.
저 위에서 죽음을 구경하던 이들은 이제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도망쳐야만 했다.
물론,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진혁이 아니었다.
“어이가 없네. 자기 목숨은 그렇게 아까웠던 거냐?”
차게 웃은 진혁이 마지막 단약을 꺼냈다.
[흑색 단약 ‘암(黯)’을 사용했습니다.]
[시전자의 주위 200m에 ‘검은 장벽’이 펼쳐집니다!]
경기장 전체를 완전히 감싼 검은색 막.
신을 칭송하기 위한 장소는.
어느새 자신들의 무덤이 될지도 모르는 사지로 변했다.
***
‘흠…….’
진혁이 제자리에 선 채 미간을 구겼다.
이제 남은 건 히든 퀘스트를 달성하는 것뿐. 하지만 딱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단순히 살인에 대해서 거부감이 든다는 이유가 아니다.
선량한 사람이면 몰라도.
타인의 죽음을 보며 킬킬대던 놈들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단지.
이 많은 인원이 뿔뿔이 흩어져 숨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찾아내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을 써야겠군.’
직접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건 이미 간수장을 통해 확인했다.
관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터.
그렇다면…….
“이봐요.”
진혁이 경기장 외벽에 웅크리고 있는 플레이어들을 불렀다.
“……예. 예?”
“저, 저희 말씀이십니까?”
“다들 왜 그러고 있어요? 집에 안 갈 거예요?”
이미 마수는 죽거나 전투불능이 되었다.
더 이상 잡아먹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지, 집에 가도 돼요?”
“정말로요?”
“물론이죠. 다들 어서 일어나세요.”
진혁이 생긋 웃었다.
그러자.
“와아아아!”
“살, 살았다! 살았다고!”
거대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그동안 쌓여 있던 온갖 감정이 일순간에 폭발한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긴 살짝 이르지.
마음 놓기엔 너무 큰 산이 남아 있거든.
“그런데 이대로 나가도 될까요? 5층에 광신도들이 남아 있는 한, 언제 어디선가 또 마주칠지도 모르는데?”
진혁의 말에 달아올랐던 공기가 급속도로 식었다.
“아!”
“그, 그건…….”
잊고 싶었던 현실이 다가왔다.
만약, 다시 이 끔찍한 놈들과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쩌긴.
“후환을 없애야죠.”
진혁이 마수의 사체에서 무언가를 뜯어냈다.
우드득……!
등 뒤에 돋아난 돌기 중 하나였다.
예리하게 빛나는 칼날.
이거라면 충분히 무기로서 활용이 가능할 것이다.
“저 위에, 당신들을 이곳에 가둔 놈들이 있어요.”
진혁이 손가락으로 관중석을 가리켰다.
마수들만 믿고 기고만장해 하던 광신도들이 보였다.
“또다시 이런 곳에 잡혀오기 전에, 여러분이 당했던 것을 그대로 돌려주세요.”
죽이든가.
죽든가.
선택지가 둘 중에 하나뿐이라면…….
선택해야 하는 건 당연히 하나다.
“으아아아!”
“저…… 저 개새끼들 다 죽여!”
“또다시 이 빌어먹을 곳에 갇힐 순 없어!”
“아주 벌집을 만들어주지!”
겁에 질린 산제물들이 맹수로 변한 건 바로 그때였다.
너도나도 손에 흉기를 들고 관중석으로 뛰쳐나갔다.
“자, 잠깐만!”
“멈춰!”
몇몇 간수들이 막아 보려 했지만, 수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무시한 채 관중석으로 오르는 플레이어들.
게다가 무기까지 있으니 머지않아 상황은 정리될 것이다.
모두 쓸어 버려라.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
“우어억!”
“꺄아아아악!”
지하는 곧, 처절한 절규로 가득 찼다.
파리 목숨처럼 살아온 시간에 대한 보상을 원하듯.
복수는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왜일까?
피로 얼룩진 현장 속에 있으면서도…….
일말의 동정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통쾌했다.
자기들이 뿌린 걸 그대로 거둔 셈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심장을 짜릿하게 만드는 건.
[악인의 죽음에 관여했습니다.]
[적응형 스탯 0.1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포인트: 32.9]
[악인의 죽음에…….]
바로 가만히 있어도 포인트가 쌓인다는 점이다.
벌써 33포인트나 모았다.
충실한 일꾼들이 있는 게 이렇게 좋은 거였구나.
만족스럽게 웃던 진혁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사람들이 교주한테 가기 전에 슬슬 움직여야겠어.’
교주가 있는 다른 곳에 비해 깊숙한 곳에 있었지만, 그것도 시간문제다.
너무 늦기 전에 가장 중요한 목표를 처리해야겠지.
진혁이 한쪽에 있는 광신도들을 바라봤다.
이들은 애초에 교주를 따르는 광신도들이 아니다.
탑을 정복하기 위해 도전했지만, 오히려 포로로 잡혔고.
결국, 자신들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함께했던 동료를 죽인 플레이어들었다.
그중에선 진혁과 같은 방에 있던 이들도 섞여 있었다.
환풍구로 열심히 도망치나 싶더니 그다지 멀리 도망가진 못했던 모양이다.
‘흑인 여성과 동양인 여성이 보이질 않는군.’
남은 건 백인 남성과 여성뿐.
나머지 두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는 뻔했다.
“역겹네.”
진혁이 짧게 내뱉었다.
그러자 흠칫하고.
눈을 마주친 놈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린…… 우린 저놈들이 시키는 대로 한 죄밖에 없습니다!”
“그, 그래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몇몇은 발악을 했다.
“제기랄! 우리라고 뭐 좋아서 한 줄 알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었어! 극단적인 상황이었다고!”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란 말이야!”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
자신들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거칠게 부르짖었다.
물론, 스스로가 원해서 살인을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타의에 의해 억지로 살인을 했을 수도 있겠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이해는 해.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것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을 테고.”
긴급한 상황에서 자신이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 용서받을 수 있을까?
글쎄.
도덕적으론 모르겠지만, 법적으론 정상이 참작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여기서는 그런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 따윈 무의미하다.
개인마다 기준이 모두 다를 테니까.
무엇보다 지금은 도덕 시간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너희를 살려 줄지 말지 결정하는 건 내가 아니야.”
고저 없는 목소리과 함께.
푸욱!
가장 앞에 있던 플레이어의 심장에 바람구멍이 났다.
“커……억?”
[악인을 처치했습니다.]
[적응형 스탯 0.1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현재 보유 중인 적응형 스탯: 33]
시스템이 정의했다.
이놈들도 악인이라고.
그걸로 충분하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이건 진심이다.
파츠츠츠!
쌍룡검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