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7층, 혹한의 땅 툰드라 (2)
바위에 새겨진 붉은색 표식.
바로 설원의 부족 ‘아이스 트롤’이 남긴 표식이었다.
‘역시, 이 녀석들이었군.’
진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본래 아이스 트롤들은 이곳이 아닌 7층 서쪽에 있는 ‘백산(白山)’에 자리 잡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놈들이 영역을 넓혔다. 바로 이곳까지.
‘단순히 개체수가 늘어나서 그런 게 아니야.’
진혁의 시선이 다시 한번 표식으로 향했다.
아이스 트롤 고유의 가면 그림이 칠해져 있는 게 보였다.
그래. 여기까지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 탑에 있는 수많은 트롤 부족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종류였으니까.
문제는 표식의 모양이다.
가면 상단에 붉은 선이 세 개.
다시 말해.
‘부족에게서 가장 위대한 전사가 나왔을 때만 사용되는 문양이지.’
일명, 네임드급의 탄생이라는 것이다.
단군 길드가 모조리 당할 정도면 꽤나 강력한 전사가 나타난 게 틀림없었다. 어쩌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놈이.
그때였다.
움찔.
진혁의 감각에 무언가 잡혔다.
이곳까지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할 테지만, 머지않아 모습이 보일 것이다.
트롤들은 아니다. 마력의 양과 다가오는 방향 그리고 수를 봤을 때. 조금 전 입구를 지키던 플레이어들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그 예상을 증명하듯.
잠시 뒤, 눈길을 헤치고 다섯 명의 남녀가 다가왔다.
“어으. 팔다리에 감각이…… 어!”
“차, 찾았다!”
“강……진혁 플레이어님!”
“후우. 진짜 죽는 줄 알았네. 다행입니다. 이렇게 빨리 만나게 돼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덜덜 떨고 있는 걸 보니, 여기까지 오는 데 고생깨나 한 듯싶었다.
하긴 이 온도에선 단순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질 테니까.
이 사람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지만…….
진혁은 모른 척 너스레를 떨었다.
“숲 속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하더니, 이 깊은 곳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하하. 그게…… 저희도 오고 싶지 않았지만, 강진혁 플레이어님 혼자 이곳에 보낼 순 없죠. 암요.”
“최소한 길 안내라도 필요할 것 같아서요.”
누가 누굴 안내해 주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소주를 3병 마셔도 내가 더 길을 잘 찾은 것 같은데 말이지.’
그래도 나쁘지 않은 타이밍에 와 줬다.
이 사람들이 왔다는 건 단군 길드의 메인 공격대 또한 숲 속으로 향할 거라는 뜻이었으니까.
“마침, 할 이야기가 있는데, 그 전에 다들 몸부터 좀 녹여야겠네요.”
저체온증으로 인해 의식이 깜빡이는 걸 보니, 생각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인다.
이러다간 얼음 인형들이랑 겨울왕국을 찍어야 될지도 모르겠는데?
진혁이 ‘불의 원소’를 발동했다.
화르륵!
축구공만 한 불덩이가 타오르자, 순식간에 눈이 녹기 시작했다.
눈 더미 사이에 몇 명인가 쉴 수 있을 만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좋아.
이번엔 ‘빙하조형’ 차례.
진혁이 가볍게 손을 움직였다.
파츠츠…….
얇은 얼음 막이 플레이어들을 완전히 감쌌다.
이글루를 본뜬 외형.
아늑한 쉼터까지는 아니었어도 거센 바람을 막아 줄 수 있는 임시 거처 정도는 될 거다.
“세상에나…….”
“마법 연계를 이토록 부드럽게 하실 줄이야.”
“고마워요. 역시, S급 플레이어가 있으니 든든하네요.”
“……엄청 따뜻해졌구만.”
모두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온도가 10도 이상 올랐으니 그럴 수밖에.
이제야 조금씩 혈색이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강진혁 플레이어님 덕분에 한 숨 돌렸네요. 전, 곽대호라고 합니다.”
곽대호라고 자신을 간단하게 소개했다.
30대 초반에 서글서글한 인상이 꽤나 인상 깊었다.
[곽대호, 33세.]
[고유 능력: …….]
[스킬: …….]
굳이 열거할 필요도 없는 스탯창.
B급 정도에, 고유 능력이나 스킬들 중에 마음에 드는 건 없었다.
전부 이미 갖고 있는 스킬들의 하위 호환이랄까?
다른 사람들도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다.
‘영양가는 영 없는 친구들이네.’
진혁은 ‘탐식의 눈’을 거둔 채 본론을 꺼냈다.
“감사의 인사는 됐습니다. 그보다 단군 길드는 지금 어느 정도 거리에 있는 건지 말씀해 주시죠.”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인지…….”
곽대호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말꼬리를 흐렸다.
하여간,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왜 이렇게 연기력이 0점인 건지 모르겠다.
릭 같은 능구렁이 영감은 그래도 속마음은 잘 감췄는데 말이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알고 있습니다. 제가 불사조의 깃털을 먼저 얻으려는 걸 막으려고 여러분을 이곳까지 보낸 거 아닌가요? 오기 싫은 걸 장은석 공대장이 억지로 떠밀었겠죠. 말단인 여러분이야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테고요.”
“…….”
정곡을 찔리자, 곽대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여러분한테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닙니다. 사실, 깃털을 확보하는 것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이 생겼거든요.”
“골치 아픈 일이요?”
“예. 저기 나무 보이십니까?”
진혁이 손가락으로 조금 전의 나무를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 이동했다.
“이상한 문양이 그러져 있네요.”
“무슨 아프리카가 부족의 가면 같은데…….”
“아이스 트롤들이 사용하는 표식입니다. 가면 상단에 칼날 모양이 추가되어 있는 걸 보면 ‘서리 칼날’ 부족의 트롤들이 남긴 거겠죠.”
“아, 아이스 트롤이라면…….”
“들어 봤어요. 7층에서 가장 흉폭하다고 알려진 중형급 몬스터.”
군집 생활을 주로 하며, 지능 또한 높은 축에 속해 상대하기 굉장히 까다롭다.
개개인의 전투력이 뛰어난 건 말할 필요조차 없었고.
곽대호와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부족의 종류나 표식에 대해서까진 몰랐지만, 트롤들이 얼마나 까다로운지에 관해선 익히 들어왔었다.
“여기가 그놈들의 영역이라는 말씀입니까?”
“예. 보아하니 영역을 좀 넓힌 것 같습니다. 아마 주위에 있던 다른 종족들과의 싸움에서 크게 승리한 덕분이겠죠.”
진혁의 말에 잠자코 있던 여성 플레이어 한 명이 끼어들었다.
“그, 그렇다면, 얼른 돌아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출입을 통제하고 놈들의 영역에 침범하지 않는다면, 문제 될 일은 없을 거예요.”
합리적인 제안이다.
단군 길드가 계속해서 죽어 나간 건 이 숲에 함부로 발을 디뎠기 때문.
반대로 말하자면, 놈들의 땅에 접근하지만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일은 없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아뇨. 문제는 그것보다 좀 더 복잡합니다.”
진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족을 형성할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는 놈들은 단순히 내버려두기만 한다고 해서 얌전히 있지 않는다.
실제로 과거 시련의 탑에서도 이 정도 세력이 갖춰질 경우 몬스터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했다.
영역을 대거 확장해 탑의 다른층을 넘보거나.
혹은.
시선을 돌려 탑의 바깥쪽을 노리거나.
둘 중 하나의 사건이 터지게 되어 있다.
‘불사조의 깃털은 게이트를 열기 위한 재료 중 하나이기도 하다. 즉, 놈들이 노리는 건 8층이 아닌 탑 외부라는 뜻이겠지.’
일명 아웃브레이크라 불리는 현상.
실제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역시 이와 같은 현상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불바다로 변할 뻔했었다.
그때는 훨씬 더 약한 놀과 고블린이 튀어나왔음에도, 피해는 수치화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났다.
하물며, 이번엔 훨씬 상위종인 아이스 트롤 아닌가?
‘사망자 수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가 될 수도 있어.’
미국, 유럽, 중국, 인도, 아프리카, 한국, 일본.
어느 쪽에서 아웃브레이크가 터질지는 미수다.
시간 또한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진혁이 현재 처한 상황을 설명할수록 다섯 명의 얼굴은 거무죽죽하게 변해 갔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인지한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S급이 하는 발언이었기에,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움찔!
진혁의 감각에 또다시 무언가 잡혔다.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마력.
가볍게 눈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발걸음과 안정적인 호흡이 느껴졌다.
사박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커지자, 이글루 안에 있던 플레이어들도 무언가 접근하는 것을 눈치 챘다.
“저희 쪽에서 온 것…….”
“쉿!”
진혁이 재빨리 제지했다.
어느새 손에는 녹색 빛을 머금은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엘프 마을에서 가져온 ‘펜타그리스의 송곳니’였다.
“……적인 겁니까?”
곽대호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마도요.”
긍정의 의미가 담긴 대답.
그 말에, 실내의 공기가 급변했다.
싸움이 임박됐다는 게 실감되며, 심장이 빠른 속도로 전신에 피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부우우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2m에 이르는 창이 날아왔다.
콰콰콰쾅!
콰아앙!
얼음벽을 반쯤 뚫고 박힌 창들.
투창(投槍)이다.
그것도 임시이긴 하나, 빙하조형으로 만든 벽을 관통할 만큼의 위력을 지닌.
하지만 놀랄 새도 없이. 또 다른 창들이 연거푸 벽을 두드렸다.
쾅! 콰앙!
벽을 따라 금이 죽죽 그어졌다.
이대로는 얼마 버티지 못한다.
앞으로 몇 번이면 창들이 내부에 있는 플레이어들에게까지 미칠 게 불 보듯 뻔했다.
“밖으로 나가서 엄폐물부터 찾아! 여기 있으면 그대로 당한다!”
곽대호가 재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제길!”
“하영이는 포션 마시고 당장 캐스팅할 준비 해. 적의 위치만 찾으면 바로 반격할 거니까!”
“알겠어요!”
탓!
타앗!
일사분란하게 이글루 밖으로 나가 진형을 잡는 플레이어들.
그래도 명색이 단군 길드에 속한 것다운, 빠른 판단과 대처였다.
***
휘이이잉!
거센 눈보라가 일어났다.
나무 사이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지만, 시야 탓에 정확한 위치를 식별하긴 힘들었다.
적어도 곽대호와 나머지 플레이어들의 수준에선 말이다.
“빌어먹을. 대체 어디서 쏜 거야?”
“모르겠어요. 언덕 위쪽인 것 같은데, 노릴 수 있는 포인트가 너무 많아요.”
“후우. 이거 완전히 독 안에 든 생쥐 꼴이구만.”
바위 뒤에 몸을 숨은 채 힐끗 고개만 내밀자.
쉐에에엑…… 콰앙!
기다렸다는 듯 창이 날아왔다.
바위에 튕겨나간 창에서 화려한 불똥이 튀어 올랐다.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더 바깥으로 나갔다간, 즉시 머리가 통째로 갈려 나갔을 것이다.
“큭! 저 자식들. 이 폭풍 속에서 우리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
이쪽은 상대의 위치를 모르는데, 상대는 훤히 이쪽을 파악하고 있다.
먼저 갔던 정찰대들이 어째서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는지 이해가 갔다.
대자연을 등에 업고 저격을 해 대는데 대체 무슨 수로 버티겠는가?
그런데.
누군가 태연스럽게 바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진혁이었다.
“가, 강진혁 플레이어님! 위험합니다!”
곽대호가 다급히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여러 개의 창이 동시에 쇄도했다.
스윽.
진혁이 살짝 고개를 왼쪽으로 젖혔다.
볼에서 3cm 떨어진 곳으로 창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과하지도 급하지도 않게.
그저 반 보 정도 되는 간격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푸욱! 푹!
빗나간 창들이 눈 위에 꽂혔다.
이어서 또 다른 창들이 날아왔으나, 결과는 마찬가지다.
푹! 퍼억! 푹!
검으로 막거나 받아치는 게 아닌, 그저 궤도를 예측해 피할 뿐.
터무니없는 광경에, 지켜보는 사람들의 턱이 빠질 듯이 벌어졌다.
시야가 없는 곳에서 이런 곡예에 가까운 회피라니.
혹시라도 꿈을 꾸는 게 아닐지 분간이 안갈 지경이다.
“어어…….”
“이거 현실 맞지?”
“이게…… S급인가. 미쳤……구나, 진짜.”
실제로 몇몇은 허벅지를 꼬집어 보기도 했다.
아무리 많은 창을 던져도 소용없다는 걸 느낀 걸까?
더 이상 창이 날아오지 않았다.
게다가 거짓말처럼 눈보라가 멈췄다.
바람 소리가 잦아들고. 시야가 조금씩 확보되기 시작했다.
눈으로 덮인 작은 언덕 너머에서.
푸른 안광을 내뿜는 아이스 트롤들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까지는 모두의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저, 저건 대체…….”
“뭐야 저 녀석은……?”
여기저기서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오싹!
전신에 퍼지는 차가운 한기.
플레이어들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트롤들 사이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로 지루할 틈을 안 주는군.”
진혁의 입가에도 복잡한 심정이 담긴 미소가 걸렸다.
솔직히 말해 이번엔 제법 놀랐다.