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달빛이 머무는 축제 (2)
“하아. 하아. 하아.”
실비아가 죽을 것 같다는 표정으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진혁이 안내한 오른쪽 길은 워낙 험지였기에, 엘프들조차 가지 않던 길이었다.
사실상 막혀 있다고 알려진 험로.
하지만, 진혁은 바위틈을 파고들고 수풀 사이를 가로지르며 그야말로 미친 듯한 속도로 마을 어귀까지 주파해 버렸다.
한참이나 먼저 도착해 도수체조를 하고 있던 진혁이 뒤늦게 따라온 실비아를 바라봤다.
“앞으론 이쪽 길로 다녀요. 훨씬 더 빠르니까.”
원래 이런 거 잘 안 알려 주는 건데.
시간은 소중하니까 특별히 지름길을 알려 주는 거다.
진혁의 말에, 실비아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자아냈다.
“그, 그야 당연히 빠르긴 하겠죠!”
이렇게 무지막지한 길로 오는데 느릴 리가 있나?
시간을 단축해도 몇 배는 단축할 수 있을 거다.
단지, 오다가 몇 명이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길이라는 게 문제지.
‘대체 어떻게 된 인간이 저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거야?’
만약 이 자리에 자신이 아닌 상급 레인저가 있다고 한들, 저토록 현란하고 자연스러운 동작을 보이는 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이곳에서 태어나서 자란 엘프들도 모르는 길을 저리 완벽하게 꿰차고 있지 않은가?
보면서도 믿기 힘들었다.
이건…… 완전히 상식을 무너뜨린 일이었으니까.
‘서, 설마, 폴리모프한 드래곤 같은 건 아니겠지? 유희를 하러 탑 아래로 내려왔다든가. 그래서 엘프 고기를…… 꼴깍.’
그렇게 실비아가 온갖 망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아주 희미하게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리는가 싶더니.
부웅!
슈우우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날아왔다.
빠르다.
“아?”
실비아는 깜짝 놀라 반응하지 못했으나, 어느새 진혁의 손엔 붉은 빛이 도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카아앙!
튕겨나간 화살들이 허공에서 빙그르르 돌다 바닥에 꽂혔다.
백색 나무로 만든 화살대와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화살촉.
엘프들의 것이 틀림없다.
“손님들을 대하는 태도가 영 험악하네. 집들이 선물을 안 가져와서 그런가?”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숲속 너머에서 다수의 엘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꽤 많이도 모였네.’
얼핏 확인한 것만 해도 스물이 넘는다.
장궁과 단검으로 무장한 레인저들이 진혁의 주위를 완벽하게 포위했다.
“손님이라……. 네 녀석이 말이냐?”
차갑게 말을 뱉은 건 긴 은발의 남성 엘프였다.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수려한 외모다.
하지만, 진혁의 눈에 밟히는 건 외모가 아닌 녀석 그 자체에 대한 짜증스러운 기억이었다.
레인저들의 지휘관이며 동시에 가장 높은 계급인 1계급에 위치한 하이엘프, 테슬론.
그래. 그게 아마 저 녀석의 이름일 거다.
진혁이 재빨리 ‘탐식의 눈’을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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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테슬론
성별: 남
나이: 926세
레벨: 30
힘 18 민첩 30 체력 21 마력 45 숲의 정기 40
직업: 상급 레인저
고유 능력: ‘백발백중(百發百中)’
스킬: Lv6 ‘속사(速射)’, Lv6 ‘정령 강화’, Lv5 ‘가벼운 발걸음’, Lv5 ‘바람의 가호’, Lv4 ‘천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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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 조건: 테슬론은 긍지 높은 엘프족의 1계급 레인저입니다. 그 누구보다 활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으니, 녀석의 고유 능력을 복사하고 싶으면 단 한 번이라도 녀석보다 명중률 높은 화살을 쏘십시오.]
젠장. 맞네.
저 녀석. 예전에 축제에서 숲 외각까지 추격했던 바로 그놈이다.
진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재수 없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과거의 편치 못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고작 연주 한 번 잘못 했다고 지옥 끝까지 쫓아오려 하다니.
엘프계의 천유성이 있다면 바로 이 녀석을 지칭하는 말이리라.
그때.
“테슬론 님! 잠시, 잠시만요!”
옆에 있던 실비아가 앞으로 나섰다.
또다시 활에 시위를 걸던 테슬론이 멈칫했다.
“너는…… 분명, 펜하임 장로님 밑에 있던 레인저가 아니냐?”
“예. 3계급 레인저, 실비아라고 합니다.”
“말해라. 어째서 인간과 함께 있는 거지?”
“그게…….”
실비아가 말끝을 흐리자. 테슬론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지나갔다.
“설마, 이 인간을 우리 영역에 들인 게 너라는 개소리를 지껄인다면, 아무리 네가 철없는 어린 엘프라고 할지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아니에요. 이분을 초대하는 건 장로님도 허락을 하신 거예요.”
“뭐라고? 장로님께서 허락하셨다고?”
테슬론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자신이 들은 게 맞는 건지 의심스러운 표정이다.
“테슬론 님이 ‘중앙 숲’으로 가셨을 때 결정된 일이에요. 여기, 이게 저분을 손님으로 데려오겠다는 증표구요.”
실비아가 품안에서 청옥으로 만든 조각품을 꺼냈다.
엘프 장로들만이 가질 수 있는 성유물이었다.
“믿을 수가 없군. 장로께서 인간 따위를 축제에 초대했다니……. 그것도 하필이면 이런 품위 없는 놈을.”
테슬론이 불만에 가득 찬 말투로 중얼거렸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무리 1계급의 하이엘프라도 장로의 명령을 거스를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진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음.
뭐랄까?
그냥 한 번 참고 넘어갔으면 아무 일 없을 테지만, 저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자니 1년 365일 내내 잠자리가 편치 않을 것 같달까?
“이야. 이거 품위 없는 인간이라 미안하게 됐어. 그런데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고오오귀하신 귀쟁이 분께선 품위가 목구멍까지 차서 손님에게 화살이나 날리는 거야? 아니면 뇌까지 품위로 되어 있어서 생각이라는 걸 못 하는 거야?”
진혁이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이야. 이렇게 말하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다.
다른 사람들은 속에 있는 말을 어떻게 꾹꾹 참고 지내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체증이 싹 가시는데 말이야.
“뭐, 뭐라고? 지금 그 말, 나에게 한 것이냐!”
“그냥 혼잣말이었는데, 발끈하는 거 보니 찔리나 봐?”
“정녕 네놈이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테슬론이 순식간에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빠르다.
빠르긴 한데.
“장로의 명령을 어기는 건 현명하지 못한 판단인 것 같은데. 정말로 해 보려고?”
진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도발했다.
“어차피 쏴 봤자 한 발도 안 맞겠지만, 그걸로 분이 풀릴 것 같으면 얼마든지 해 보든가.”
“……네놈. 장로님의 초대장 하나 믿고 까부는 거라면 지금 크게 실수하는 거다.”
“당신이야말로 지금 크게 실수하고 있는 거야.”
왜냐면.
“축제에 쓸 ‘늪지 무화과’가 부족한 지금, 그걸 제 시간 안에 채워 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바로 나니까.”
이런 이유가 있거든.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이후에 이어진 건 거대한 동요였다.
테슬론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놀란 건 주위에 있던 다른 엘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그걸 어떻게?”
“우리에게 늪지 무화가가 부족하다는 걸 무슨 수로 안 거야?”
“말도 안 돼. 외부인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당황스러울 거다.
처음 만난 인간이 엘프들의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이 정도 단서가 주어진 이상 진혁으로서는 모른 척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테슬론과 나머지 엘프들은 조금 전까지 늪지를 돌아다니며 무화과를 따고 있었겠지.’
진혁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엘프들의 신발엔 아직까지 말라붙은 진흙들이 엉겨 붙어 있었다.
이렇게 햇살이 좋은 때에 축축한 진흙이라니.
물이 있는 곳에서 열심히 굴러다녔다고 광고를 하는 셈 아닌가?
게다가 실비아가 언급했던 ‘중앙 숲’은 위험하지만, 무화가가 많이 자라는 곳.
정찰과 경계가 주요 임무인 레인저들까지 동원됐다는 건 그만큼 축제에 쓸 무화가가 부족하다는 방증이다.
“네 녀석이 무화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이 말인가?”
“맞아.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구해 줄 수 있지.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말이야.”
“…….”
테슬론이 무언가를 고민하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아주 잠시뿐이었다.
“미심쩍긴 하지만, 우리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특별히 이번 한 번만 네 녀석을 믿어 주도록 하마.”
이것 참…….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진혁이 피식 웃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했지. 해 주겠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어디서 특별히 허락해 주느니 마니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본데, 난 이곳에 손님 자격으로 온 거다.
넌 그 손님한테 함부로 대하는, 속이 배배 꼬인 집주인 중 하나고.
진혁은 단칼에 거절한 다음, 옆에 있던 실비아를 바라봤다.
“일단, 가죠. 장로님들이랑 만나 본 뒤에 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물론, 저기 싸가지 없는 엘프는 빼고요,”
“네? 네……네.”
실비아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엘프들의 포위망을 지나 유유히 마을로 향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테슬론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분한 듯 어금니를 갈며, 진혁을 노려볼 뿐이었다.
***
잠시 뒤, 나무와 집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마을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저는 안에 들어가서 장로님을 모시고 올게요.”
실비아가 진혁에게 양해를 구했다.
혼자 남게 된 진혁이 느긋하게 주위 경치를 감상했다.
따사로운 햇살이 풀잎에 부서지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크으. 진짜 아름답긴 하네.’
그동안 대체 얼마나 이곳에 다시 오고 싶었던가?
그때 빌어먹을 타이타닉만 연주하지 않았어도 영구 추방을 당하는 수모 따윈 겪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이 일을 대비해 관련된 고유 능력들을 저장해 뒀으니까.
남은 건 이번 축제에서 얻어야 할 이득과 기연들이 원하는 순서대로 들어오게 배치하는 것뿐.
‘이번 기회에 흑역사를 완전히 지워 버리겠다.’
진혁이 전의를 불태웠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덜컹!
마침내 문이 열리며,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엘프가 나타났다.
테슬론과는 전혀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과연, 이 노인이 장로 중 하나인 건가.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마을의 장로직을 맡고 있는 펜하임이라고 합니다.”
펜하임이 환영의 의미로 악수를 청했다.
“강진혁입니다.”
진혁 또한 짧게 자신을 소개하며, 펜하임의 손을 맞잡았다.
상투척인 인사치레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선,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이곳에 꼭 한번 와 보고 싶었거든요. 아름답고 평화로운 엘프들의 마을에 올 수 있는 기회는 그리 자주 오는 게 아니죠.”
“별 말씀을요. 실비아가 진혁 님 요리를 먹고 어찌나 칭찬을 많이 하던지. 허허. 저희야 말로 만나 뵙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분이 좋았는지 펜하임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요리야 오늘 저녁에라도 바로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음……. 그것도 감사한 말씀이지만, 그전에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실비아로부터 대충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만, 저희의 곤란한 상황을 해결해 주실 수 있다고 하셨다던데. 그 말이 사실입니까?”
이건 ‘늪지 무화과’에 관한 이야기다.
좋아.
이 주제가 나오길 기다렸다.
“물론, 가능합니다.”
가능하지.
가능하고말고.
“단.”
진혁이 헛기침을 하며, 본론을 꺼냈다.
“그 대가라고 하긴 뭐하지만, 사실 제가 엘프들의 궁술을 견식하고 싶은데, 혹시 가능할까요? 앞으로 탑을 오르려면 역시 중거리에서 최강이라 평가받는 궁술을 반드시 배우고 싶거든요.”
엘프가 활을 잘 다룬다는 건 상식 중의 상식.
다행이 펜하임은 어려울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야 당연히 해 드려야죠. 어떻게. 실비아를 붙여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뇨. 너무 화살을 잘 쏘는 엘프에게 배우면 자괴감이 들 것 같아서요. 기왕이면 실력이 살짝 낮은 상대면 좋겠어요. 그래야 처음 배우더라도 자신감도 갖고 어느 정도 흉내라도 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럼 어떤 엘프에게 배우고 싶으신 겁니까? 혹시 원하는 상대라도 있으신지요?”
“마침 딱 한 분이 있습니다.”
진혁이 손가락이 한 엘프를 가리켰다.
“저기, 저분. 저분이라면, 처음 배우는 제 수준에 딱 맞을 것 같습니다. 아! 어쩌면 제가 더 잘할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지목을 받은 엘프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건방진.”
엘프 레인저의 대장. 테슬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