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고인물이 빌드업을 하는 방법 (2)
김기태가 미궁에 갈 플레이어들을 섭외하기 전까지 5일이란 시간이 주어졌다.
그 기간 동안, 진혁은 김희웅이 준비한 각종 음악회와 미슐랭을 닥치는 대로 찾아 다녔다.
그리고 현재 있는 곳은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5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피아노 콩쿠르로 쇼팽의 곡으로만 실력을 겨루는 세계 3대 음악 콩쿠르 중 하나다.
S급이란 위치를 이용해 어렵지 않게 자리 하나를 잡은 진혁은, 20대 초반의 남자 피아니스트의 연주에 푹 빠져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절정으로 치닫던 반주가 잦아들고 마침내 피아니스트의 손이 피아노에서 떨어졌다.
연주가 끝난 것이다.
‘음악은 잘 모르지만……. 이건 진짜 소름이네.’
전투와는 전혀 다른 영역.
아름답고 화려한 선율은 감히, 예술로 승화된 또 하나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전율하던 진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우…….”
굉장했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 기분이랄까?
아직까지 전신이 여운에 잠겨 있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제법 많이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목적은 전부 달성했어.’
이걸로 가능한 콩쿠르나 연주회는 모두 가 봤다.
동시에.
[한 시대를 풍미하는 명곡을 감상하셨습니다.]
[‘음악회 7번 가기’를 완료하셨습니다.]
[‘베토벤 박물관’ 견학하기를 완료했습니다.]
눈앞에 여러 개의 상태창이 나타났다.
‘좋아.’
진혁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스킬 ‘절대 음감(F)’을 복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스킬 ‘악기의 이해(F)’를 복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얻은 스킬들은 모두 F등급이다.
하지만, 고작 이런 걸로 만족할 진혁이 아니었다.
낮은 등급의 스킬들을 합쳐,
한 차원 더 높은 스킬을 만들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융합’이란 고유 능력을 선택한 이유였으니까.
“별의 가호와 악기의 이해를 융합할게.”
진혁이 곧바로 ‘융합’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 ‘별의 가호’와 ‘악기의 이해’가 융합합니다.]
[융합에 성공하였습니다.]
[스킬 ‘천상의 선율’을 획득하셨습니다.]
[천상의 선율]
입수 난이도: B
내용: 음악의 여신 ‘베스티아’는 종족을 초월하여 모두의 화합과 평화를 중시하였습니다. 또한 아무리 험악한 세상일지라도 음악만큼은 벽을 허물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능력엔 그 여신의 바람이 깃들어 있습니다.
[복사된 스킬은 ‘세계의 기억’에 저장됩니다.]
시간이 남아돌아서 이곳에 온 게 아니다.
비전투 계열의 능력들을 모으기 위해서.
앞으로 탑을 오르는 데 필요한 부가적인 힘을 얻기 위해서.
금쪽같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요리 차례군.’
엘프의 숲에 가기 전 해야 할 두 가지 과제.
이제 남은 건 요리를 배우는 것뿐이다.
진혁은 차례대로 예약이 된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의 목록을 훑었다.
[스킬 ‘황실의 숙수(熟手)’를 복사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달성해야 합니다.]
[1. 미슐랭 3스타 이상급 레스토랑에서 코스 요리 먹기(7/10회)]
[2. 요리사가 요리를 만드는 과정 참관하기(3/5회)]
[3. 서로 다른 종류의 요리 만들어 보기(25/30회)]
콩쿠르를 보면서 틈틈이 먹었으니 이것도 조건을 달성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 안에 전부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겠어.’
다시 말해.
6층으로 갈 시간이 다가왔다는 뜻이다.
***
중국 베이징에 위치한 시틱 타워.
마천루(摩天樓)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높게 솟은 빌딩 최상층 펜트하우스엔 여러 명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바로, 중국 최대 길드인 중화 길드에 소속된 랭커들이었다.
“빌어먹을! 이번에도 최초 공략을 빼앗기다니. 이게 무슨 개쪽이야! 분명, 5층은 우리가 가장 먼저 클리어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 않았나!”
푸짐한 살집에,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남자가 고함을 질렀다.
그렇다.
준비는 완벽했다.
5층을 클리어해 본 적 있는. 아니, 5층을 타임 어택으로 주파해 본 적 있는 고인물들과 랭커들을 대거 준비해 뒀으니까.
거기에 길드 자체 내에서 ‘주황색’ 판정을 받은 성유물까지 준비해 뒀으니 최초 공략을 장담한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중화 길드는 5층을 최초로 공략하는 데 실패했다.
그토록 많은 자원과 노력을 투자했음에도 말이다.
심지어 그들 중 절반 이상은 아직도 광산이나 검투장에서 탈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 준비가 부족했던 건 아니야. 단지, 강진혁이란 놈이 비정상적인 속도로 보스를 잡았을 뿐이지.”
강진혁.
그 이름에 모두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밑에 놈들도 온통 그 녀석 이야기야. 우연히 들으니 인류의 희망은 오직 그 녀석뿐이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놈도 있더군. 물론, 바로 목을 쳐 버렸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탈자가 나오는 것도 생각해 둬야 할 시점인 것 같군.”
“그 녀석은 대체 얼마나 시련의 탑에서 썩었길래 그토록 빨리 탑을 오르는 걸까요? 외부의 지원도 없이 혼자서만 한 거라던데…….”
“꽤 오랫동안 해 온 놈이 틀림없겠지. 어쩌면 탑을 20층 이상 올라가 봤을지도 몰라.”
20층.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가 본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이 튀어나왔다.
“설마…….”
“그 미친 게임을 20층을 넘게 하는 정신 나간 놈이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릴! 유저가 5억이 넘었던 중국조차 전부 접었는데, 인구를 싸그리 긁어모아 봐야 5천만인 나라에서 그런 놈이 나올 리가 있나!”
모두가 목소리를 높여 부정했다.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었고. 탑의 정상을 볼 수 있는 것도 오직 중국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중화’라고 칭하며, 자부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아무리 애써 감추려고 해도.
말을 하는 스스로가 깨닫기 시작했다.
이 탑에는 그들이 제대로 알지 못 하는 고인물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고인물은 혼자서도 길드 전체가 움직이는 것보다 더 위협적이라는 것 또한.
그런데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는 바로 그때였다.
덜컹!
문이 양쪽으로 열리며 한 남성이 나타났다.
수려한 인상에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만든 옷이 인상적인 남자였다.
모두의 시선이 남자에게 향했다.
“나, 남궁천 님!”
“무림 쪽과는 벌써 이야기가 끝난 것입니까?”
중화 길드의 마스터이자. 중국 최강의 플레이어.
남궁천.
그것이 이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래…… 일단은 마무리 지었지.”
남궁천이 뭔가 불만인 듯한 표정을 지은 채 방 안을 가로질렀다.
한 걸음. 한 걸음.
단지 걷고 있을 뿐인데도, 내부는 냉동고에 들어 있는 것처럼 짙은 한기로 가득 찼다.
꿀꺽.
여기저기서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감히 남궁천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를 물어볼 정도로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사람은 없었다.
당연한 듯 비워져 있는 상석에 앉은 남궁천이 재차 입을 열었다.
“5층에 관해선 보고받았다. 책임자가 누구지?”
“저……입니다. 하지만, 남궁천 님! 이번일은 반드시…….”
수염이 덥수룩했던 남자가 다급히 변명했다.
물론, 구차한 변명은 채 끝을 맺지 못했다.
“……커억?”
서걱!
깔끔하게 양분된 상반신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그깟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놈은 나와 함께 위로 갈 자격이 없다.”
어느새 뽑았는지 남궁천의 검이 횡으로 가로질러 있었다.
눈으로 식별하기는커녕 인지하기조차 힘든 속도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남궁천의 시선이 랭커들에게 향했다.
“나는 무림에서 시킨 일을 하러 탑의 5층으로 가야 한다. 메인 공격대 역시 나와 함께 해야 할 일이 있다.”
남궁천이 메인 공격대를 호명했다.
시선이 마주친 공대장들은 고개를 숙였다.
“6층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엘프쪽은 S급 세 명과 공격대 하나를 허가하겠다. 선별된 자들은 6층으로 가 엘프들은 포로로 삼고 숲은 모조리 태워 버려라. 기한은 열흘이다.”
떨어진 명령은 한 층의 소거(消去).
반론은 없다.
질문 또한 없다.
오직 명령을 이행하는 것만이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이번엔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
유럽에서의 볼일을 모두 끝낸 진혁은 곧바로 시련의 탑으로 향했다.
아직 김기태와의 약속까진 하루가 남아 있었기에, 그동안 엘프들과 안면이나 터 두자는 생각에서였다.
‘워낙 숲속 깊숙이 숨어 있어서 만나기도 쉽지 않지.’
엘프란 종족이 원래 그렇다.
아름다운 외모에 그 누구보다 자연을 사랑하는 종족이지만, 이상하게도 다른 종족에 대해선 베타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할까?
한 마디로. 만나기도 어려울 뿐더러 대화를 하는 건 더더욱 어렵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의 경우이고.
‘나는 다르지.’
엘프들이 사는 곳이 어딘지.
좋아하는 과일나무들이 주로 어디에 서식하는지.
심지어 그들의 호감을 얻으려면 무얼 해야 하는지조차도 모조리 꿰고 있었으니까.
묘한 미소를 짓던 진혁이 갑자기 흠칫 몸을 떨었다.
문득 옛날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 녀석들이랑 친해지려다가 별의별 일이 다 있었는데…….’
채식만 하는 엘프들에게 귀한 거라면서 치킨을 건넸다가 부족 전체에게 쫓겼던 기억은 쉽게 잊을 수 없는 종류였다.
죽으면 48시간 동안 재접속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장작 17시간 동안 숲에서 술래잡기를 했었지.
‘하긴, 그건 내가 잘못했어.’
엘프에게 고기라니.
차라리 고소한 해바라기 씨라도 줬으면 그토록 분노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 사건은 최악이 아니었다.
가장 끔찍했던 기억은 10월 17일 오후 11시 43분 15초. 바로 그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건 죽어도 잊지 못할 거야.’
오죽하면 날짜와 시간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진혁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수차례의 시도 끝. 진혁은 가까스로 엘프들과 친해질 기회를 얻어 녀석들의 마을에 초대받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날이 일 년에 한 번 있는 엘프들의 축제였을 때였다.
아름다운 밤하늘과 반딧불로 만든 전등이 어우러진 공터.
세상에 다시없을 것만 같은 향기로운 과일들과 음료는 무릉도원 그 자체를 자아냈다.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나에게 악기를 하나 다룰 수 있냐고 묻기 전까진.’
악기라고는 초등학교 때 학교 수업 몇 번 들어본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졸기 일쑤였고.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코인 거래소’에서 유일하게 다룰 수 있는 걸 구매했다.
바로 리코더를 말이다.
진혁은 음정 박자를 모두 무시한 채 불후의 명곡인 ‘My heart will go on’을 연주했다.
혹시라도 듣지 못하는 엘프들이 있을까 봐 음성 증폭 마법까지 적용한 채 말이다.
그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끄아아아!”
“그만, 그만! 제발 그만!”
“이건 악마다! 이곳에 악마가 강림하다니!”
“숲… 숲이 분노하고 있어! 나무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정령들도 전부 떠나고 있어요.”
아직까지도 엘프들의 비명이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한 대가는 처참했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 빙의해 타이타닉의 웅장함과 절절함을 재현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영구 추방령.
죄목은 엘프들과 숲에 있는 정령들의 영혼에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주었다는 거다.
‘이번에는…… 달라.’
그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서 모든 준비를 갖춰 놨으니까.
우우우웅!
눈앞의 시야가 까맣게 물들며, 진혁이 시련의 탑 6층에 입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