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메두사 레이드 (4)
거인의 손아귀를 사용해 기둥을 휘두르는 건 일종의 퍼포먼스다.
상대의 눈길을 끌어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한.
‘상대를 속이는 덴 역시 시각적인 게 최고지.’
진혁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괜히 마술사들이 아름다운 미녀와 화려한 복장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게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틈을 찌른다면.
제 아무리 보스 몬스터라고 해도 한 방 먹을 수밖에 없다.
“어, 어느새… 이런 장난질을 해놨다니!”
메두사가 바닥을 보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피로 그려진 룬어.
조금 전 죽은 탱커의 피를 신발에 묻혀 그린 술식이었다.
메두사가 재빨리 몸을 피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늦어도 너무 늦었지.
“널 위해 특별히 제작해 봤어.”
어중간한 크기의 결계로 가둘 수 없다면…….
아예 지면 전체를 활용하면 그 뿐.
우우우웅!
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룬어가 화려한 빛을 내뿜었다.
“이건 쉽게 깨드릴 수 없을 거야.”
당연한 이야기다.
애초에 아까와는 규모부터 달랐으니까.
우우우우웅!
[3성급 결계 ‘봉인의 관’이 발동됩니다!]
제대로 된 공정과 정확한 마력이 합치되었을 때만 나타나는 문구.
처음으로 성(成)이 붙은 결계가 발동되었다.
좋아.
진혁이 뿜어져 나오는 빛무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로 그리는 거라 살짝 걱정되긴 했는데.
역시 몸은 제대로 기억하는 모양이다.
폼은 죽어도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까?
정사각형으로 된 결계 안에 갇힌 메두사가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 당장 이걸 풀지 못 하겠느냐!”
쾅!쾅!쾅!쾅!쾅!
채찍을 휘두르고 꼬리로 내려찍어도 결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말했잖아.
쉽게 깨지지 않을 거라고.
“괜히 힘 빼지 말고 얌전히 있어.”
사실 파훼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한데, 무식하게 힘으로 해서는 천년이 지나도 흠집조차 가지 않을 거다.
결계라는 게 나름 섬세한 거거든.
진혁이 힐끔 허공을 바라봤다.
보스 몬스터를 가둬놨으니, 이제 퀘스트의 성공을 알리는 상태창이 나타나야 한다.
바로 그 때.
띠링!
허공에 여러 개의 상태창이 연이어 나타났다.
[세 번째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결계사의 1차 전직에 성공하셨습니다.]
[전직 퀘스트 중 가장 높은 등급의 보스 몬스터를 가두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히든 직업’이 활성화 됩니다!]
[결계사의 상위 직업 ‘룬의 해석사’로 전직하셨습니다!]
이럴 수가…!
“그래!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진혁이 터져 나오는 환호성을 그대로 내뱉었다.
전직 조건에 보스 몬스터를 가두라는 말은 있었지만, 얼마나 강한 보스를 잡으라는 지에 관해선 명확한 언급이 없었다.
당연히 가뭄에 콩 나듯 결계사를 선택하는 플레이어들은 세 번째 조건에서 가장 약한 보스를 찾아다녔다.
1층에 있는 고블린이나 슬라임. 놀 따위의. 비교적 잡기 쉬운 녀석들을.
‘그래. 그게 장상이긴 하지.’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고인물은 남들이 가는 그런 길을 가지 않는다.
똑같이 정보가 없는 상황 속에서라도. 더 어렵고. 조금이라도 더 보상이 클 것으로 예상되는 길을 찾고자 했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모두가 꺼려할수록.
더 큰 보상이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 가정은 정확히 적중했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고동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련의 탑이 출시된 후 11년간 히든 직업으로 전직한 플레이어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전직 퀘스트를 준 회색신전에서 가장 어려운 난이도인 메두사를 처리할 경우. 전직에 추가적인 보상을 줄 거라곤 예상했지만.
그게 설마 히든 직업과 이어질 줄이야.
‘이건 나도 몰랐던 거네.’
허나, 이렇게 기분 좋게 뒤통수를 때리는 일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진혁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일단, 내용부터 확인해 봐야겠어.’
히든 직업이니 당연히 좋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상세한 내용은 직접 읽어봐야 한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킨 진혁이 상태창의 첫줄을 읽기 시작했다.
[룬의 해석사]
입수 난이도: 오버랭크
내용: 결계사가 기존에 있던 룬을 활용해 결계를 구축할 수 있다면, 룬의 해석사는 룬의 본질을 깨닫고 그걸 재해석하여 기존에 없던 결계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룬어를 통해 삼라만상을 구현하는 것. 그것이 해석사가 갖고 있는 능력의 본질입니다. 룬의 해석사가 만든 결계는 일반적인 결계의 2배의 성능을 지니고 있으며, 결계를 만든 본인 외에 타인은 결계를 파훼하기는커녕 그 구조를 파악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겁니다.]
“허….”
훌륭하다. 라는 말 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이 직업은 고인물들에게 있어 가장 사랑스러운 조건을 충족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인성질 하기 제일 좋은 조건을!
‘파훼하는 게 매우 어렵다라….’
진혁의 입꼬리에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맺혔다.
동시에 머릿속엔 수없이 많은 장면들이 스쳐지나갔다.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을 결계에 가둬놓고 머리카락 위에 탈모에 좋은 산성비를 한 방울씩 떨어뜨린다거나.
보물 상자 위에 결계를 펼쳐 절규하는 상대를 바라본다거나.
음….
설사약을 먹인 뒤 화장실을 막아버리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엘리스의 경우엔 결계 안에 치킨이랑 맥주를 넣어두면 되겠고.’
천유성은… 녀석이 아끼는 검 같은 걸 결계 안에 봉인시켜 버린 뒤 약이나 올려 볼까?
그것도 꽤나 스릴 넘칠 것 같았다.
물론, 뒷감당이 안 될 테니. 생각해둔 것들을 전부 다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활용 가능한 방법이야 무궁무진하게 많을 테지.’
탑에 흥미를 갖기 위해 한 선택이 구르고 굴러 엄청난 파급효과를 만들었다.
게다가.
[‘달의 각인’이 새겨집니다.]
츠츠츠!
짧은 메시지와 함께 진혁의 손목에서부터 어깨까지 하얀색 각인이 떠올랐다.
최소한의 마력으로도 결계를 발동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
이걸로 1차 전직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
“크으….”
“좋아좋아.”
“아주 좋아.”
진혁이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상태창을 읽고 있을 때였다.
“나,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인 거냐?”
결계에 갇혀 있는 메두사가 중얼거렸다.
“응?”
“……역시 죽일 건가?”
기세등등했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졌고. 이제는 독 안에 든 생쥐마냥 온통 걱정과 두려움만 가득해 보였다.
무서운 거겠지.
이대로라면 목숨을 잃게 될 테니까.
진혁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 아무래도 머리는 잘라버리고 뱀가죽으로 적당한 방어구나 좀 만들어야겠지? 요즘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방어구 수요가 제법 있다고 들었거든.”
“뭐, 뭐라고?”
섬뜩한 말에, 메두사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자신의 최후가 어떻게 될지. 그리고 사후에 어떻게 사용될지에 대해 듣는 건 그리 유쾌한 대화주제는 아닐 거다.
적어도 메두사에게는 말이다.
“농담이야. 하지만, 계속 시끄럽게 굴면 정말로 뱀가죽 지갑 하나 새로 장만하게 될 수도 있어.”
보통 던전을 클리어하면 보스 몬스터를 죽이는 게 상식이다.
경험치와 보상. 그리고 아이템까지.
얻을 수 있는 게 무궁무진했으니까.
그러나. 회색 신전은 다른 곳에 비해 그 메리트가 떨어진다.
신전을 벗어나면 메두사의 머리는 석화능력을 없어버리는 데다. 뱀가죽으로 만든 방어구는 독성이 남아있어 소유자에게 지속적인 데미지를 주기 때문이다.
물론, 경험치와 외에도 다른 보상이 나오긴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더욱 좋은 방법이 있다.
진혁이 ‘코인 거래소’를 활성화 했다.
필요한 게… 어디보자.
“놋쇠 그릇에 트라이혼 염소의 피 1L, 늪지 방아깨비의 뒷다리 6개와 푸른 연꽃이었지?”
[총 3350코인을 지불했습니다.]
대부분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라. 지출은 크지 않았다.
어차피 최근 올린 동영상들의 조회수가 천만 단위를 기록하는 중이기도 했고.
“그럼 가장 먼저 해야 할 게….”
콸콸콸!
진혁이 색이 바랜 놋쇠그릇에 염소피를 쏟고 그 위에 푸른 연꽃을 띄웠다.
마지막으로 늪지 방아깨비의 뒷다리를 연꽃의 모서리 부분에 각각 한 개씩 올려놨다.
그러자 그 순간.
우우우웅!
놋쇠그릇이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붉은 표면이 넘실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이것 참… 어이가 없군요.]
중후한 목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남자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한 마디 덧붙였다.
[강진혁 플레이어님. 대체 이 연락처는 또 어떻게 알아내신 겁니까?]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마법대도서관의 사서이자 상단의 주인.
릭 헤네시였다.
“어라? 이것저것 막 사다가 섞었는데, 왜 이게 이렇게 된 거지? 하하. 이거 진짜 이.상.한. 우연이네요.”
진혁이 멋쩍은 듯이 웃었다.
이 방법을 쓴 건. 초대장도 없이 상대방의 안방에 들이닥친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
하지만 어쩌겠나?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는 게이트는 닫혀 있으니 이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그건 제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닙니다만…. 말씀해주시죠. 이 연락처는 아직 신격 분들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는데, 무슨 수로 알아내셨는지. 그 방법을 알아야겠습니다.]
릭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구렁이 담 넘듯 얼렁뚱땅 넘길 생각은 없는 듯싶었다.
그렇다면.
“아! 그러고 보니 여기에 웬 마수 한 마리가!”
진혁이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
릭의 말이 잠시 끊겼다.
아이템을 사용해 연락을 취하는 방법은 한 쪽의 시야가 공유되는 방식이었기에, 진혁이 보는 것은 릭 또한 볼 수 있었다.
“자. 개봉박두 하시고!”
진혁이 결계 안에서 침울한 표정을 한 채 똬리를 말고 있는 메두사를 바라봤다.
그러자.
[컥? 저, 저 몬스터는…!?]
릭의 목구멍을 따라 헛바람이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관심이 있을 줄 알았다.’
진혁의 입 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그리스 쪽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것이 유물이든 기록이든 아니면 사람이나 심지어 마수라도 악착같이 수집하는 신격이 있다.
릭은 그 신격과 꽤나 돈독한 사이였고.
메이드 인 그리스라면, 이가 나간 항아리 하나로도 군침을 삼킬 텐데. 하물며 살아 있는 메두사를 구할 수 있다?
더 이상 이야기 해봤자 입만 아프다.
계산이 빠른 릭 역시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터.
“제가 갑자기 연락드린 건 분명 잘못입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건데……. 정 언짢으시면 이 이야기는 없는 걸로 하겠습니다. 저야 메두사의 부산물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거든요.”
진혁이 쌍룡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파츠츠츠!
‘검의 무덤’이 발현되면서. 검신이 묵빛으로 물들었다.
[자,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절대 죽이면 안 됩니다. 절대!]
릭이 다급하게 외쳤다.
이야.
이 아저씨가 이렇게 다급한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거리가 멀어서 망정이지. 눈앞에 있었으면 빤스 바람으로라도 달려왔을 기세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진혁의 검끝이 메두사에게 향했다.
“제가 연락처를 알아낸 방법. 아직도 그딴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