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메두사 레이드 (1)
1. 함정으로 인해 공격대의 50%가 사망할 것.
2. 그 중에 한 명이 함정을 상처 없이 클리어해 ‘타들어가는 불꽃’을 손에 넣을 것.
불을 마시는 뱀은 이 두 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했을 경우에만 발동하는 함정이었다.
“흥미로운 건 이 녀석이 네임드급이라. 미궁에 있는 다른 녀석도 우리들의 존재를 눈치 챈다는 점이야.”
“그, 그게 무슨…… 설마?”
설명을 듣던 마에다가 동공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그래도 공대장이라고 눈치는 빠르다.
“맞아. 좀 있으면 이 녀석뿐 아니라 메두사까지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지.”
회색 신전은 다른 미궁들과는 다르게 보스 몬스터가 방에 있는 게 아니라 이동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뭐, 입구 근처에 있던 석상만 봐도 메두사가 자유롭게 미궁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을 거다.
물론, 아무리 가능성을 염두했다고 한들 네임드 몬스터와 보스를 동시에 상대해야 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 했겠지만.
바로 그때.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키이이이!”
10m 높이의 천장에 닿을 듯한 크기.
붉게 타오르는 뱀이 플레이어들을 보며 혀를 낼름거렸다.
하여간 양반은 못 되네.
사람들 대화하는데 그새를 못 참고 끼어드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 그렇게 발악하지 않아도 널 무시하진 않아.”
진혁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불을 마시는 뱀]
레벨: 55
내용: 메두사 키우는 애완용 뱀으로, 전신이 불꽃으로 구성되어 있어 모든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녀석은 체내에 쌓아 둔 불을 토할 수 있는데, 좁은 곳에선 드래곤의 브레스를 연상케 하는 위력을 갖고 있으니 각별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탐식의 눈’을 발동한 진혁이 대상의 세부 설명을 읽었다.
레벨은 55로 낮은 편에 속하지만, 결코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오롯이 마법 공격으로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데다 엄폐물이 없는 직선 통로에서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는 소형 브레스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아직 정비도 하지 못했는데.”
마에다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거의 궤멸하다시피 한 사무라이 길드의 상태론 도저히 저 뱀을 상대할 수 없었다.
진형을 갖추기는커녕 다들 무기나 방어구를 들어 올릴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으으으…….”
타케시 역시 공포로 인해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다.
녀석의 미래시에는 이 장면이 없었나 보다.
좋아.
이 정도면 연출적인 측면은 충분히 갖춰진 것 같고.
“이제 주제 파악들 하셨으면 슬슬 계산을 다시 한번 해 볼까?”
“뭐? 무슨 계산을 한다는 거냐?”
뭘 놀란 표정을 지어?
갑을 관계가 정해졌는데, 당연히 계약서를 새로 써야지.
“페르세우스의 방패부터 넘겨. 쓸 줄도 모르는 놈이 갖고 있는 것보단 내가 사용하는 게 낫지 않겠어?”
돼지 목에 진주는 사치다.
특히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라면 더욱더.
진혁이 살 수 있는 기회를 제안했다.
하지만, 그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마에다가 아니었다.
“개, 개소리하지 마라! 이게 어떤 건데…… 아니, 빌어먹을. 어떤 또라이가 성유물을 공짜로 넘겨!”
“그래?”
그거 안타깝게 됐네.
그래도 같은 인간이라고 마지막으로 기회를 줬는데.
스스로 걷어찬다면 하는 수 없지.
“그럼, 방패는 시체에서 회수하도록 하지 뭐.”
진혁이 싸늘하게 마지막 선을 그었다.
동시에.
쿠쿠쿠쿠쿠!
공기 중에 있던 수분이 모조리 증발하기 시작했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피부 또한 퍼석퍼석해졌다.
뻑뻑한 안구 너머로 보이는 광경.
그것은 뱀의 아가리에 맺힌 화염구였다.
[‘불을 마시는 뱀’이 Lv15 ‘열화(熱火)의 창’을 발동합니다!]
“피, 피해!”
마에다가 다급하게 외쳤다.
허나 대체 어디로 피하란 말인가?
이곳은 곧게 이어진 직선 통로인데?
“우아아악!”
“사, 살려 줘!”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다는 본능과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는 현실이 뒤섞였다.
그 순간.
콰콰콰콰콰콰콰콰!
하나의 점으로 응축한 붉은색 구체가 통로를 가로질렀다.
“온……다!”
“이걸 대체 어떻게…….”
“틀렸어.”
이영권을 비롯한 싸울아비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다가오는 불줄기는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어 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Lv8 ‘빙하조형(氷河造形)’이 발동됩니다!]
눈앞에 거대한 얼음 결정이 나타났다.
진혁이었다.
빙하조형을 결계에 덧씌우자 새하얀 룬어가 푸르스름한 빛을 띠었다.
상극의 속성을 이용한 방어.
드래곤의 브레스는 몰라도. 뱀이 사용하는 불줄기쯤은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었다.
이걸로 싸울아비 쪽은 안전하다.
“제기랄!”
마에다 역시 페르세우스의 방패 뒤로 몸을 숨겼다.
파츠츠츠…….
성유물의 효과가 발동되며, 마에다의 주위로 분홍빛 장막이 펼쳐졌다.
하지만.
그 범위는 진혁의 결계에 비해 너무나 작았다.
간신히 두세 명을 보호할 수 있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모두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동시에.
겁화가 통로를 휩쓸었다.
***
치이이익!
지면을 따라 일어나는 아지랑이.
숯덩이로 변한 사무라이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한 줌의 재가 되어 흩어졌다.
고통을 느낄 새조차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허나, 그렇게 즉사한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으…… 으아아악!”
마에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전신에 끔찍한 화상을 입었으니 그럴 수밖에.
그나마 마력을 다루는 솜씨가 어느 정도 있어 목숨이라도 붙어 있던 거지, 평범한 플레이어라면 당장에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중상이었다.
“그래서 말했잖아. 잘 사용하지 못하는 성유물은 넘기는 게 좋을 거라고.”
순순히 상납을 했으면 죽지 않아도 됐을 텐데.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 됐잖아?
“자업자득이니 원망하려면 스스로를 원망해.”
동정심?
그딴 건 조금도 들지 않는다.
애초에 먼저 선을 넘은 건 녀석들 쪽이었으니까.
게다가 ‘냉혹한 심장’의 특성으로 인해, 적이라고 인식한 대상에겐 더욱 자비가 없게 되어버렸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다수를 구하기 위한 방어기제인지도 몰랐다.
살아남기 위해선. 탑에 정상을 올라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선. 걸리적거리는 걸 모두 치워버려야 했으니.
‘다음 브레스가 오기 전까진 몇 분 정도 시간이 있을 테니 그전에…….’
진혁이 의식을 잃기 직전의 마에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방패에 냉기를 불어넣었다.
자욱한 연기와 함게.
붉게 달아올랐던 방패의 표면이 차갑게 식었다.
[페르세우스의 방패]
입수 난이도: S(붉은색)
내용: 신화 속 영웅.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상대할 때 사용했던 성유물입니다. 압도적인 방어력을 자랑하는 방패이지만, 이 방패의 주인인 아테네는 방패를 사용하는 이의 자격 역시 중요시 하였습니다. 플레이어가 갖는 실력과 잠재력에 따라 방패의 능력치 역시 차등 적용됩니다.
최상급 신격이 사용하는 성유물임에도 불구하고 고작 뱀이 사용한 브레스도 막지 못했던 이유.
바로 이것 때문이다.
‘스스로의 자격을 증명한 자만이 이 방패를 다룰 수 있다. 뭐, 이런 뜻이겠지.’
진혁이 방패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화끈하고.
손끝에서부터 정수리까지 뜨거운 마력이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방패가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난 것에 대한 기쁨을 포효하듯이.
그때였다.
“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마에다의 뒤에 있던 덕분에 상처 하나 없던 타케시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격하게 떨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갖고 있는 반쪽짜리 미래시를 연거푸 사용했지만, 진혁에 대한 미래는 엿볼 수 없었으니까.
‘아무리 내 능력이 불완전하다고 하더라도 아주 사소한 미래라도 보여야 한다.’
그것이 몇 시간 뒤의 모습이든.
혹은 몇 십 년 뒤의 모습이든.
어느 지점 하나는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진혁의 미래는 암막 커튼으로 가려진 것처럼 깜깜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 남자는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플레이어와도 다르다는 것뿐이다.
“대답해 줘. 당신. 이 탑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왜? 그 잘난 ‘눈’으로도 파악이 안 되니 이상해?”
진혁이 피식 웃었다.
“……! 내, 내 능력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고?”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고유 능력을 꿰뚫어보다니.
대체 이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란 말인가?
“믿을…… 수가 없어. 그 힘, 그 능력.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불가능해.”
“그야 그렇겠지.”
진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태연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탑의 가장 위에 있는 존재 중 하나거든.”
탑의 가장 위에 있는 존재 중 하나라고?
타케시가 천천히 그 말을 곱씹었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저 말이 의미하는 건 단 하나였으니까.
“설마……!”
그런 거였나.
그렇다면 모든 게 이해가 됐다.
상대가 갖고 있는 터무니없는 힘과 능력도.
그리고 미래시로 볼 수 없는 미래조차도. 전부.
‘인간이 아니라…… 신격이었어.’
타케시는 미래시를 통해 탑의 어딘지 모를 곳에 있는 신격들을 보았다.
음성만으로도 대기가 떨리고 손짓 한 번에 지면이 갈라지는 그런 존재들을.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진 일이었기에, 길드 내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지만, 설마 그 고고한 존재들 중 하나를 직접 만나게 될 줄이야.
고작 인간 따위의 몸으론 승산이 없다.
신격의 기분을 거스르는 것만으로도 존재 자체가 무(無)로 화할 테니까.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터질 듯이 두방망이질 쳤다.
몸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제, 제가 감히 죽을죄를…….”
타케시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게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다.
‘풉!’
그 모습을 보던 진혁이 폭발할 뻔한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진심으로 위험했다.
방금 터질 뻔했네.
‘역시 어설프게 탑의 위층을 엿보니 속기도 쉽게 속는구나.’
신격은 개뿔.
‘내가 신이었으면 지금 아장아장 한 층씩 오르고 있겠냐?’
1층부터 50층까지 가는 엘리베이터라도 하나 만들어서 초고속으로 날아갔겠지?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고 했는데.
옛 어른들의 말씀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진혁은 애써 표정을 담담하게 감쌌다.
이 녀석이 사무라이 길드 내에서 갖고 있는 위치를 생각하면 앞으로도 써먹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
그전에 잠깐.
“키에에에에!”
두 번째 브레스가 발사됐다.
통로에 있는 모든 걸 태워 버리며 다가오는 겁화.
그러나 이번에도 진혁은 가벼운 손짓 한 번으로 불줄기를 막았다.
[‘그럴듯한 속성 방벽’이 발동됩니다!]
[1차 전직을 위한 두 번째 조건을 달성하셨습니다!]
콰아아아앙!
얼음과 불이 정면으로 맞부딪치자 자욱한 수증기가 일어났다.
이 모든 건 상극의 스킬과 결계의 연계 덕분이었으나 지켜보는 타케시의 눈엔 신의 힘 그자체로 보였을 거다.
“여, 역시……!”
“이런 거 가지고 놀라지 말고. 그보다 뭐 하나만 질문해도 될까?”
“무, 물론입니다. 뭐든지!”
“내가 인간들의 생태가 어떤지 궁금해서 내려오긴 했는데, 아직까지 모르는 게 좀 많아. 탑의 규칙이라는 게 꽤나 성가시거든. 아무리 신격이라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개연성이니 제약이니 하면서 힘을 억제한단 말이야.”
귀찮은 설명을 피하는 덴 상대가 알지 못하는 규칙을 들먹이는 것 만한 게 없다.
알 리가 없지.
‘나도 잘 모르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워낙에 개연성과 밸런스가 붕괴된 망겜이라 이걸 만든 놈들도 자기가 뭘 만들었는지 모를 거다.
그러니 아무거나 던져도 통한다.
저 녀석이 나를 신이라고 믿는 한은.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부탁을 좀 할까 해.”
진혁이 능글맞은 얼굴로 본론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